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은 로큰롤이 탄생한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록 전문지 <롤링스톤>도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가 전설적인 선 레코드사에서 'That's all right'를 취입한 1954년을 기점으로 해 2004년을 50주년으로 삼고, '로큰롤의 50가지 주요 시점' 등 여러 특집을 게재한 바 있다.

 

로큰롤 50년 역사를 수놓은 인물을 50명만 고른다면 누가 될까? 아마도 보는 시점에 따라 그 면면들은 큰 편차를 보일 수도 있다. 워너홈비디오는 BBC가 제작한 <HISTORY OF ROCK AND ROLL>을 로큰롤 50주년을 맞아 DVD로 제작, 최근 출시했다. 여기 소개된 내용을 기초로 '로큰롤 50 거목'을 뽑아보았다. 각자 마음속으로 정한 인물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일이 될 것이다.

 

1. 척 베리(Chuck Berry)


1926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태생. 로큰롤의 작곡 기법과 기타 연주의 전형을 제시한 대가로 역사에 기록된다. 흑인이면서도 백인 컨트리 음악의 요소를 결합한 곡 <Maybellene>으로 로큰롤 흑백시대를 개척했다. 블루스 기타리스트 머디 워터스가 당시 일렉트릭 R&B 레코드를 출시한 소규모 체스 레코드사에 소개해 데뷔했다.


유명해졌을 때 나이 30살이었으면서도 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를 살아간 10대들의 비상 욕구와 꿈을 담은 노랫말을 써냈다. 기타를 연주하며 취한 오리걸음이 트레이드마크. 한창 때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투옥되면서 전성기를 마감했다.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72년 돌아와 <My Ding-A-Ring>으로 생애 첫 전미차트 1위에 올랐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비치 보이스 등 많은 60년대 록 밴드들에게 영감을 준 인물. 대표작은 <Johnny B. Goode> <Sweet Little Sixteen>이며 DVD의 시그널 송 <Rock And Roll Music>도 그의 작품이다.

 

2.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로큰롤의 제왕'이란 칭호가 말해주듯 초기 로큰롤 영웅이자 5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 1935년 미시시피주 투펄로에서 태어났으나 가난 때문에 흑백의 인구가 혼합된 도시 멤피스로 이주했다.


그가 54년 멤피스의 선 레코드에서 <That's All Right, Mama>를 취입한 것은 로큰롤의 시대를 연 결정적 사건이다. 이후 메이저 레코드사 RCA 빅터로 옮겨 56년에 발표한 곡 <Heartbreak Hotel>으로 엘비스현상을 야기했다.


탁월한 외모와 기성세대의 반감을 산 과격한 허리 아래의 율동으로 당대의 청춘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가스펠과 컨트리 등 흑백의 요소를 완벽하게 혼합한 탁월한 음색과 가창력이야말로 그를 슈퍼스타로 만든 원천이었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아무 것도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존 레논의 한마디는 엘비스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압축한다.


초기에는 야성의 로큰롤을 주로 불렀으나 2년의 군 생활을 마친 60년 이후에는 기성세대 취향의 발라드로 방향을 선회했고 다수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일세를 풍미했다. 67년 독일에서 만난 프리실라와 결혼했으나 6년 만인 73년 이혼.
77년 멤피스 소재의 그레이스랜드 저택에서 4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대표곡은 <Hound Dog> <Love Me Tender> <Burning Love>.

 

3. 버디 할리(Buddy Holly)


늘 검은 뿔테의 안경, 마른 체구, 평범한 인상의 소유자로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섹시하지 않아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인물. 초기 로큰롤 뮤지션 가운데 드물게 밴드 크리케츠(Crickets)와 솔로 활동을 병행했으며 곡도 직접 쓴 천재였다.
1936년 텍사스 러복에서 출생했고 인접한 멕시코의 리듬과 결합한, 이른바 텍스멕스 사운드를 로큰롤에 이식했다. 작곡 뿐 아니라 <Peggy Sue>에서 딸꾹질로 노래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로큰롤의 창의성을 인정받는다. 이 곡 외에도 <That'll Be The day> <Maybe Baby>를 크게 히트시켰다.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중인 59년 2월3일 비행기추락으로 리치 발렌스 등과 함께 사망했다. 22살 요절. 나중 72년 돈 맥클린은 50년대의 순수성을 상실한 60년대 음악을 비판한 곡 <American Pie>에서 버디 할리가 죽은 날을 '음악이 죽은 날'로 묘사했다.

 

4.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초기 로큰롤 영웅 가운데 광포함으로 치면 단연 리틀 리처드였다. 그는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무대에서 발을 피아노 위에 올리고 고래고래 목청을 높이는 파격을 일삼았다. 의미 없는 의성어를 노랫말에 심은 것도 그만의 방식이었다. 척 베리가 로큰롤 작가라면 '로큰롤 배우'라고 할 인물.


