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역사 - 6(1960년대의 팝음악 2)
팝의 역사 - (6) 1960년대의 팝음악 2
Say It Loud - I’m Black And I’m Proud (Soul Music Part 1)
’50년대까지 흑인음악은 블루스를 거쳐 두웝 사운드를 유행시켰고 무엇보다 로큰롤을 파생시켰다. 하지만 미국 백인 자본의 철저한 흑백분리 고수 원칙과 인종차별 때문에 흑인가수들은 음반 한 장 제대로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흑인음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것은 인종 차별 폐지의 목소리, 즉 소울(soul) 음악이었다. 소울 음악은 흑인들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소울이란 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본질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소울 음악은 단지 양식뿐 아니라 신념이었으며 귀속의식, 잠재력, 자존심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소울 음악이 미국 내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흑인들의 인권 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중심에는 레이 찰스(Ray Charles),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샘 쿡(Sam Cook) 등의 걸출한 가수들이 있었으며, [모타운], [애틀랜틱]과 같은 흑인 전문 레이블이 든든히 뒤를 받쳐 주었다. 우선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등을 발굴했던 [애틀랜틱(Atlantic)] 레코드. [애틀랜틱]은 40년대 중반 터키계 미국인이었던 아메트(Ahmet), 네슈이 어테군(Nesui Ertegun) 형제가 재즈와 블루스를 위해 설립한 소규모 레이블이었다. 하지만 작곡자 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Jerry Wexler)를 영입한 이후 흑인음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부터 대표적인 흑인음악 레이블이 되었다.
[애틀랜틱]의 대표가수는 레이 찰스. 1930년 조지아에서 태어난 그는 6살 때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 다행히도 장애를 겪기 전 피아노를 배워 10대 후반까지 냇 킹 콜 풍의 가수이자 피아니스트로 일했다. 대부분의 소울 가수들이 교회 출신이지만 레이 찰스는 예외였다. 그러나 그는 R&B 스타일에 가스펠의 요소들을 혼합했다. 레이 찰스는 1959년 ‘What’d I Say’의 히트로 백인들에게 인정 받은 첫 번째 흑인가수가 되었는데, 그 곡에서 보면 리드 보컬에 답하는 가스펠 스타일의 ‘주고 받기(call and response)’를 들을 수 있다. 특히 레이 찰스가 다른 소울 가수들과 구별되는 뛰어난 재능은 컨트리, 리듬 앤 블루스, 재즈를 가스펠과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밴드 편곡은 컨트리와 블루스적인 요소들을 혼합했고, 그의 피아노 연주는 가스펠에서 영향 받았다.
야성적이고 독특한 무대매너 때문에 ‘미스터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은 제임스 브라운은 소울의 혁신자였다. ‘소울 브라더 넘버 원’이고도 불리는 그는 침례 교회에서 가스펠을 배웠고 50년대 중반 스와니스(Swaness)라는 가스펠 그룹에서 활동했다. 브라운은 가스펠을 통해 세속적인 주제를 노래했으며, 극적이고 정력적인 발성으로 무대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듯 라이브 공연에 몰입했다. 1963년도의 전설적인 음반 [Live At The Apollo]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공연 실황이다. 또한 그는 ‘Out Of Sight’(1964), ‘Papa’s Got A Brand New Bag’ 같은 곡에서 보듯이 아프리카 토속의 폴리 리듬과 멜로디에 근거한 새로운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바로 펑크(funk)였다. 브라운은 소울과 펑크(funk) 무브먼트에 둘 다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한편 자동차의 도시로 유명한 디트로이트에서는 또 하나의 흑인 사운드가 탄생하고 있었다.
베리 고디(Berry Gordy Jr.)가 창설한 [모타운(Motown)] 레코드였다. 베리 고디가 직접 발표한 ‘Reet Petite’와 재키 윌슨(Jacky Wilson)에게 준 ‘Lonely Teardrop’(1959)의 성공과 함께 [모타운]의 신화가 시작되었다.
그 곡들이 밀리언 셀러가 되자 베리 고디는 1959년 가족들에게 800달러를 빌려서 [모타운] 레코드를 설립했다. 잠시 자본난에 허덕이기도 했던 베리 고디는 스모키 로빈슨과 미라클스를 레이블의 주력 그룹으로 내세워 승승장구 해나가기 시작했다.
[모타운]은 말하자면 스타 양성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작곡가와 안무가, 프로듀서들을 일류로 배치시켰으며, 소속 아티스트에게 말투, 행동, 걸음걸이까지 마치 자동차 공정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스타가 되는 모든 과정을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심지어 세련돼 보이도록 가수들에게 가난한 흑인들은 절대 걸칠 수 없던 턱시도, 중절모 등을 입게 했다. 베리 고디는 그렇게 만든 [모타운]의 세련된 이미지를 미국 주류에 어필할 수 있는 가스펠과 결합시켰다. 향후 베리 고디는 걸 그룹 사운드의 유행을 감지하고 걸 그룹들을 집중 양성해 마벨레츠, 마사 앤 더 반델라스, 그리고 다이애나 로스의 슈프림스(Supremes) 같은 슈퍼스타를 탄생시켰다.
I Wanna Hold Your Hand (The Beatles Part 1)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클래식 전통이 강했던 영국은 상당히 절충적인 음악을 하고 있었다. 스키플과 트래디셔널 재즈 정도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리듬 앤 블루스, 로큰롤 같은 음악들은 흑인의 것이라는 이유로, 과격하다는 이유로 온전히 수용되지 못하고 여과장치를 거쳐 절충적인 형태로 전파되었다. 로큰롤 음악들은 섀도스(Shadows) 같은 밴드에 의해 인스트루멘틀로 필터링되어 영국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 하지만 1962년 비틀즈가 첫 레코드 'Love Me Do'를 발표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다. 이제 영국인들(그리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비틀즈와 로큰롤 광기에 빠지게 된다.
