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c Clapton (에릭 클랩튼)

 

 

Eric Clapton.jpg “프레디 킹에서 시작하여 B.B.킹으로 이어지는 스타일들을 익히며 내 연주를 다듬어왔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들의 체취가 내 연주에서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은 영국의 기타리스트이자, 가수, 작곡가로, 록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 중 하나이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 역사상 유례없는 3종목 석권하는 등 역사상 최고로 영향력 있는 기타리스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에릭 클랩튼은 그 이름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음악 전설'이다.

40여년이 넘는 음악 여정 동안 그가 쌓아올린 메리트는 가히 대단하다.

 

야드버즈(Yardbirds)와 존 메이올스 블루스브레이커(John Mayall`s Bluesbreakers) 시절 블루스의 부흥을 주도했으며, 크림(Cream)의 활동기간 동안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공했고, 재즈와 블루스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

 

솔로로 독립하고부터는 '진짜 블루스'에 접속불가를 외치는 대중들에게 팝 지향적인 '달콤 쌉싸름한 블루스'를 패스워드로 내놓아 블루스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그래미 트로피를 10번 이상이나 받았으며,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92년 야드버즈, 1993년 크림, 그리고 2000년 개인 자격으로 헌액된 것에서도 클랩튼의 공로를 짐작할 수 있다. 

 

에릭 클랩튼은 '기타의 신', '슬로우 핸드(Slowhand)'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기타 테크닉에 있어서도 대가(大家)의 경지에 올랐다.

감정을 질펀하게 쏟아내면서도 정확하고 절제된 테크닉을 구사하는 벤딩 주법(일명 쵸킹)과 비브라토는 다른 연주자들이 흉내조차 힘들정도다. 그의 기타 연주와 관련하여 유명 기타리스트들의 많은 칭찬이 있었지만, 이런 융숭한 대접에 대해 클랩튼은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악평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호평도 마찬가지다."며 자신을 향한 관심을 무척 꺼려했다.

 

그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나같이 연주하는 것은 아마 무리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외보다는 그들만의 길을 개척할 것을 충고한다. 그의 음악과 인생 여로(旅路)가 굴곡이 심했기에 그 말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에릭 클랩튼은 1945년 3월 30일 영국 남동부 서레이(Surrey)주의 리플리(Ripley)에서 Eric Patrick Clapt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살 생일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 받고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불과 16세의 나이에 사생아를 낳은 에릭의 어머니는 자식을 키울 능력이 없었고, 어린 에릭은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며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흑인들의 비참함과 슬픔을 노래한 블루스가 그에게 찾아간 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땐 늘 외롭고 핍박을 당하면서 살았죠. 자존심과 위신, 용기를 가지고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바로 블루스가 그런 음악이더군요. 항상 누군가가 혼자서 연주를 하거든요. 외롭지만 꿋꿋하게 기타 하나로 세상을 상대하는 거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솔로 연주가 시작되면 밴드도 그룹도 없고 오로지 혼자만 남죠. 완전히 고립된 채, 선택의 여지없이 그저 노래하고 기타를 치면서 삶의 고통을 삭이는 건데, 바로 그런 점들이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블루스와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유명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들의 앨범을 듣고 악절을 따라 연주하며 기타 수업을 해나간다. 에릭 클랩튼은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빅 빌 블룬지(Big Bill Broonzy), 블라인드 윌리 존슨(Blind Willie Johnson) 등 초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성장했다. 특히 '델타 블루스의 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버트 존슨의 앨범들은 내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한때 킹스턴 아트 스쿨에 다니면서 디자이너를 꿈꾸었으나 에릭 클랩튼에게는 기타가 더 재미있었다.

이후 대학을 자퇴하고 지역 클럽이나 선술집에서 연주하며 전문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모색한다. 1963년 초, 톰 맥기네스(Tom McGuinness)라는 인물이 이끌던 리듬 앤 블루스 그룹 루스터스(Roosters)에 합류한다.

