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jpg카를 오르프, Carl Orff (10 July 1895 – 29 March 1982)

20세기 독일의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가.

카를 오르프는 1895년 7월 10일, 뮌헨의 군인가정에서 태어났다.
다섯살때부터 피아노를 비롯해 오르간, 첼로교육을 받았으나 본인은 작곡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10살때는 어린이 잡지에 자연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기도 했고 피아노, 바이올린이 포함된 인형극을 가족들을 위해 작곡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작곡에 뛰어들었는데 체계적인 화음법, 작곡법을 공부하지않고 교사의 도움없이 오직 어머니의 도움으로 작곡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때 그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1911/12년에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철학소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를 성악곡으로 만들기도 했다.

 

1914년 뮌헨음악학교(현 뮌헨 국립음악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중,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대에 징집된 오르프는 전선에서 여러번 부상을 입었다.

제대 후 뮌헨에 돌아와 다시 본업인 음악에 열중했다.

1921년 하인리히 카민스키(Heinrich Kaminski, 1886-1946)에게 사사하였고, 그 영향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음악에 흥미를 가졌다.

졸업후에는 뮌헨, 만하임, 다름슈타트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다.

1924년 무용가 도로시 귄터(Dorothee Günther, 896-1975)와 만나 음악 교육학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귄터 학교를 설립하고 음악 교육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오르프는 무용과 음악의 조화를 통한 음악 교육을 창안하였고, 이를 위하여 카를 맨들러(Karl Maendler, 1872-1958)의 도움을 받아 '오르프 악기'를 만들어낸다.
이후 이를 위한 교육용 악곡들을 작곡하였고, 오르프 악기를 사용하는 학생 합주단을 이끌고 전국 순회 공연을 하는 등 음악 교육의 보급을 위해 힘썼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음악교육용의 독특한 작품 <슐베르크, Schulwerk>를 출판하고, 1937년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카르미나부라나, Carmina Burana>를 작곡하여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특히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리스 연극과 중세 신비극의 영향을 받은 다른 작품들이 뒤이어 등장했다.
1943년 <카툴리 카르미나, Catulli carmina>를 발표하고 이후 <안티고네, Antigone>, <아프로디테의 승리, Trionfo di Afrodite> 등 그리스 비극을 제재로 한 많은 작품을 썼다.

그중 <카툴루스의 노래>(1943), <아프로디테의 승리>(1953)가 대표적이며, 이들은 <카르미나 부라나>와 더불어 3대 비극을 이룬다.

 

한편, 카를 오르프에게는 나치 부역 의혹이 꾸준히 뒤따르고 있는데, 문제는 2차대전 시기에 있다.

카를 오르프는 나치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열성적인 지지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카를 오르프는 '백장미'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걸 밀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참여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르프의 스타일은 나치의 입장에서 보면 나치즘 치하의 독일에 딱 맞았고, 나치 독일이 그의 음악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선전에 이용하였다.

그 결과 오르프 자신도 큰 이득을 보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음악가로서 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이후 오르프에게는 나치 부역 문제가 끈질기게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르프도 자신이 나치전범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나치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대표적인 것이 위에 언급한 '백장미'의 창설멤버라고 주장한 것이데, 이는 모든 자료들에 있어서 오르프 자신에 의해서 부인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2차대전 이후인 1954년에 결혼한 세번째 부인이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인데, 루이제 린저 역시 사소한 수준의 나치 부역 흔적과 함께 자신이 반 나치주의자였다는 상당한 거짓증언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뒤, 오르프의 교육용 악곡이 연주된 녹음자료가 발굴되어 방송되는 등 다시 음악 교육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이후 음악 교육과 작품 활동에 매진하였다.
특히 오르프는 어린이에 초점을 맞춘 음악 교육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기초 음악(Elementary Music)이라 명명하고 그에 따른 연습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부활절 칸타타 <그리스도 부활의 희극, Comoedia de Christi Resurrectione>(1956), <폭군 오이디푸스, Oedipus der Tyrann>(1958),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1968), 성탄 연극 <아기의 탄생을 찬양하는 기적극, Ludus de nato infante mirificus>(1960)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82년 3월 29일, 카를 오르프는 뮌헨에서 86세를 일기로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4번 결혼하였는데, 1920년 알리스 솔셔(Alice Solscher, 1891-1970)와 결혼하여 1925년 이혼하였고, 딸 고델라(Godela, 1921–2013)를 얻었다.

1939년 오르프 음악 치료의 창시자인 게르트루드 윌레르트(Gertrud Willert, 1914-2000)와 결혼하여 1953년에 이혼하였고, 1954년 작가인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와, 1960년 현재 카를 오르프 재단의 이사로 있는 리셀로테 슈미츠(Liselotte Schmitz, 1930-2012)와 4번째 결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