본명 리차드 웨인 페니맨으로 1932년 남부 조지아주 메이컨에서 태어났다. 51년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면서 RCA 빅터에서 첫 음반을 취입했다. 56년 <Tutti-Frutti>로 자신의 시대를 열었지만 영광은 이 곡을 리메이크한 백인 가수 팻 분에게 돌아갔다. 그는 “오늘날의 로큰롤이 단지 흑인 리듬 앤 블루스에서 이름만 바뀐 것뿐”이며 “백인들이 흑인의 로큰롤을 강타하고 그 숨결을 팔아먹었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50년대 중반 R&B에서 로큰롤로의 이동을 웅변해주는 역사적인 인물. 하지만 59년 갑자기 로큰롤과 인연을 끊고 가스펠로 전향했다. 대표작은 비틀스도 부른 <Long Tall Sally>와 <Rip It Up>, <Good Golly, Miss Molly>.

 

5. 비 비 킹(B. B. King)


명실상부한 블루스 기타의 왕자이자, 블루스와 로큰롤 역사의 산증인. U2와 에릭 클랩튼 등 후배 유명 로커들과 공연을 자주 가진 탓에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엘모어 제임스 등 동시대 블루스맨 중에서도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도 하다. 기타 줄을 들어올리는 그의 벤딩 주법과 탁월한 가창은 흑인 블루스의 한과 고통을 그대로 전달한다.

미시시피 아이타 베나에서 1925년에 라일리 비 킹을 본명으로 태어났고 46년에 멤피스로 올라왔다. 선배 흑인 기타리스트 티 본 워커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기타를 '루실'로 명명한 49년에 첫 레코드를 취입했다. 이듬해 비하리 형제가 설립한 음반사 RPM과 계약을 체결한 뒤 52년 <Three O'clock Blues>, 54년 <You Upset Me, Baby>를 히트시켰다. 51년부터 92년까지 R&B 히트 차트에 올린 곡만도 무려 75곡.


60년대 말 블루스 리바이벌 시기에 백인 뮤지션들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유명해졌고 69년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he Thrill Is Gone>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87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역시 같은 해 로큰롤 명예전당에 입적되었다.

 

6.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


컨트리 음악 성향의 로커벌리(Rockabilly)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 형제듀엣. 형 돈 에벌리(본명 아이삭 도널드 에벌리)는 1937년 켄터키주 브라우니 출생이고, 동생 필 에벌리는 1939년에 시카고에 태어났다.


가수였던 부모와 함께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컨트리의 본고장 내시빌에서 기타의 대가 쳇 애트킨스에 초청되어 55년 첫 레코딩을 했다. 2년 뒤 소규모 음반사 케이던스(Cadence)와 계약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Bye Bye Love> <All I Have To Do Is Dream> <Bird Dog> <Cathy's Crown> 등 빅 히트송이 줄을 이었다.


낭만적인 멜로디를 전하는 두 형제의 하모니가 압권. 60년대의 사이먼 앤 가펑클 등 많은 듀엣 팀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뱃속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둘 사이가 나빠 73년 해산했다고 10년이 흐른 83년 재결합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Let It Be Me> <Crying In The Rain> 등이 널리 애청되었다.

 

7. 레이 찰스(Ray Charles)


음악의 출현을 선도한 인물이다.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소울의 천재'(Genius Of Soul). 다이내믹한 59년 노래 <What'd I say>이 말해주듯 탁월한 박자감각에,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단숨에 음악계를 장악했다.


1923년 조지아 알바니 태생으로 7살 때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 가수. 본명은 레이 찰스 로빈슨이나 권투선수 슈거 레이 로빈슨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성을 빼버렸다. 흑인가수면서도 백인음악을 대폭 수용, 많은 컨트리 송과 팝 발라드를 노래해 흑백 크로스오버를 실천한 것도 그의 업적.


이를 말해주는 곡이 컨트리가수 돈 깁슨의 것을 리메이크한 <I Can't Stop Loving You>와 나중 마이클 볼튼이 부른 <Georgia On My Mind>이다. 대표곡은 상기한 곡들 외에 그의 이름을 알려준 54년의 <I Got A Woman>과 61년 차트정상을 차지한 <Hit The Road Jack>도 유명하다. 2004년 6월 급성 간 질환으로 타계했다.


8. 밥 딜런(Bob Dylan)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함께 로큰롤 빅3로 평가받는 거인. 60년대 초반 민권운동이 일어나면서, 현실의 왜곡에 저항하는 통기타 포크 음악으로 전 세계 청춘을 저항의 띠로 엮었다. 초기의 대표작은 반전 테마의 <Blowin' In The Wind>와 구질서의 타파를 역설한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등.


대중음악의 노랫말을 하루살이에서 성경의 수준으로 승격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철학을 방불케 하는 내면탐구의 난해하고 심오한 세계는 훗날 대학의 커리큘럼 등을 비롯한 학술연구대상으로 다루어졌을 정도.


