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르 프랑크(Cesar Franck, 1822-1890)

벨기에 리에주 출생. 처음 리에주에서 공부를 하다가 1835년 파리로 나와 파리음악원에서 피아노·오르간·대위법 등을 공부하였다. 1843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와 오르간 개인교수, 1872년 F.부노아의 후임으로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 프랑스국적을 얻었다.

당시 프랑스의 음악계에는 로시니, 마이어베어 등의 극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가벼운 오페라작품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이해를 받지 못하다가 1890년의 《현악4중주곡》으로 겨우 성공을 거두었는데 1개월 후 마차사고로 죽었다.

로마가톨릭교도로서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예술과 생활에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죽은 후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4년 ‘스콜라 칸토룸’이, 1935년에는 ‘에콜 세자르 프랑크’가 설립되었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통음악을 조화시킨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낭만주의 속에서 순수음악을 지향하고 있다.

화성에서는 대담한 전조(轉調)와 반음계를 자유로이 구사하여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였으며, 또한 소나타 ·교향곡의 각 악장을 유일한 테마로 통일하는 순환형식(循環形式)을 발전시켰다. 교육자로서도 뛰어나 V.댕디, C.보르드, E.쇼송, G.피에르네 등의 인재를 길러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루트》《지복(至福)》《속죄(贖罪)》《교향변주곡》《바이올린 소나타》《현악4중주곡》《세 중찬가(衆讚歌)》를 비롯하여 오르간곡·피아노곡·교향시·합창곡 등이 있다.

franck-opazizi.jpg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운 프랑크는 12세의 나이로 리에주 음악원을 졸업하고 연주여행을 다녔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다.

15세 되던 해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푸가, 대위법, 작곡, 오르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오르간 연주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던 그는 여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전전하다가 1858년에 성 클로틸드 교회의 합창장이 된 그는 이어 그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이 즈음 그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리스트는 프랑크를 두고 "바흐 이후 최고의 오르가니스트"라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용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프랑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망과 존경을 받았다.

1872년엔 파리 음악원의오르간 교수가 되어 루이 비에른, 가브리엘 피에르네, 에르네스트 쇼송, 앙리 뒤파르, 뱅상 댕디 등을 가르쳤으며,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의 일원으로 프랑스 작곡가들을 지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베토벤과 바그너풍의 풍부한 화음들로 가득차 있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D단조>, 피아노곡 <전주곡, 코랄과 푸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