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역사 - (5) 1960년대의 팝음악 1

 

이번에는 1960년대 전반기의 주요 음악 현상이었던 서프 뮤직, 포크, 소울 그리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대해 알아보자.

 

The Swinging Sixties
 

영국과 미국 등 서구 젊은이들이 보다 많은 즐거움을 영위한 시대. 영국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으며 영국은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 되었다. 특히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과 런던에서는 미니스커트 같은 가장 현대적인 옷들이 디자인되고 유행했다. 영국과 미국의 60년대는 공통적으로 기존의 가치관에 대항하고 사회변혁의 분위기가 형성된 시기였다. 영국과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과 핵무기에 반하는 정치적 저항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히피로 알려진 젊은 층들은 쾌락을 위해 LSD와 같은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피임약의 보급은 사람들에게 더욱 자유분방한 성적 자유를 선물했다. 음악과 패션은 새로운 사고를 표현했다.

 

'자유의 목소리'는 영국과 미국 외에 제3세계에서도 높이 울려 퍼졌다. 많은 작은 국가들이 더 거대하고 힘있는 나라들의 지배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억압과 박해의 역사적 원형을 극복하기 위해 싸웠던 시기였다. 세계 곳곳에서 개개인들이 그들의 자유 발전을 억압했던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성의 패턴들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성취하는 가능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베이비붐 세대 성장, 기성권위에 대한 회의. 젊음의 소리, 로큰롤, 학생운동, 흑인민권운동, 여권신장. 이제껏 전혀 인정 받지 못했던 것들이 만개했던 시대였다.

 

 

Surfing U.S.A. (Surf Music, 1961~65)

 

01.jpg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던 6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 그곳에서 서프 뮤직이 당시 젊은이들의 무료함을 즐거운 음악과 하모니로 대변해 주는 하나의 장르로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원래 하와이 왕족들의 스포츠에서 발전된 서핑(surfing)은 당시 자동차 경주와 함께 캘리포니아 베이비붐 세대들의 가장 중요한 놀이 문화였으며, 아메리칸 드림과 부(富)의 상징이었다.

 

그러한 서퍼들이 즐긴 서프 음악은 일반적으로 여름음악이나 낙천적인 음악으로만 알고 있으나, 기타가 중심이 되어 향후 전기 기타 연주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음악 스타일이기도 하다.

 

특히 '서프 기타의 아버지'로 인정 받은 딕 데일(Dick Dale)은 마치 서핑할 때 파도를 연상시키는 트왕(twang) 기타 주법을 발전시켰다(그의 1962년도 곡 'Misirlou'는 영화 [펄프 픽션]에도 삽입되었다). 서프 사운드는 딕 테일과 그의 밴드 델톤스(Del-Tones)에 의해 커나갔으며, 계속해서 많은 서프 밴드들이 등장했다. 'Walk, Don't Run'을 연주한 벤처스(Ventures), 'Surf City', 'Dead Man's Curve' 등을 부른 보컬 듀오 잰 앤 딘(Jan & Dean), 'Wipe-Out'의 서파리스(Surfaris), 'Pipe Line'의 챈테이스(Chantays) 등의 서프 연주 밴드들이 가장 유명했다.

 

02.jpg 주지하듯이 서프 뮤직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시절, 즉 사시사철 내리쬐는 태양과 모래사장, 그 해변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한 음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서프 음악은 서핑족들뿐 아니라 핫 로드 뮤직(Hot Road Music)이라는 (개조된) 자동차 경주족들의 음악으로도 환영 받았다.

 

비치 보이스의 'Barbara Ann'(1965)은 고속 자동차를 쫓아다니는 여자를 그린 노래이며, 잰 앤 딘의 'Dead Man's Curve'는 위험한 자동차 경주를 내용으로 한 곡이다. 또 비치 보이스가 부른 'Shut Down'의 제목은 자동차 경주에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을 뜻한다.

