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_Spheeris.jpgChris Spheeris

 

그 이름만으로 유추할 때 그는 왠지 날카롭고 차가운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만 같다. 하지만 정작그의 외모는 온화하고 인자한 구도자의 그것인 양, 속세의 때라고는 전혀 묻어 있지 않은 듯 순수한 빛을 내뿜고 있다.


10년쯤 전 레코드 숍에 진열된 한 인상적인 재킷의 앨범에서 처음 그의 이름과 얼굴을 보게 된 이후로 나는 그의 이름에서 어떤 신비하고도  따스한  기운을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갓 20대에 들어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이 가지는 치기어린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때 LP 커버에 있던 그의 모습이 무척 강한 인상으로 닦아왔다는 사실만이 내겐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인상 좋은 아저씨의 음악은 한 마디로  포근함이었다. 맑은 하늘 아래 걷는 좁다란 오솔길, 머리칼을 살며시 흔들어주는 바람,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간간이 저 논둑 위로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자동차,  뭉게뭉게  피어나는 솜구름....

크리스  스피어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 기타리스트의 음악에 대해, 적어도 난 이렇게 그려낼 수 있다. 그의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 뚜렷한 영상을 마음 속에 그릴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그의 음악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듣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그 사운드에 동화될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크리스 스피어리스라는 이름은 기타리스트로서의 모습으로 각인 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모든 악기를 연주하는 멀티 플레이어이다. 심지어는 멋진 보컬 실력까지 갖추고   있다(그의   목소리는   카세트로만  발매되었던  작품  'Concert Songs('92)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언뜻 일관되게만 보이는 그의 음악 여정에  포함되는 놀라운 다양성은 그가 경험했던 풍부한 문학적 바탕과 내면의 감정들을 충실히 표출해낼 수 있도록 밑받침이 되는 음악 실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국의 태양과 같은 열정과 따사로움, 고요한 명상적 울림과 종교적  경건함, 무지게 빛 신비로움 등등, 그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들은  어느 뛰어난 아티스트들의 그것 못지 않게 나열된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애수(愛愁)'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하나 하나의 선율에서 알 수 없는 아련한 슬픔이 배어 있다. 그것이 설사 현실과는 거리가 먼 멜로 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눈물과 같은 것일지라도, 그 음악들이 몸뚱이에 부딪히고 순간의 감성을 살며시 애무할  때의 느낌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은 카타르시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울려 나와 한없이 펼쳐지는 음들은 그래서 감미로운 슬픔이다. "제 삶은 매우 내면적이라 할 수 있어요. 한때 전기 쓰기를 거부했던  건 그것 때문이었죠. 저의 개인적 삶은 고요하고 또 단순합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는 그가 명상과 사색을 즐기면서 영적인 교감으로서의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사는 곳도 도시에서 동떨어진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주의  그림  같은 사막이다. 놀랍게도 그의 재능은 음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예술적 영역은 작곡과 연주는 물로 詩, 사진, 그래픽 디자인, 그림, 도자기와 원예에 이른다. 언뜻 보면 꽤나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자신이 창조해  놓은  세계에 푹 파묻혀 세속적인 근심과 걱정 따위는 가지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본격적인 작곡은 열 다섯 살 때 자신이 쓴 시에 곡을  붙여  연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그가 크게 영향을 받았던 음악은 그리스  정교회의 예배음악과 그리스 민속음악 등인데,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그리스인의 피는 자연스레 그리스의 문화 유산에 대한 매혹이 되어 그를  손짓한 것이다.

 

또한 누이가 즐겨 연주하던 쇼팽과 드뷔시 등의 음악과 비틀즈,  반젤리스, 브라이언 이노 등 대중음악계에 큰 획을 그었던 아티스트들의 음악 역시 그에게 감흥을 주었다. 영국에서의 유학 기간 중 그는 철학을 공부했는데, 공부하는 틈틈히 조상의 나라인 그리스를 비롯한 전 유럽을  여행하며 다양한 문학적 경험을 쌓았다. 그 경험들은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 고스란히 반영이 되어 보다 신비롭고 민속적인 색채를 띤 음악의 토대를  이룬다. 귀국 후 1976년, 그는 고교 시절 아테네에서 만난 친구인 Paul Voudouris와  함께  듀오를 결성하여 포크 클럽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82년, 폴과 헤어진 그는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1985년 그에게  있어 기억될만한 해였다. 그가 홀로 연주하고 녹음, 프로듀스를 맡았던  데모 테이프가 레코드사의 담당자에게 발탁되어, 메이저 레이블인 콜럼비아사와  앨범  계약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듬해인 1986년, 그는 데뷔작 'Dreams  of the Heart'를 발표하여 그리스 민속음악에 바탕을 둔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운드로 호평을 받았다.

 

또한 국내에서도 발매되어 각종 TV, 라디오  프로의 시그널 및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등 크게 사랑 받았던 두 번째 앨범 'PathwayY to Surender('88)' 역시 그의 재능이 농축된 수작으로 평가되었다. 

 

두 번째 앨범 발표 후 그는 상업성으로 중무장한 메이저 레이블의 생리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레이블인 에센스 레코드를 설립하여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된다. 레이블 설립 이후 그는 옛 동료였던 폴 부두리를  다시  맞이하여  작업을  시작하는데,  그 결실로서 탄생된 것이 '91년 작 'Enchatment'이다. 팝적인 감수성과 민속적인 색채가 골고루 녹아들어 아름다운 사운드를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20여 개국에서 발매가 되는 등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스페인에서는 골드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약 5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이후 그는 중동을 비롯한 인도,  태국 등 각국의 문화에서 얻은 느낌들은 비탕으로 다향한 문화에 대한 감흥을  표현한 'Culture('93)' 흡사 명상음악으로 여겨질 정도로 부드러운 전자 사운드가 전편에 흐르는, 폴 부두리스와 함께 발표한 'Passage('94)', 데뷔작에  한 곡을 추가하여 새롭게 편성한 'Desires('94)', 또 다시 폴 부두리스와 듀엣을 이룬 'Europa('95)', 세계 각지의 聖所들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쓰여진,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Mystic Land>에 사용되었던 음악 모음 'Mystic Traveller('96)', 그리고 그리스의 민속음악과 스페인의 플라멩고를 도입한 'Eros('97)' 등의 솔로 앨범들을 발표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여러 장의 앨범들과 60여 편의 TV 다큐멘터리들을 통해 그가 표출한 음악들은  지극히 따스하고 아름다우며 또 신비로운 향내를 머금은 푸른 꽃의 자태와도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이 앨범은 메이저 데뷔 이후 그가 걸어온  10여  년간의  음악  여정  중 가장 뛰어난 앨범들로 꼽을 수 있는 'Culture',  'Desires'  그리고 'Eros'에 수록된 작품들에서 선곡한 베스트 앨범이다. 위의 작품들은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편안한 내면의 여행을  이루기에 충분한 감성을 전해주었기에, 그러한 앨범들에서 고른 멋진 트랙곡들의  모음집이  이 앨범이 가지는 가치는 두말한 필요가 없다.

 

듣는 이들은 앨범을 플레이어에 걸어 놓고, 그저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보거나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하거나 공상에 빠지기만 하면 된다. 그 동안  스피커에서는  마치 누군가 그림을 그려나가듯 여러 음률들이 색색이 뻗어 나온다. 물로 주된 붓 노릇을 하는 악기는 기타이다. 아쿠스틱 기타의 맑디맑은  사운드는 더할 수 없이 포근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며 듣느 이를 가장 편한한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글 : 김경진(1999.   9.   15  Crystal Dream Album Review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