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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파와 그리그 민족음악의 특징

오작교 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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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파와 그리그 민족음악의 특징

 

19세기 낭만주의와 국민악파

 

   후기 낭만주의 음악이 한창 융성하던 19세기 후반은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의 기치가 가득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러시아를 필두로 체코,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의 여러 국가들에서는 음악가들이 각기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대대적인 운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악파라고 불리는 것이다.

 

  국민악파는 민요와 춤곡 등 민족적인 소재를 음악에 채택하여, 민족주의적 음악 이념과 양식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음악가가 자신의 조국과 음악가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자국의 민요 가사나 전통적인 문학 작품, 전설, 역사, 자연 풍광, 국민들의 생활을 어떻게 하면 작품의 표제나 내용, 형식, 구성 기법과 잘 융화시키거나 조화시켜 예술 창작활동을 해나가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물론 19세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강력한 국가의 지배를 받아오던 나라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만연하고 그 독립운동 가운데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대두되었던 것이 바로 국민악파였던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국민주의가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저지하려던 제정의 탄압에 대항하는 운동형식으로 나타났다. 글린카를 필두로 발라키레프, 쿠이, 무소르크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보로딘을 멤버로 하는 이른바 5인조 음악가는 이른바 러시아 국민주의의 기치를 들고 나섰다. 또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보헤미아는 스메타나가 민족적인 소재를 가지고 오페라와 교향시를 작곡함으로써 국민악파의 기반을 다져나갔고, 그 뒤에 나온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의 정신을 계승해 민족적 색채가 짙은 교향악과 실내악곡 등을 많이 작곡함으로써 정점에 이른 국민음악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가, 스페인에서는 알베니스나 파야가

모두 민족주의 혹은 국민주의를 표방한 음악활동을 했었고, 그밖에도, 거목 음악가가 부족하거나 음악가 이름이 덜 알려지긴 했지만, 헝가리, 덴마크, 폴란드에서도 각기 그 나라의 주도적인 음악가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헌신했다 

 

노르웨이의 민족음악과 그리그

 

   지배의 반동으로 일어난 국민악파 음악운동은 입장이나 배경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노르웨이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곳 풍광만큼이나 아주 독특한 역사를 지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땅 노르웨이는 유럽에서 가장 긴 나라다. 3~4월이 지나면 한밤중에도 태양이 환하게 떠있는 백야의 나라, 거대한 빙하가 침식돼 이뤄진 깊은 피오르드 협곡, 그리고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바다가 인상적인 나라, 해안에 바이킹의 전설을 잠재우고 있는 나라. 지리상의 여건으로 부락을 이뤄 모여 살지 못하고, 피오르드 골짜기 산허리에 뿔뿔이 흩어져 농가를 이루며 살았던 나라. 그곳이 그리그의 조국 노르웨이의 모습이다. 19세기의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시절, 그 독특한 노르웨이 땅에서도 자국민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어느 국가 못지않게 국민적 여망으로 부상했다.


   주지하듯이 노르웨이는 1380년부터 1814년까지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고, 1814년부터 1905년 독립할 때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는, 즉 덴마크 왕의 통치를 받다가 바로 스웨덴과 통합되어버리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던 나라다.

 

  스웨덴과 통합된 1814, 그 시기부터 노르웨이에서는 많은 애국적인 노래들이 만들어 불려졌고, 예술 음악 작곡가들은 노르웨이 민속음악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그리그 이전의 민족주의 작곡가들은, 우리에게는 대부분 대단히 낯선 인물들이지만, 그리그가 탄생하기 전부터 이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음악을 노르웨이 땅에 많이 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런 역사적 흐름에 1843년에 태어나 1907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리그의 생몰연대를 얹어 보면, 그리그는 거의 온전하게 스웨덴 지배 하의 노르웨이에서 살았고, 노르웨이에서 민족의식이 가득했던 시절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런 기운을 느끼며 실천하며 살았던 음악가였던 것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독립국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리그한테는 민족의식을 드높일 수 있는 노르웨이인의 정서가 항상 자신의 특별한 소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그의 초기 민족의식과 동지들

 

   그리그는 20대 초반이 되자 조국의 정체성 회복에 보다 중요한 관심을 보이고 음악가로서의 굳은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학업을 마치고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독일음악을 극복하는 동시에, 노르웨이에서도 독일처럼 위대한 음악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소망 섞인 의지를 다듬고 있었다.