 

서프 뮤직과 관련해 가장 많이 사랑 받았던 그룹은 역시 비치 보이스(Beach Boys).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이라는 천재 뮤지션이 이끌었던 비치 보이스는 윌슨의 뛰어난 작곡 실력을 바탕으로 척 베리 스타일의 기타와 뛰어난 보컬 하모니를 들려줬다.

 

특히 기타와 화음이 적절히 조화된 'Surfin' USA'는 불후의 서프 명곡이 되었다. 그들은 그러나 1963년 이후 서프 뮤직을 그만 두고 필 스펙터(Phil Spector)에 영향 받아 음악 폭을 확장하면서 복잡한 스튜디오 실험에 힘썼으며, 그 결과 1966년 [Pet Sounds]라는 팝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을 남겼다.

 

그 음반이나 'Good Vibrations' 같은 싱글을 들어보면 비치 보이스의 놀라운 성취를 실감할 수 있다. 1966년 비치 보이스는 비틀즈에 필적했다.

 

 

Blowin' In The Wind (Modern Folk)

 

1960년대 초반 미국 서부에서 서프 뮤직이 붐을 이뤘다면 동부에서는 포크가 널리 퍼졌다. '40년대 중반부터 피트 시거와 그의 그룹 위버스(Weavers), 그리고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에 의해 전통적인 저항가요의 형태로 발전된 포크 음악은 60년대 들어 진보적인 백인 대학생들에게 어필하면서 새로운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미네소타에서 온 뉴욕의 젊은 가수 밥 딜런에게 포크가 당도했다. 밥 딜런(Bob Dylan, 본명은 로버트 짐머만)은 포크 음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포크의 혁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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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이 처음부터 포크의 원형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딜런은 우디 거스리의 음악에서 모범을 찾았고, 현대적인 포크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1961년 전통적인 멜로디에 근거한 셀프 타이틀 앨범을 낸 이후 밥 딜런은 곧 자신만의 언어와 음악을 만들어냈다.

 

'Blowin' In The Wind'라는 포크 명곡과 [Freewheelin'](1962) 등의 걸작 앨범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기타와 하모니카 단 두개의 악기와 비음 섞인 목소리로 읊조리듯 노래했다. 그러나 딜런은 그 단순한 음악 속에서도 깊은 사상과 냉철한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음악을 문학의 경지에 끌어올렸다.

 

예전 포크 가수들과 비교했을 때 밥 딜런의 가사는 보다 풍자적이고 쓰라렸으며 시적이었다. 운율과 의미 둘 다를 완벽하게 구현한 시인이자 사상가였다. 또한 그의 텍스트들은 미국 사회에 대해 저항의 뜻을 분명히 했고, 그는 정치적이 될 것을 주장했다. 밥 딜런의 프로테스트 포크는 환영 받았지만 모든 대중들이 그의 뜻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은 존 바에즈, 필 오크스 등 여러 포크 가수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싱어송라이터들에게 밥 딜런의 존재는 공룡과도 같았다. 소니 앤 셰어, 버즈, 더 밴드, 러빙 스푼풀, 터틀즈, 도노반, 사이먼 앤 가펑클 그리고 헤비 메탈 사운드를 제시한 지미 헨드릭스까지 모두 밥 딜런의 세례를 받은 뮤지션들이다.

 

밥 딜런 류의 정치적 포크와는 달리 편안하고 달콤한 상업적 포크 음악도 그 이전부터 동시대까지 크게 사랑 받았다. 킹스턴 트리오(Kingston Trio)는 포크송 'Tom Dooley'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비슷한 성향의 3인조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도 1963년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If I Had A Hammer’ 등으로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한 그룹들의 음악은 밥 딜런의 그것보다 도시적인 팝 음악의 전통에 보다 기대고 있었고, 저항색채가 훨씬 덜했다. 노래 부르기 스타일도 훨씬 부드러웠으며, 하모니는 매끄럽고 전문적이었다. 그러나 피터 폴 앤 메리가 1963년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녹음하면서 포크의 두 진영이 함께 포크 리바이벌을 이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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