 

얼마 후에는 케이시 존스 & 더 엔지니어스(Casey Jones & The Engineers)에 가입했지만 그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고, 그는 중요한 전기(轉機)를 맞게 되었다.

 

1963년 10월, 새로이 주목받기 시작한 리듬 앤 블루스 그룹 야드버즈의 리더인 키스 렐프(Keith Relf)로부터 가입 요청을 받은 것이다.

 

그의 탁월한 연주력과 강한 카리스마는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에릭은 곧 밴드의 중추 인물로서 자리한다. 그의 뛰어난 블루스 기타 테크닉은 단숨에 그룹의 사운드를 특징지었고, 매니저 지오지오 고멜스키(Giorgio Gomelsky)는 그에게 '슬로우핸드(slowhand)'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야드버즈에 참여하여 두 장의 성공적인 앨범 [Five live Yardbirds](1964), [For Your Love](1965)를 발매하였으나, 그룹의 음악이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며 음악적인 견해차이를 보인 에릭 클랩튼은 1965년 3월 팀을 떠나 존 메이올이 이끌었던 블루스브레이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야드버즈를 탈퇴한 직후 그가 연주했던 "For Your Love"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야드버즈는 제프 벡(Jeff Beck)과 지미 페이지(Jimmy Page)가 가세하며 전성시대를 누렸다. 바로 록음악계의 '3대 기타리스트'가 야즈버즈를 통해 모두 비상했다.

 

이 당시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이와 관계된 에피소드 한가지. 그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휴지기 동안에 다른 뮤지션들과 전세계를 돌며 블루스 전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클랩튼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몇몇 멤버들이 영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한 클럽에서 계속 머물며 공연을 계속했다. 그는 그러나 강도로 돌변한 클럽 주인의 협박으로 옷과 새로 산 마샬 앰프를 놔둔 채 영국으로 도망쳐야했다. 음악 외에는 모든 일에 문외한이었던 '순수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John Mayall`s Bluesbreakers With Eric Clapton]이라는 단 한장의 앨범을 발표한 후 에릭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존 메이올의 독단적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자신만의 그룹을 결성하기로 계획했다. 그는 1966년 존 메이올 몰래 드러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Jack Bruce)와 함께 크림을 조직하고 합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음악 전문지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의 폭로로 인해 클랩튼은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이 때 런던의 한 빌딩 벽에는 '클랜튼은 신이다(Clapton is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많은 화제를 몰고 왔다.

 

에릭 클랩튼은 크림을 통해 '악기 예술의 미학'을 획득했다. 블루스와 재즈가 절묘하게 어울러진 그들의 사운드는 즉흥적이고 빠르며 굉음을 발산했다. 멤버들의 정교하고 뛰어난 연주 실력은 타 밴드와의 간격 차를 크게 벌려놓았고, 음악계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졌다. 그들의 앨범들인 1966년의 [Fresh Cream], 1967년의 [Disraeli Gears], 그리고 이듬해의 [Wheels Of Fire] 모두 명반으로 손꼽히며 파죽지세의 인기몰이를 했다.

 

특히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한자리에 모은 더블 앨범 [Wheels Of Fire]는 미국에서 4주간 정상을 차지하며 멤버들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바로 이 작품에 명곡 "White room"이 수록되어 있다. 재능있는 뮤지션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이들은 결성 당시 이미 열성팬들을 확보하였으며, [Fresh Cream] 발매 이후 미국 순회공연을 가지면서 즉흥 연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대성공을 거둔다. 그룹은 그러나 서로간의 음악적 견해차를 이유로 1968년 11월 앨버트 홀에서의 고별공연을 끝으로 해산했다. 클랩튼의 음악 이력 중 최고의 절정기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트리오는 1993년 1월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으로 재결합 공연을 가져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크림의 해체 이듬해 에릭 클랩튼은 진저 베이커와 함께 트래픽(Traffic)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 페밀리(Family)의 베이스 주자였던 릭 그레치(Rick Grech)를 영입하여 '슈퍼 그룹'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를 탄생시켰다. 이들은 1969년 6월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10만 명의 관중 앞에서 무료 콘서트를 개최함으로써 공식 데뷔하였다. 언론에서는 '인스턴트 슈퍼 그룹'이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들은 공연 때 '최후의 슈퍼 그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조를 이뤘다. 하지만 언론의 지적대로 그들은 1969년 데뷔 앨범 [Blind Faith]가 빅 히트를 기록하고 매진 사태를 빚을 정도로 성공적인 미국 순회공연을 마쳤지만 이후 각자의 길로 떠났다.

