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inoni, Adagio in g minor

Franz Liszt Chamber Orchestra

Basilica of the Pannonhalma Archabbey, Hungary

1984 Teldec Classics

우리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알비노니의 아다지오’라고도 함)라고 알고 있는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는 ‘슬픈 아다지오’ 곡으로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와 늘 함께 꼽힌다. 하지만 이 곡이 지니는 슬픔은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의 슬픔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가 애잔한 슬픔을 준다면 베버의 아다지오는 비장한 슬픔을 준다고 할까.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1)는 바로크 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베네치아 출신의 작곡가이다. 같은 고향 출신인 비발디보다 일곱 살 위인데 음악을 직업으로 삼은 비발디와는 달리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을 취미 삼아 하는 사람) 작곡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알비노니는 평생 50여 곡의 오페라와 40여 곡의 칸타타, 64곡의 협주곡과 8곡의 신포니아, 97곡의 소나타 등을 작곡했다. 알비노니는 당대엔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오늘날엔 오보에 협주곡 D단조 등 기악곡 작곡가로 알아주고 있다. 알비노니가 유명하게 된 것은 ‘아다지오 G단조’ 덕분이다. 그런데 유명세를 탄 게 이제 겨우 60여 년밖에 안 된다. 이러한 사정에는 ‘아다지오 G단조’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그리고 감동적인 실화가 엮여 있다.

알비노니가 작곡하지 않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

우선 사실을 밝히자. ‘아다지오 G단조’는 알비노니의 작품이 아니다. 엥? 그럼 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 또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라고 부르고 연주 목록이나 음반 재킷에도 버젓이 그렇게 적혀 있단 말인가? 여기에는 의도되지 않은 오해가 숨겨져 있다.

▶토마소 알비노니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레모 자초토(Remo Giazotto, 1910-1998))는 알비노니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음악학자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1945년 여름, 그는 연합군의 융단폭격으로 폐허가 된 독일 드레스덴 시의 도서관을 찾았다. 뒤죽박죽이 된 서가를 뒤지던 자초토의 눈이 어느 순간 번쩍 떠졌다. “오, 이건?” 그 종이는 단 몇 마디의 선율과 화음 표시가 적힌 악보였다. 자신이 그동안 연구해 오던 알비노니의 작곡 스타일과 딱 들어맞았기에 놀랐던 것이다.

자초토는 이 악보가 1738년경 작곡되었다고 그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던 알비노니의 교회 소나타 Op.4의 일부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작은 부분만으로 소나타 전체를 복원할 수는 없었다. 자초토는 아예 이 짧은 선율을 바탕으로 알비노니에게 바치는 ‘새로운 작품’을 쓰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해서 ‘알비노니의 단편(斷片)에 의한 현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가 작곡됐다. (자초토는 생전에 알비노니의 단편 악보는 없었으며 ‘아다지오 G단조’는 순전히 자신의 창작임을 뒤늦게 밝혔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알비노니가 아닌 자초토의 작품이다. 비록 현악과 오르간을 위한 바로크식 악기 편성으로 쓰였지만, 애절하고 우울한 선율부터가 지극히 후기낭만적인 이 작품을 바로크 시대를 살아간 알비노니가 듣는다면 의아하게 여겼을 터이다. 한 술 더 떠 이 작품이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알비노니는 기절초풍하고 말 것이다.

자초토가 사기를 치려던 의도는 아니었다고 본다. 자초토는 1958년에 이 곡을 발표하면서 “알비노니의 원래 악보에는 통주저음 표시밖에 없었고, '아다지오 G단조'의 작곡자는 바로 나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악보 어디에도 ‘알비노니 작곡’이라고 명기하지 않았다. 또 그는 이 곡을 자신의 판권으로 등록하였다. 그래서 알비노니의 무료 악보 사이트를 뒤져봐야 이 곡은 찾을 수 없다. 바로크와 낭만주의 양식도 구분하지 못했던 음악 저널리즘과 방송이 이 ‘심금을 울리는’ 작품에 알비노니의 이름을 달아 퍼뜨렸을 뿐이다. 자초토의 말을 정확하게 반영하면 ‘자초토의 알비노니 주제에 의한 아다지오’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기이겠다. 어쨌든 알비노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알비노니가 실제로 쓰지 않은 이 작품 덕분이다. 그리고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여전히 명곡임에는 틀림이 없다.