 

  그 시절 그리그 앞에 리카르드 노르드라크(Rikard Nordraak)라는 친구가 나타났다. 노르드라크는 그리그보다 한 해 먼저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서 태어난 음악가였다. 그리그는 노르드라크와 함께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을 집중 연주하기 위한 오이테르페(Euterpe)’협회를 결성했고, 그 단체를 통해 노르웨이 음악가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무던 경주했다.

 

  노르드라크는 노르웨이 국가인 ,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합니다(Ja, vi elsker dette landet)’를 썼던(1864)사람. 노르웨이의 안익태인 셈이니 노르웨이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그는 당시 이 피 끓는 애국심을 가진 음악가 친구와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를 집중 여행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노르드라크가 1866년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열의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가 노르드라크한테서 받은 영향은 결코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다. 노르드라크를 만남으로써 그리그는 온화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멘델스존의 음악을 멀리하게 되고, 대신 힘차고 장려한 남성적인 음악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통해 노르웨이 땅의 웅혼한 기백이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즈음에 그리그는 그의 명성을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노르웨이의 저명한 극작가 입센이었다. 당대 사람의 시각이나 후세인들의 판단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관계가 그리 돈독하지 못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입센과의 공동작업에서 그리그가 얻은 행운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오늘날 그의 대표곡처럼 되어 버린 <페르 귄트> 모음곡의 유명세는 입센이 없었다면 애초에 얻을 수 없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리그는 입센의 극을 연구하며 여러 가지 기법을 차용해 음악을 쓰는 등 입센의 안목을 통해 자신의 놀라운 음악적 발전을 보기도 했었다.

 

  입센의 희곡은 노르웨이의 민요 채집 과정에서 얻은 전설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것으로, 노르웨이의 파우스트라고 불렸을 정도로 극적인 내용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그의 명성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당시 그리그와 함께 크리스티아니아 음악협회를 조직하고 활동했고, 노르웨이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또 있는데, 그가 바로 요한 스벤센(Johan Svendsen)이다. 스벤센은 그리그보다 3년 정도 위였지만 시와 음악의 완벽한 조화라고 그리그의 가곡을 격찬하면서 그리그와 좋은 친구가 되어 노르웨이 음악 부흥에 힘썼던 대작곡가였다. 그리그와 민족주의 음악활동을 전개했던 그의 공로도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독일 음악과의 친화력

 

   그리그 음악의 정체성을 얘기하면서 쉽게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은 그의 독일적 배경이나 독일음악과의 친화력이다. 그리그는 음악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독일에서 시작했다. 그가 독일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리그 가족과 가까운 음악가로 올레 불(Ole Bull)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다.

 

  그는 어린 그리그가 평소 깊이 존경하던 인물이었는데, 그리그의 진로는 사실상 그에 의해 급전환, 결정되었다. 어느 아름다운 여름 저녁 그리그 가족의 식사에 초대된 올레 불은 그리그가 자신이 썼다고 건네준 습작을 훑어보고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라이프치히로 가야한다. 그리고 음악가가 되어라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그리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친숙해 있었고, 당시 몇몇 습작을 쓰기도 했었지만, 그리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을 음악가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시절 그리그의 장래희망은 성직자였다.

 

  하지만 이미 그리그의 재능을 깊이 통찰한 올레의 권고는 매우 적극적이었고, 곧 그리그는 올레의 추천을 받아 4년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게 되었다. 음악원에서 그리그를 가르쳤던 선생은 유명한 카를 라이네케 등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리그는 견고한 독일식의 음악이론과 작곡법 그리고 피아노 연주법을 배웠다. 독일 음악원에서 받은 그리그의 음악교육은 훗날 그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그를 초창기부터 매료시켰던 음악은 초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이었다. 그리그가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멘델스존이나 슈만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특히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낭만주의 진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그는 자연적으로 그들 독일 음악의 영향을 깊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그는 특히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을 좋아했고 자신의 창작물에서 그 기호를 실현해 보였는데, 가령 Op.5로 등재되어 있는 마음의 멜로디는 그가 경력 초기에 얼마나 슈만에 매혹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에 속한다.