 

한동안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에릭은 1969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존 레논(John Lennon)의 자선공연에 참여하여 그의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에서 연주생활을 하게 된다. 1970년 셀프 타이틀의 데뷔 앨범 [Eric Clapton]을 발표하여 "After Midnight"로 인기를 모으며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각광받았지만, 솔로 주자로 활동하기를 주저한 에릭은 친구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All Things Must Pass] 앨범 작업을 돕는다.

 

에릭 클랩튼의 1970년대는 한 여인과의 슬픈 사랑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비틀스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Patti Boyd)였다. 클랩튼은 1968년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에 수록된 조지 해리슨의 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같은 해 공개된 솔로 음반 [Wonderwall Music]에서 기타를 맡을 정도로 조지 해리슨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조지 해리슨과 음악적 교류를 하면서 에릭 클랩튼은 패티를 본 후 사랑에 빠져버렸다. 당시 종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패티 보이드는 클랩튼에게 의도적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악 밖에 모르던 에릭은 그만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와의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진 에릭 클랩튼은 술과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런 사랑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은 1970년 11월에 발표된 올맨 브라더스의 듀언 올맨 등과 함께했던 밴드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의 마스터피스 [Layla & Other Assorted Lovesongs]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남편이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을 때/ 나는 당신을 위로하려고 노력했어요/ 바보처럼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져버렸죠/레일라 당신은 나를 무릎꿇게 만들었어요/ 레일라, 당신께 애원합니다/ 제발...'.

수록곡 "Layla"의 구구 절절한 가사처럼 에릭 클랩튼의 상처받은 마음은 노래 전체에 녹아들었다.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음악으로 걸러냈다. (에릭 클랩튼의 이러한 마음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얼마 후 패티 보이드는 조지 해리슨과 이혼했고, 둘은 1979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음반은 비록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블루스와 삶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걸작의 반열로 들어섰다.)

 

1970년에 결성되었던 데릭 앤 더 도미노스는 1972년 해체되었다.

에릭 클랩튼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알코올과 약물 중독으로 인하여 병원과 요양원을 들락거려야만 했다. 기타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드라마틱한 재기 스토리가 전개된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그에게 구세주가 찾아왔다. 그룹 후(The Who)의 피트 타운센드(Pete Townshend)였다. 피트는 이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찬밥취급을 받던 지미 헨드릭스를 영국으로 데려와 음악계에 데뷔시키는 등 '선행'을 벌여왔다.

 

피트는 클랩튼에게 마약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했고, 1973년 에렉 클랩튼의 레인보우 콘서트를 주최해 재기의 무대를 마련해줬다. 클랩튼은 데릭 앤 도미노스 이후 3년 만에 런던 레인보우 극장에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피트는 에릭 클랩튼이 정신을 못 차리자 하와이안 기타로 머리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공연실황은 앨범 [Eric Clapton's Rainbow Concert]로 발매되었다. 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또 다시 침체기로 들어간다.

 

에릭 클랩튼은 그 해 말부터 웨일즈에 있는 친구의 농장에 머물며 전기 침술을 통한 약물중독 치료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74년 봄, 그는 다시 일어섰다. 에릭 클랩튼은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던 이 시기를 잊지 못하고, 1999년 마약 중독자 치료기금을 위해 자신의 기타 100대를 경매에 내놓은바 있다.

