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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a Jane Fitzgerald(1917-1996)

 

"송 오브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 of Song),", 재즈의 여왕(Queen of Jazz)", "레이디 엘라(Lady Ella)"라 불리우는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 1917-1996)’는 '버지니아주 '뉴포트뉴스(Newport News, Virginia)'에서 출생하였다.

 

'윌리엄과 템퍼런스(William Fitzgerald  Temperanc0)'와 '템피' 피츠제럴드("Tempie" Fitzgerald)' 부부 사이의 딸로 태어났는데, 이 부부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로 그녀가 태어난 지 일년도 채 안되어 서로 헤어졌다. 모친의 새로운 파트너 포루투칼 이민지 '조셉 다 실바(Joseph Da Silva)'와 모친과 함께 뉴욕 주 용커스(Yonkers, new York)'로 이주하여 자라왔다.

 

1932년 엘라이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녀는 학교를 종종 빼먹고 잘 다니지 않았다. 양아버지의 학대에 동쳐나와 그녀의 사촌집에 기거하며 일거리를 찾다가 매음굴에서 망보는 일을 하며 지내다 잡혀서 '브롱스 리버데일(Riverdale, Bronx)'의 '흑인고아보호소(Colored Orphan Asylum)'로 보내진다.

 

그러나 고아원에 인원이 차 '엘라(Ella)'는  다시 '뉴욕 휴스톤(Hudson, New York)'에 있는 주립 뉴욕 여자기술학교(New York Training School for Girls)'로 보내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곳을 결국에는 도망쳐 집없이 홀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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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Ella)'는 1934년 11월 21일 할렘의 아폴로 극장(Apollo Theater in Harlem, New York)'에서 주중에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가수로서 첫 데뷰한다. 그러다 저 유명한 아마츄어 나잇(Amateur Nights)"의 초기 무대의 하나인 아마추어 콘테스트에서 우승을 한다.

 

그녀는 어릴적 부터 댄서가 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 경연대회에서도 춤추며 노래하려 했으나 로컬 댄스듀오인 '에드워드 시스터스(Edwards Sisters)'의 협박으로 '코니 보스웰(Connee Boswell)' 의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녀는 '보스웰 시스터즈(Boswell Sisters)'가 노래한  '보스웰(Boswell)'의 '쥬디(Judy)', '내 관심의 대상(The Object of My Affection)'을 노래했다. 그리고 일등상을 받고 상금으로 $25를 받았다.

 

1935년 1월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할렘 오페라 하우스(Harlem Opera House)'에서  '티니 브로드쇼 밴드(Tiny Bradshaw band)'와 일주일 동안 공연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거기서 드럼연주자이며 밴드 리더인 '칙 웹(Chick Webb)'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칙 웹(Chick Webb)'은 이미 밴드 가수로 '챨스 린튼(Charlie Linton)'과 공연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웹(Webb)'은 '엘라(Ella)'에게 예일대학 댄스공연 때 밴드와 함께 테스트 해보기로 제안하였다. 이후 그녀는 '치크 웹 오케스트라(Chick Webb's Orchestra)'의 전속가수가 되d어 1935년부터 '할렘의 사보이 대연회장(Harlem's Savoy Ballroom)'에서 공연을 하였다.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러브 앤 키스(Love and Kisses)"와 "만일 그대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면(If You Can't Sing It)', 스윙을 하세요(You'll Have to Swing It (Mr. Paganini)"같은 히트곡들이 스록된 음반을 취입했다.1938년 공동작곡의 '어 티스켓, 어 타스켓(A-Tisket, A-Tasket)'이 히트하여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된다.

 

Ella_7.jpg 1939년 독립하여 빌리 홀리데이(Billy Holiday)' 사망 후로는 명실공히 최고의 여류 재즈가수로서 인기를 모았다 1942년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밴드를 그만두고 솔로 가수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데카(Decca Label)' 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빌 케니(Bill Kenny)'와 '잉크 스팟스(The Ink Spots)', '루이스 조르단(Louis Jordan)'과 '델타 리듬 보이스(The Delta Rhythm Boys)'와 같은 가수들과 음반을 취압하며 몇몇 히트곡들을 만들어냈다.

 

'데카(Decca)'의 '밋 가비에르(Milt Gabler)'를 매니저로 하며 그녀는 정기적으로 재즈 흥행가 '노 먼 그란즈(Norman Granz)'와 정기적으로 일하며 그의 필하모닉 재즈 컨서트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였다. '피츠제럴드(Fitzgerald)'와 '그란츠(Granz)'와의 관꼐는 점점 견고해지며 나중에는겨이 십년 가까이 매니저로서 일하게 되었다.

 

'스윙 시대(Swing era)'가 끝나고, 빅 밴드 투어가 사향길에 접어들며 재즈(Jazz)' 재즈 음악계에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었다. '비밥(Bebop)'이 등장하며 '피츠제널드(Fitzgerald)'의 보컬 스타일은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리드되어 같다.