비틀즈 열풍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들의 데뷔앨범 [Please Please Me]는 1963년 영국에서 6달 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했다. 미국을 처음 공략한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는 1964년 초 발매 2주만에 미국에서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다. 특히 미국에서는 1964년 1/4분기 팝 시장 총 앨범 판매량의 60퍼센트를 비틀즈의 앨범이 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4년 2월엔 미국 JFK 공항에 도착하는 비틀즈의 모습과 그들이 맞이하는 (동원된) 열성 팬들의 모습이 이 전세계에 방영되면서 비틀즈는 향후 10년 사이에 가장 순식간에 널리 광고된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들의 출발은 다른 록 밴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척 베리와 버디 홀리, 리틀 리처드의 로큰롤 패턴 그리고 흑인 두웝 그룹들과 에벌리 브라더스, 비치 보이스의 화음을 모범으로 삼았다. 비틀즈는 그러나 거기에 훨씬 더 강력하고 밝고 활기찬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들은 대부분 적당히 빠른 4/4박자 템포를 사용했다. 로큰롤 특유의 2번째와 4번째 비트에 강세를 주면서도 리듬과 비트를 좀더 거칠게 몰아갔다. 'I Want To Hold Your Hand'만 보더라도 달콤하고 나긋나긋하기만 하던 당시의 곡들과는 확연히 구별됐다.
또한 리듬 기타(존 레논), 베이스(폴 매카트니), 리드 기타(조지 해리슨), 드럼(링고 스타) 등 4개의 악기가 완벽한 앙상블을 이뤘다. 비틀즈가 처음부터 정립했던 이러한 완전한 록 밴드 형식은 당시 한 명의 가수가 다수의 백밴드를 동원하던 기존의 상하부체계(엘비스 프레슬리나 버디 홀리, 빌 헤일리 등이 모두 그랬다)와는 전혀 다른 멤버 전원이 동등한 위치에서 연주하는 평등 체계였다. 그래서 비틀즈는 각 파트에서 그 어떤 밴드들보다 균형 있는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었다.
곡도 단순 명료했다. 노래 패턴은 12마디 블루스 곡들이라기보단 AABA나 ABAB 등 아주 평범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가사는 솔직하고 직접적이었다. 그 주제는 옛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이었지만 구세대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하자면 '날 사랑해 줘', '추신 널 사랑해', '너의 손을 잡고 싶어' 같은 제목에서 보듯, 그들의 솔직함은 기성 세대들의 '엄숙주의'를 무너뜨리고 성역으로 여겨지던 언어의 형식을 파괴했다. 따라서 십대들은 그들의 직접적인 언어에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코드 역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비틀즈는 그 단순한 코드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부분들을 이끌어냈다. 여기에 더해진 게 멤버들의 화음과 코러스였다. 보컬 솔로가 이끌어나가고 그 뒤에 멋진 하모니를 동반한 백 보컬과 코러스가 등장한다. 멤버들의 완벽한 조화가 비틀즈의 특장점이었다. 그들의 귀엽고 발랄한 모습과 행복해 보이는 텍스트들은 10대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 세대들까지도 로큰롤 그룹을 껴안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스스로 가사와 곡조를 만들 줄 알았다. 그들의 자작곡 능력이 동시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월등했기 때문에 그 같은 성공을 가능케 했다.
British Invasion
비틀즈의 성공에 힘입어 여러 영국 밴드들이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른바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 시작된 것. 그 중 선봉은 단연 롤링 스톤즈와 머시 비트(Mersey Beat: '머시'는 리버풀에 흐르는 강) 그룹들. 비틀즈의 고향인 리버풀 출신이었던 이들은 실제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주도하에 미국에 진출했다. 제리 앤 더 피스 메이커(Gerry & The Pacemakers), 피터 앤 고든(Peter & Gordon), 여성 가수 실라 블랙(Cilla Black) 등이 바로 엡스타인 사단의 뮤지션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 피터 앤 고든의 넘버원 히트곡 'World Without Love'은 폴 매카트니의 작품인데, 과연 듀오의 멤버 피터 애셔는 당시 매카트니의 연인이던 제인 애셔의 오빠였다.
그밖에도 서처스(Searchers), 스윙잉 블루 진스(Swinging Blue Jeans), 홀리스(Hollies), 허먼스 허미츠(Herman's Hermits), 데이브 클락 파이브 등의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서 록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국내 영화 [태양은 없다]에 쓰인 'Love Portion No.9'으로 낯익은 서처스는 곧 미국에서 막 태동할 포크 록과도 비슷한 기타 사운드를 들려줬다. 'Needles & Pins' 같은 곡이 그러한 예. 스윙잉 블루 진스는 'Hippy Hippy Shake', 홀리스는 'Bus Stop',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한편 버디 홀리의 추종자들이었던 그룹 홀리스의 그래함 내시(Graham Nash)는 나중 포크 록 그룹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의 멤버가 된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그룹들, 특히 머시 비트 그룹들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미국의 포크 록에 영향을 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틀즈, 홀리스, 서처스 등 머시 비트 계열의 청명한 기타 리프는 밥 딜런을 비롯한 여러 포크 록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으며, 또한 매우 서정적인 멜로디로 서구 팝 음악계에 음악적 낭만성을 제공했다.
자료 출처 : 라디오 3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