 

기력을 회복한 에릭 클랩튼은 1974년에 재기 앨범 [461 Ocean Boulevard]를 내놓았다. 앨범이 출시되기까지는 피트 타운센드와 함께 RSO 레이블의 사장인 로버트 스틱우드(Robert Stigwood)의 도움이 컸다. 그는 폐인이 된 클랩튼을 위해 요양장소로 플로리다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선뜻 내주며 재기의 기틀을 마련케 했다. 클랩튼도 스틱우드의 호의에 고개 숙여 감사하며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스틱우드의 별장주소가 바로 이 앨범의 타이틀 [461 Ocean Boulevard] 이다. 스틱우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 것이다. 이 앨범으로 에릭 클랩튼은 밥 말리(Bob Marley)의 곡을 리메이크한 "I shot the sheriff"는 정상을 차지했고, "Let it grow", "Give me strength" 등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기타의 신'으로 부활했다.

 

앨범 [461 Ocean Boulevard]의 여파는 다음 앨범인 [There's One in Every Crowd](1975)에까지 이어진다.

이 앨범은 레게와 블루스 등 전작의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레게 스타일로 편곡한 흑인영가 "Swing low sweet chariot"는 싱글 히트를 기록했다. 이 앨범 역시 밥 딜런의 곡을 커버한 싱글 "Knockin' on heaven's door"가 약간의 히트를 기록하며 미국과 영국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긴 했지만 전작만큼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어 1975년 색다른 라이브 앨범 [E.C. WasS Here]가 발매된다. '블루스로의 회귀‘를 보여준 이 앨범은 에릭 클랩튼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작품인 듯, 블루스 브레이커스 시절 연주했던 "Ramblin' on my mind"를 비롯하여 블라인드 페이스의 "Presence of the lord"와 "Can't find my way home", 그리고 데렉 앤 더 도미노스 시절의 "Have you ever loved a woman" 등을 수록하고 있다. 여전히 '기타 연주자'이기를 꺼려한 에릭 클랩튼 대신 조지 테리에 의해 연주된 리드 기타는 느른하게 곡들을 이끌어가며 듣기 편안한 분위기를 이룬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앨범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76년의 추수감사절, 에릭 클랩튼은 샌프란시스코의 윈터랜드 무도관에서 행해진 밴드의 고별 공연 ‘마지막 왈츠(The Last Waltz)’에 출연하여 Further on up the road를 연주한다. 이 공연은 마틴 스콜세지에 의해 다큐멘터리로 촬영되었다. 그는 또한 조 카커(Joe Cocker)나 스티븐 비숍(Stephen Bishop), 링고 스타(Ringo Starr),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 등 유명 뮤지션의 앨범에 세션 연주자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No Reason to Cry](1976)에 이어 1977년에는 "Wonderful tonight"이 실려있는 앨범 [Slowhand]를 발표하여 300만장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1978년에는 앨범 [Backless]를 발표하였는데, 이 앨범은 컨트리적인 색채가 다분한, 듣기 편한 작품이었다. 밥 딜런의 두 곡을 포함하여, 귀에 쏙 들어오는 멋진 기타 연주와 파퓰러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Tell me that you love me", 8분 가까이 연주되는 멋진 블루스 "Early in the morning", 미국 차트 9위에 오른 담담한 보컬의 "Promises" 등 전작에 못지 않은 완성도를 지닌 곡들이 포함된 이 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하지만 조지 테리, 칼 레이들, 제이미 올데이커, 딕 심스, 마시 레비 등 그 동안 에릭 클랩튼의 백 밴드 역할을 했던 뛰어난 연주자들은 이 앨범을 끝으로 에릭의 곁을 떠나게 된다. 이듬해인 1979년 3월, 그는 기타리스트 알버트 리(Albert Lee), 키보디스트 크리스 스테인튼(Chris Stainton), 베이시스트 데이브 마키(Dave Markee), 그리고 드러머 헨리 스피네티(Henry Spinetti)의 라인업으로 세계 투어를 시작한다.