 

그녀는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의 빅 밴드와 일을 같이 하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가 '피츠제럴드(Fitzgerald)'가 재즈(Jazz)'에서 목소리로 가사 없이 연주하듯 음을 내는 창법을 맣하는 '스캣(Scat)'으로 공연 레파토리의 일부로, 중요한 부분을 노래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길레스피(Gillespie)'와 노래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나는 그저 내 목소리로 밴드 에서 호른의 소리를 듣으려 했을 뿐이었다" 라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의 1945년 스캣 앨범인  "프라잉 홈(Flying Home)"은  빅 쉔(Vic Schoen)'이 기확한 앨범으로 나중에 '뉴옥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한 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재즈 레코드 중 하나로....모든 가수들 중에 가장 독보적으로 '루이 암스스통(Louis Armstrong)'이 보여주었던 '임프로비에이션(improvisation, 즉흥연주)'을 '피츠제럴드 양(Miss Fitzgerald)'이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이전에 그 누구도 이와같은 눈부신 독창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라 평하고 있다. 그녀의 비밥(Bebop)', "오, 레이디 비 굿(Oh, Lady Be Good!)" (1947) 은 그녀를 대중과 더욱 친밀하게 하였고 그녀를 리딩 재즈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서의 명성을 먿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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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피츠제널드(Fitzgerald)'는 그란즈(Granz)'의 JATP 콘서트에서 여전히 공연을 했다.

 

그녀는 '데카(Decca)'와 그녀의 음악을 중심으로 만든 '버브 레코드(Verve Records)'를 만든, 매니저 '그란츠(Granz)'를 떠난다.

 

'피츠제널드(Fitzgerald)'는 후에 전략적 결정을 하였던 이 시절을 회상하며 말하기를,

 

 "나는 오직 비밥(be-bop)'을 노래할 수 있는 곳이면 된다는 점에서 결론을 찾았다. '비밥(be-bop)' 바로 "그것(it)'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곳으로 가 '밥(bop)'을 노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은 비밥을 노래하는 곳보다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만(Norman)'은 ... 내가 드른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해서 그는 나와 '콜 포터 송북( The Cole Porter Songbook)"을 만들었는데 그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라 말하고 있다.


1956년 발표된 '엘라 피츠제널드가 노래한 콜 포터 송북(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book)'은 8권 세트 중 첫번째로, '비브 레코드(Verve)'에서 1956년에서 1964년 까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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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미국의 송북(Great American Songbook)"이라 알려지며, 매 세트 마다 작곡가와 작사자가 주목을 받았다. 앨범에서 그녀의 노래는 일반곡에서 희귀곡 까지, 그리고  '피츠제널드(Fitzgerald)'가 시도한 재즈 팬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크로스 오버(cross over)'의 곡들이 수록되었다.

 

이 세트들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이템이 되었다,

 

이 송북(songbook)'은 작곡자가 가수를 해석하여 가수에 맞는 곡들을 모아 만든 유일한 송북(Song Book)'이었다. 또한 '듀크 엘링톤(Duke Ellington)'과 그의 오랜 동반자 '빌리 스트레이혼(Billy Strayhorn)'도 38트랙의 하프 세트의 송북(Songbook)'을 만들고 앨범, "E와 D qmffntm(The E and D Blues)" 에 실릴 새로운 곡들을 만들었다.

 

'송북(Songbook)'은 결과적으로 가수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 문화에 경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96년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이 앨범들은 팝 음반 중 최초로 작곡가 개인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기여한 앨범으로, 이들은 다양한 음악적 탐구의 수단으로써의 대중 음반을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 이후로 그녀는 명실상부한 재즈의 안방마님이자 안주인으로 등극했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레전드가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이들(루이 암스트롱, 두번째 남편인 레이 브라운, 조 패스 등)과 함께 노래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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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건재를 과시하며 롱런한 그녀는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건강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꼈다. 심장병이 찾아오고, 백내장이 찾아오고 하면서 그녀의 건강은 빛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91년도에 마지막 레코딩을 하고 93년도에 마지막 공연을 하면서 94년도에 은퇴를 하게된다. 그리고 2년후인 1996년도에 당뇨, 심장질환 합병증으로 집에서 눈을 감게된다.

 

 '피츠제럴드(Fitzgerald)'가 죽은 며칠 뒤,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칼럼이스트 '프랭크 리치(Frank Rich)'는 그녀의 송북 시리즈(Songbook series)'에 대해 쓰기를, "엘비스(Elvis)'만큼 위대한 문화적 거래를 이루어냈으며 동시에 백인과 흑인의 영혼을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 흑인 여성은, 그동안 유대인 이민지들이, 대부분 백인 크리스챤인 관중들을 위해 만들었던 도시풍의 노래들을 대중적으로 사랑받게 만들었다" 하고 있다.


가수로 활동하는 59년 동안 13차례의 그래미상,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자유의 메달',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게 국립 예술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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