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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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틴아메리카에는 정열의 댄스음악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앞서 아르헨티나 음악에서도 언급했듯이 중남미에는 자유와 평화를 향한 정치적 성향의 노래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이란 단어에 얼굴을 찌푸릴 이유는 없다.


   그러한 노래 속에는 내 나라 국민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길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지난 70년대 우리의 포크음악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남미지역은 식민지배에서 독립을 한 뒤에도 상당기간 국가적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대다수 국가의 국민은 가혹한 독재정치 아래에서 신음을 했다.


   1960년대 아르헨티나, 칠레에서 발전된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과 쿠바의 누에바 트로바(새로운 발라드) 뮤지션들은 그러한 독재와 탄압에 대한 비판을 노래 속에 담았고, 국민들에게 그에 맞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길 호소했다.


   결국 이 뮤지션들에게 `기타는 총이고, 노래는 총알'이었다. 아르헨티나의 뮤지션들은 최초로 누에바 칸시온의 이상을 현실에 옮겼다.
1962년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만도 테하도 고메스 같은 뮤지션들은 `공기 속에 새로운 협정과 화음'이란 주장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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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는 누에바 칸시온이 가장 처절하게 빛났던 나라이다.

 


   1969년 7월 칠레의 산티아고에선 수십 명의 음악인이 참여한 가운데 첫 번째 누에바 칸시온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그 당시 대통령후보였던 살바도르 아옌데를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옌데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누에바 칸시온 가수들은 새 대통령의 주위에 모여서 `노래 없이는 개혁도 없다'고 했고 노래했다.


   그러나 칠레의 미래에는 이미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1973년 9월, 육군사령관 피노체트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는 세계최초로 선거를 통해 탄생된 사회주의정권을 무너뜨렸다. 쿠데타군의 망명제의를 거부한 채 대통령궁을 사수하던 아옌데 대통령은 군부의 폭격으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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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황 속에서 첫 번째 누에바 칸시온 축제의 주인공이었던 빅토르 하라도 군인들에게 체포됐다.

 
   빅토르 하라는 가혹한 고문으로 손목과 팔이 부러졌고, 기관총으로 온 몸을 난사 당한 뒤 공동묘지밖에 버려졌다. 1991년 4월, 칠레의 무용가, 배우, 음악인들은 독재정권의 끝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빅토르 하라의 마지막 노래 가운데 하나인 <칸토 리브레: 자유의 노래>를 합창했다.


   1981년 쿠바에선 연약한 외모의 실비오 로드리게스가 전설이 된 파란 유니콘에 대해 노래했다. 독재에 항거하고 자유를 갈구한다는 내용의 이 노래로 인해, 유니콘이 그려진 티셔츠가 만들어졌고, 파란 유니콘은 이상을 상징하게 됐다. 다소 여린 목소리와 아름다운 멜로디, 서정미 가득한 그의 음악은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누에바 칸시온은 이들 나라 외에도 페루, 우루과이,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가장 중요한 중남미 라틴음악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