 

1981년 3월엔 [Another Ticket]이 빅 히트를 장식하고, 1983년 블루스 성향의 [Money and Cigarettes]를 발매하였다. 1985년에는 드럼의 필 콜린스와 제프 포카로, 베이스의 네이던 이스트와 도널드 “덕” 던, 기타의 스티브 루카서 등을 초빙해 [Behind The Sun]을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제네시스(Genesis) 출신의 드러머 필 콜린스의 프로듀싱으로 완성된 이 앨범은 필 콜린스의 신서사이저 편곡으로 인한 뉴 웨이브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듯한 독특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Forever man"과 "See what love can do" 두 곡의 싱글 히트곡이 나왔고, 앨범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1986년 초, 마이클 카멘(Michael Kamen)과 함께 BBC1-TV의 스릴러물 의 음악을 맡은 에릭은 31회 ‘이보 노벨로(Ivor Novello)’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86년 또 다시 필 콜린스가 프로듀스를 맡은 앨범 [August]를 발매한다. 전작에 이어지는 전형적인 '80년대 스타일의 사운드로 가득한 이 앨범에는 몇몇 주목할만한 요소들이 포함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컬러 오브 머니(Color Of Money)>에 수록되었던 "It's in the way that you use it"을 비롯하여, 티나 터너(Tina Turner)가 보컬에 참여한 "Tearing us apart"와 "Hold on" 등은 펑키한 리듬과 팝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당시의 흐름에 충실한세련된 팝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다.

 

각종 공연에의 참여와 여러 사운드트랙들을 담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그는 새로운 앨범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또한 1988년에는 에릭 클랩튼의 역사를 집대성한 앨범 [Crossroads]를 공개하는 등 꾸준하게 앨범을 발표하였다. 1989년에는 앨범 [Journeyman]으로 자신의 초창기 블루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스타일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룹시절과 달리 음악적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에너지가 없어지고 느슨해진 팝 블루스'라며 평가 절하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함께 현실무대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운명의 여인' 패티 보이드와 헤어지고 이탈리아 투어 도중 만난 젊은 사진작가이자 배우였던 로리 델 산토(Lori Del Santo)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네살바기 아들 코너(Corner)가 뉴욕 맨하탄의 아파트에서 실족사한 것이다. 나중에 에릭 클랩튼은 “내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온통 경찰관과 의료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느껴졌다.”며 망연자실했던 당시의 심정을 묘사했다.

 

클랩튼은 그러나 '예전처럼' 기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타와 노래에 더욱 몰두했다. 음악만이 유일한 치료제라는 것을 이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는 가슴을 찢는 고통에서 일어나 곧 새로운 투어를 시작한다. 그 해(1991년) 가을 발매된 더블 라이브 앨범 [24 Nights]는 2월에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행한 24일 간의 공연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Sunshine of your love", "White room" 등 옛 레퍼토리들과 근작 앨범들에서 발췌된 수록곡들은 여러 참여 뮤지션들의 연주와 더불어 멋지게 연주된다. 이 앨범에서 발췌된 "Wonderful tonight"은 영국 차트 30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92년 영화 <러쉬(Rush)>의 사운드 트랙에 삽입된 "Tears in heaven"에 죽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었다. MTV의 제안으로 그 해 녹음된 앨범 [Unplugged]에서의 백미도 단연 이 곡이었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애절한 멜로디와 노랫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 그래미는 그에게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핵심 부문을 포함하여 6개의 트로피를 '위로 선물'로 전달했다. '추억'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재진입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에릭 클랩튼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 에릭 클랩튼의 모습은 여러 시상식과 공연장을 통해 쉽게 볼 수 있었다. 1994년 발매한 그가 오랫동안 녹음하고 싶어한 블루스 연주자들인 윌리 딕슨,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르로이 카(Leroy Carr) 등의 블루스 스탠다드 곡들로 이루어진 앨범 [From The Cradle]은 흥행과 평단 양편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얻었다. 미국과 영국 앨범차트를 동시 석권하였고, 블루스의 성찬을 담아낸 작품으로 격찬 받았다.

