Trot

 

1963년 영국에서 비틀스가 등장하여 한 창녀에 의해 내각이 휘청거린 이른바 프로퓨모 스캔들마저 싹 가라앉을 만큼 열풍을 몰고있던 그 시점, 국내에도 그에 버금가는 가수가 출현했다. 그의 이름은 이미자였다. 이미자의 판 '동백아가씨'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1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지금으로 따진다면 200만장도 훨씬 넘어서는 폭발적 규모였다. KBS 라디오 '트로트 가요쇼'가 외부에 의뢰한 조사에서 이미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트 여가수'로 꼽혔다(남자는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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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가 20세기 서구대중음악 산업의 폭발을 가져온 존재라면 국내에서는 이미자가 음악산업화의 계기를 마련해준 인물이었다. 이미자는 나중 70년대 초반 치열한 라이벌전을 전개한 남진과 나훈아와 함께 텔레비전시대를 개척했으며 20세기의 국내 대중음악의 주류가 다른 무엇도 아닌 트로트였음을 입증해주었다.

 

일제시대인 1930년대 후반 트로트가 정립되었지만 그러나 전체 음악문화에선 여전히 민요와 판소리, 창극이 우세했다. 임방울의 음반은 어떤 트로트 앨범보다도 많이 팔려나갔으며 심지어 70년대까지도 국악은 TV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트의 스타시스템과 음악산업에 의해 차츰 시장에서 힘을 잃었으며 남진 나훈아 라이벌시대에 이르러선 트로트에 완전 밀려났다.

 

트로트 입장에서 그렇다고 항상 독재 독주의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통국악 외에도 미군정기에는 미국음악의 등장으로 시장과 정서의 분할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선진문화를 선망하는 식자층은 보다 세련된 스윙재즈나 스탠더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최희준, 패티김이 이 분야에서 활약했다.

 

다시 70년대 초반에는 청춘문화를 대변한 포크가 나와 젊은 수요자들은 서유석, 은희, 양희은, 트윈 폴리오 등의 음반으로 몰려갔다. 음악에 있어 세대차이가 처음 야기된 것도 이 때였다. 록음악도 시조 신중현에 의해 70년대부터 나름대로 지분을 차지하면서 그 기세는 산울림 그리고 대학가 캠퍼스 록밴드들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