전화(戰火)의 참상을 달래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영화, 드라마, 광고에 수없이 많이 쓰인 이 곡에는 감동적인 실화가 있다. 보스니아 내전이 잔인한 살육으로 치닫던 1992년 5월, 사라예보 거리에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날 죽은 22명의 무고한 시민을 애도하는 첼로의 슬픈 선율….

1992년 5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몇 달째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의 위협 아래에 놓여 있었다. 도시를 둘러싼 언덕에 자리 잡고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사살하던 세르비아계 저격수들 때문에 시민들은 언덕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 지대를 찾아 식량을 구하러 다녀야 했다. 5월 27일,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한 빵가게에서 빵을 만들어 판다는 소식이 들렸고, 사람들은 빵을 사기 위해 그 가게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민들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왔다. 그 자리에서 22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참사가 벌어진 다음 날 그 거리에 한 첼리스트가 찾아왔다. 검은 연주복을 입고 큰 첼로 케이스와 연주용 의자를 들고 나타난 그는 의자를 내려놓고 첼로를 꺼냈다. 그러고는 어제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듯 느리고 장엄한 그러면서도 애절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였다.

베드란 스마일로비치(Vedran Smailović, 1958~ )라는 이 첼리스트는 전쟁 전까지 사라예보 필하모닉의 첼로 주자였다. 전쟁과 함께 음악 활동을 못하게 된 스마일로비치는 사라예보의 다른 시민들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2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빵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참사 소식을 들은 그는 전쟁의 비극과 평화에 대한 희망을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가 생각해낸 것은 22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추모하며 22일 동안 첼로를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포탄이 떨어져 잔해만 남은 비극의 현장에서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하는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이로비치의 모습.

언제 포탄이 또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고 표적을 찾아 헤매는 저격수들의 총구 앞에서 그는 매일 같이 22일 동안 그 자리에 나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저격수들과 포탄의 위협을 피해 근처 건물 아래에 몸을 숨긴 채 그의 연주를 들으며 슬픔을 달랬고 평화를 꿈꾸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스마일로비치는 1993년 사라예보를 떠나 북아일랜드로 옮겨 갈 때까지 사라예보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전 세계에 인류애를 불러일으켰다.

베트남전을 반대한 가수로 유명한 조안 바에즈는 스마일로비치의 행동에 용기를 얻어 내전 중인 1993년 사라예보를 방문하고 시민들을 위로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영국의 작곡가 데이비드 와일드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 첼로곡을 작곡해 전쟁의 비극을 알리고 평화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1994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국제 첼로 페스티벌에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첼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요요 마가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당시 연주 현장에 있었던 피아니스트 폴 설리반은 연주 광경을 이렇게 전했다.

조용히,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 음악은 시작되었고 웅성거리던 연주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음악은 죽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불길한 메아리로 가득한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만들어냈다. 음악은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고뇌하고 고함치며 격렬한 열정으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았고, 마침내 죽음 직전의 공허한 마지막 한숨으로 변해 갔다. 그러고는 다시 시작했던 그 순간처럼 고요함으로 돌아갔다. 연주를 마치고도 요요 마는 여전히 첼로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활을 든 그의 손도 여전히 첼로에 놓여 있었다. 연주장에 있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오랫동안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소름끼치는 학살을 직접 목격한 듯 그렇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연주장에서 요요 마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나 관객석을 바라보면서 손을 뻗었다. 관객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요요 마의 손길을 따라 모든 눈길이 모였고, 그 손길이 부르는 사람이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바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청중들은 표현할 길 없는 충격을 받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스마일로비치는 요요 마가 있던 무대 쪽으로 걸어갔고 무대에서 내려온 요요 마는 통로로 내려가 두 팔을 벌려 스마일로비치를 껴안았다.

공연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모두 일어났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며 귀가 먹먹할 정도로 환호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러한 감동의 한가운데에는 눈물을 흘리며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부드럽고 세련된 클래식 음악의 왕자로서 빈틈없는 연주와 외모를 보여주었던 요요 마가 있었고, 그의 앞에는 사라예보에서 금방 빠져나와 여전히 얼룩투성이의 낡고 주름 진 가죽점퍼를 입은 스마일로비치가 있었다. 그토록 많은 눈물에 젖고 고통과 상처에 지쳐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빗지 않은 긴 머리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1993년에 사라예보를 떠난 스마일로비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제적인 관심을 뒤로 한 채 북아일랜드의 조용한 시골에 묻혀 음악을 작곡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