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어다고 하더라도, 롯시니 아류의 역할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들 것이다.

그러한 인물로는 롯시니의 그늘에 숨어 있었던 카라파(1787-1872), 영국에 자리잡은 미켈레 코스타 Michele Costa(1808-84), 새로운 음악을 만들려고 애쓴 카를로 코차(1782-1873), 또 벨리니의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와 오랫동안 겨룬 줄리에타와 로메오 Giulietta e Romeo(1825)를 쓴 니콜라 바카이 Nicola Vaccai가 있다.

 

조반니 파치니(1796-1867)도 롯시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지만 꽤 새로운 어법을 썼다. 그러나 시류에 뒤떨어진 주제에 머물러 있었다(<베스타의 무녀 La Vestale>(1823) <사포 Saffo>(1840), <메데아 Medea>(1843)). 이에 반하여 사베리오 메르카단테(1795-1870)는 새시대에 보다 적합한 주제를 다루어 강한 개성을 나타냈다. 그의 빅토르 위고에 바탕을 둔 <맹세>(1837), 추방자의 테마를 다룬 <무뢰한 Il Bravo>(1839), 그리고 <섭정>(1843) 등은 빈첸초 벨리니(1801-35)나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의 귀족적인 낭만주의 작품보다 더욱 뚜렷하게 베르디를 예고하고 있다.



벨리니와 도니제티는 1830년 이전에 가혹한 운명에 쫓기는 선배들에 대하여 그들이 어떠한 어법을 써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있었다.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1835년에 죽은 벨리니는 레오파르디의 절망적인 시정의 세계와 쇼팽적인 음 우주의 이상적인 평형을 실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낭만주의자였으며 제1음부터 독특했던 그는 당연히 각 막의 구성을 연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일종의 주문적인 노래를 추구했다(<노르마와 몽유병의 여자>(1831)). 이 주문은 라이트모티브의 사용으로 강화되었고 또 그 리듬에서의 완전한 자유는 카치니나 몬테베르디의 낡은 창법인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무관심하게 부르는 창법)를 연상케 하며 쇼팽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화성을 순화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인 벨리니는 롯시니보다도 고음을 주체로 한 그 노래에 감정적인 메시지의 본질을 맡겼다.



도니제티는 그의 세미세리아의 마지막 걸작인 <사랑의 묘약>(1832)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롯시니의 영향을 받았고 또 <안나 볼레나>(1830)에서 보듯이 자주 벨리니를 표절해 왔다. 그 뒤 위고에 의한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833)에서 개성을 뚜렷하게 내보인 뒤에 그는 지금까지의 벨 칸토와 직접적인 노래의 형식 사이의 균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격을 뚜렷이 구별하고 테너와 천한 바리톤의 대립에서 목소리의 기본이 되는 일종의 마니교적 이원론을 세웠다. 19세기 유럽의 오페라는 이 대립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나 <돈 파스콸레>(1843)를 가지고 도니제티가 낡은 오페라 부파의 불가능한 부활을 시도했을 때, 이미 시대는 선인들의 귀족적인 예술에 완전히 평민적인 힘을 대립시키려고 하는 베르디의 강한 개성을 토대로 한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단골이었던 라스트렐리 Rastrelli, 마를리아니 Marliani, 고르디지아니 Gordigiani, 라우로 로시 Lauro Rossi, 페르시아니 Persiani, 피에트로 안토니오 코폴라 Pietro Antonio Coppola, 살다리 Saldari, 니니 Nini, 스페란차 Speranza, 부치 Buzzi, 카뇨니 Cagnoni, 포로니 Foroni, 라이몬디 Raimondi 등을 어렵지 않게 압도한 주제페 베르디(1813-1901)는 시구의 질보다는 강렬한 상황을 존중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거칠게 다루고 역사적인 드라마에서는 오스트리아와의 싸움에 관한 암시를 거의 노골적인 형태로 사용했고(<나부코>(1842), <아틸라>(1846)), 위고(<에르나니>, <리골레토.)나 실러(<군도>, <루이자 밀러>, 그 뒤 1867년에 <돈 카를로스>), 그리고 1847년에는 이미 셰익스피어(<맥베드>)를 원용했다. 

구성보다는 효과에 마음을 썼던 베르디는 여러 장면이나 아리아를 솜씨있게 이어 맞추는 것으로 만족했고, 형식을 상황에 맞게 처리한다. 1850년 이후에는 정치적인 것은 그만두고 사회적 혹은 인간적인 작품을 보여주었으며(<리골레토>(1851), <라 트라비아타>(1853)), 특히 <시몬 보카네그라>, <가면무도회>(1859), 그리고 <돈 카를로스>에서 우정이나 권력의 고독 같은 새로운 테마에 도전했다. 이들 3개의 오페라는 서법면에서도 새로운 탐구의 자취를 보여주고 노래가 이미 드라마의 존재 이유가 아니게 된 연극에 있어서 깊은 인간 심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대규모의 중창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느끼자 <아이다>(1871)를 써서 연소한 라이벌들을 손쉽게 물리쳤다. 이 작품에서는 화려한 장면과 노래를 위하여 이야기의 줄거리가 희생이 된 면이 없지 않다. 


이어 80세가 가까워진 그는 젊은 스카필랴투라의 배신자 보이토의 잘 다듬어져 있으나 별로 기능적이 아닌 대본에 따라 다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루었다. 서정적인 드라마 <오텔로>(1887)와 비아냥의 희극 <팔스타프>(1893)가 그것인데, 이들은 어느 것이나 신흥계급의 동경과는 무관한 고고한 걸작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반세기 동안이나 베르디가 잡고 있던 이 최고의 권리 때문에 페데리코 Federico 및 루이지 리치 Luigi Ricci의 뛰어난 희극 <크리스피노와 대모 Crispino e la comare>(1850)의 그림자가 희미해져 버렸다.

 

게다가 요네 Jone(1858)와 만초니에 의한 <약혼자들 Promessi sposi>(1869)을 쓴 에리코 페트렐라 Errico Petrella(1813-77), <뤼 블라스 Ruy Blas>(1869)에 의해서 한때 명성을 떨친 필리포 마르케티 Filippo Marchetti(1831-1902) 같은,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탄력성 있는 재능의 소유자들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얼마가 지나서야 보이토나 폰키엘리, 카탈라니 등에 의해서 참다운 베르디 이후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음악의 베리스모(진실주의)가 꽃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