 

또한 이 앨범으로 에릭 클랩튼은 4개의 그래미상을 획득하였다. 1996년 베이비페이스(Babyface)가 작곡한 존 트래볼타(John Travolta)가 주연한 영화 <Phenomenon>에 삽입된 "Change the world"를 발표하여 차트 1위를 기록하였고 1997년의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최우수 남자가수의 3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에릭은 1997년 프로듀서이자 키보디스트인 사이먼 클리미에(Simon Climie)와 뉴 에이지/트립합(trip-hop) 듀오를 결성했고, 엑스 샘플(X-sample)이라는 가명으로 테크노 앨범 [Retail Therapy]를 발표한다.

 

1998년엔 1989년 [Journeyman] 이후 첫 정규 앨범인 [Pilgrim]을 발표하여 "My Father's Eyes"이 탑 10에 진입하는 등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0년에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74세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B. B. 킹과 함께 블루스 명곡들을 연주한 블루스 앨범 [Riding With The King]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 앨범으로 에릭 클랩튼은 그래미를 또 한번 수상하게 된다.

 

2001년 3년만의 솔로 앨범 [Reptile]에서도 여전히 정통 블루스 음악에 심취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Reptile] 앨범 발표 이후 가졌던 LA와 동경의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One More Car, One More Rider](2002)는 이전의 라이브 앨범들에 비해 취약하다는 평을 얻기는 했지만 에릭 클랩튼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2004에는 자신에게 가장 음악적 영감을 많이 주었다는 로버트 존슨의 곡들을 수록하여 약 50여년간의 자신의 음악여정을 정리 집약하여 보여 주고있는 앨범 [Me And Mr. Johnson], 그리고 [Sessions For Robert J.]를 발표하였다. 2005년에는 4년만에 스튜디오 정규 앨범 [Back Home]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에 가진 10년만의 내한공연을 기념하여 "Tears In Heaven", "Change The World", "Wonderful Tonight" 등의 대표곡은 물론, 한국팬을 위하여 에릭클랩튼이 직접 선곡한 13곡이 수록된 보너스 디스크가 포함된 [Chronicles-Korea Tour 2007 Limited Edition]을 발표하였다.

 

에릭 클랩튼은 피킹의 액센트 조절이 뛰어나다. 곡의 성격에 따라 멜로디에 힘을 넣는 방법이 각기 다른데, 이 피킹 조절이야말로 그만의 빼어난 리듬감과 특유의 그루브를 창출하는 핵이 되고 있다. 거기에 그의 핑거링은 부드럽고 자연스런 포지션 이동을 통해 섬세하며 아름다운 음을 배열해 간다. 이것은 그의 능란한 초킹과 해머링, 풀링, 슬라이드의 효과적인 쓰임에 의한 것이랄 수 있다. "Why Does Love To Be So Sad", "Deserted Cities Of The Heart", "Double Trouble", "Lay Down Sally" 등이 그 대표적이며 와와 프레이즈에 의한 다양한 바리에이션 솔로도 "White Room", "Tales Of Brave Ulysses", "Presence Of The Lord" 등에서 들을 수 있다.

 

이외에 부드러운 멜로디와 음정의 정확함이 돋보이는 다채로운 벤딩 프레이즈와 런주법도 그의 장기인데, 이후 이러한 주법은 70년대의 하드록 기타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Do What You Like"에서의 도리안 스케일에 기반한 색다른 솔로처럼 실험적인 테마 전개에도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어쨌든 ‘에릭 클랩튼’이라는 이름은 그 부드럽고 정확한 피킹이 만들어내는 포근하고 화사한 톤과, 노래하는 듯 자연스런 라인, 그리고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리듬 등으로 록기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로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