   초기 창작물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그는 실제로 독일을 아주 가깝게 느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파르지팔>이나 <> 공연을 보러 바이로이트에 갔었는가 하면, 바이마르,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마이닝엔, 브레슬라우, 쾰른, 카를스루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등 독일의 중요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긴 콘서트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또,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브람스의 최 만년에 그와 긴밀한 우정을 나눴었고, 브람스한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만나기는 1878년과 1879년 사이이지만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그 유명한 붉은 고슴도치레스토랑에서 서로의 작품에 대해 많은 의견을 교환했었다.

 

  브람스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찾아와 브람스한테 교향곡 5번을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사람이 바로 그리그였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지만, 실제로 그리그의 음악에는 독일 음악적인 요소가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었고 그리그는 작품을 쓰면서 끊임없이 독일 작품을 의식했다. 엄청난 높이의 성곽처럼 보였던 독일 음악은 그리그의 생애 전반을 지배했던 것이다.

 

민족의식 고취한 그리그의 음악들

 

   하지만 그리그는 독일 음악의 기초 위에서 독일 음악의 영향을 끝없이 받았지만, 또한 그것을 온전히 극복한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리그의 작품은, 특히 그의 민족의식을 얘기할 때, 대규모의 관현악 작품과 피아노 곡, 그리고 가곡들이 매우 중요하다. 흔히 우리는 그리그의 중요한 작품으로 <페르 귄트><피아노 협주곡>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작품들의 유명세 때문에 오히려 그리그의 본령이나 중요한 능력이 잘못 인식되어진 감도 있다.

 

  그리그는 무엇보다도 대단히 뛰어난 가곡 작곡가였다. 우리는 <페르귄트><피아노 협주곡>에서의 그 탁월한 묘사능력에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그 스스로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솜씨나 능력에 대해서 그리 자신만만해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피아노곡이나 가곡 같은 소규모 작품들에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 그리그였다.

 

  브람스가 특별히 그리그의 음악을 칭찬했던 부분도 사실은 그런 단순하고 독특한 민요나 춤곡 양식 작품들이었다. 그리그의 많은 피아노 작품들은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그 중요성에서 그의 가곡들에 필적할 만하다. 유명하고 그리그의 가장 중요한 피아노 작품에 속하는 발라드는 린데만 선집의 민요 북구의 농민에 의한 변주곡 세트이고, 그리그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 작품인 서정 소품전통적인 형식의 주옥같은 결정체다. 노르웨이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작품들인 것이다.

 

  또 그리그는 단순한 유절 형식의 가곡들을 많이 작곡했는데, 심오한 깊이의 사색이나 정서를 보여주는 것에서부터 유머감각이 넘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표현의 영역이 넓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아주 섬세한 감성을 타고 난 그리그는 시의 텍스트의 내용을 정교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세련된 음향으로 부조하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물론 그가 주로 다룬 텍스트는 노르웨이 전통 시였다. 북구 노르웨이는 풍부한 민요의 유산이 있는 땅이었는데, 그리그는 그 풍요로운 유산을 가지고 간결하지만 매혹적인 음악을 많이 만들어,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를 통틀어 예술가곡 분야의 가장 중요한 완성자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그리그의 관현악은 좀 달랐다. 피아노곡이나 가곡에서는 섬세한 서정이 그 본질을 이루고 있지만, 그의 관현악은 강렬한 색채와 리듬을 기초로 웅장하고 강렬한 북구의 기상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마치 핀란드의 시벨리우스처럼 그의 관현악은 기세등등한 박력으로 꿈틀거린다. 섬세한 서정의 피아노 소품이나 가곡과는 정 반대의 모습이기도 한데,

혹자는 그런 그리그의 작법이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그 독특한 역사, 정치적 상황에서 힘찬 기치를 내걸고 창작활동을 했던 그리그의 음악은 분명한 의의와 강점을 지니고 있다. 주변국가에 지배되고 통합된 긴 역사를 가진 노르웨이가 그리그의 작품을 통해 상당한 정도로 그 정체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자연 풍광과 독특한 노르웨이인의 정서가 깊이 아로새겨진 피아노 음악이나 가곡작품, 그리고 웅혼한 북구의 정신이 깃든 관현악곡들은 노르웨이 국민들에게 커다란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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