DVD에 인터뷰한 많은 뮤지션들이 일제히 록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꼽고 있다. '시대의 표상' '록의 구세주'로 불리면서 지금도 전성기를 누린다. 밥 딜런의 음악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로큰롤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비틀스의 로큰롤에 자극받아, 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어 포크 팬들의 돌과 계란세례를 당한 것은 전설적인 에피소드. 하지만 용기 있게 포크와 록을 결합한 '포크록'을 산파하면서 그것을 당대의 음악문법으로 만들었다. 이 시점의 걸작이 <Like A Rolling Stone>이다.


1941년 덜루스에서 태어났지만 미네소타 히빙에서 성장했다. 90년대 중반 인기를 누린 그룹 월플라워스(Wallflowers)의 리더 제이콥 딜런이 그의 아들.

 

9. 비치 보이스(Beach Boys)


60년대 초반 미국의 신흥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해변 놀이문화로 각광받은 파도타기 즉 서핑의 붐을 음악으로 표현하면서 떠오른 그룹. <Surfin' USA> <I Get Around>를 비롯한 많은 서핑 히트넘버와 함께 지금도 '여름음악의 대명사'로 통한다. 멤버들의 경이로운 보컬 화음이 트레이드마크.


1942년 캘리포니아 태생인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을 주축으로 친동생들인 칼과 데니스, 사촌인 마이크 러브, 친구인 알 자딘 등 5인조로 61년에 결성되었다. 가공할 비틀스의 영국 침공에도 꿋꿋하게 버텨 미국의 자존심을 지켰다. DVD에서 브라이언 윌슨이 “그 때 잊혀질 운명에 처해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증언하듯 비틀스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비치 보이스가 역사적 위상을 차지하는 이유는 브라이언 윌슨의 천재성 때문. 그는 진보적인 스튜디오 기술을 활용한 편집적인 콜라주 형식의 음악을 창조, 음악가들에게 스튜디오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 소산이 66년의 걸작품 <Pet Sounds>이며 곧이어 전미차트 정상에 오른 기념비적 싱글 <Good Vibrations>.


그 드높은 예술적 질감에 충격 받아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가 이듬해 응수한 작품이 명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다. 88년 재기 히트송 <Kokomo>로 잘 기억되지만, 브라이언 윌슨이란 천재로 더 기억되어야 할 그룹.

 

10. 비틀스(Beatles)


두 말할 필요 없는 로큰롤, 아니 전체 대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그룹.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멋진 4인'(Fab Four)으로 불리며 팝의 지형도를 완전히 새롭게 썼다. 록 밴드의 존재, 영국의 존재, 하층계급 자존들의 존재를 음악역사에 각인한 것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스의 음악을 슈만, 모차르트, 브람스 수준으로 평가하면서 “60년대를 알려거든 비틀스 음악을 들어라!”라고 했다.


1940년 영국 리버풀 태생인 존 레논을 주축으로 결성되어 쿼리멘, 자니 앤 더 문독스, 레인보우스, 실버 비틀스를 여러 이름을 거치다가 60년 비틀스로 명명되었다. 초기에는 50년대 로큰롤을 증폭해 영국적 셔플 리듬을 얹은 업 템포 스타일을 구사하다가 66년을 기점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술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클래식 진영도 감탄할 만큼 록을 하나의 고급예술로 상승시킨 것이 주요 업적.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스의 음악을 슈만, 모차르트, 브람스 수준으로 평가하면서 “60년대를 알려거든 비틀스 음악을 들어라!”라고 권했다. 발표하는 앨범 마다 지속적으로 음악적 실험을 거듭해 “같은 것을 반복하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하라”는 사실 또한 그들이 후대에 남긴 유산.


70년 재정적인 문제로 인한 멤버간의 갈등으로 해산했다. 대표곡은 <Yesterday> <Hey Jude> <Let It Be> 등이지만, '비틀스로큰롤'로의 접근을 위해선 앨범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White Album> <Abbey Road>가 필수 통과의례. 1980년 존 레논, 2001년 조지 해리슨 사망으로 넷 중 두 사람이 고인이 됐다.

 

11.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60년대 비틀스의 라이벌로 서로 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최강의 로큰롤밴드'로 자리를 굳힌 그룹. 평자에 따라선 록에 관한 한 비틀스보다 그들을 더 위대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딴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기의 록그룹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은 40년의 세월이 넘은 지금도 로큰롤의 에너지를 뿌려대고 있다.


1943년 동갑내기인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 한살 위인 브라이언 존스를 중심으로 63년 1월 런던에서 결성되었다. 결성 동기와 목적이 머디 워터스와 존 리 후커 등의 흑인 블루스를 알리는 것이었음이 말해주듯 블루스를 토대로 한 로큰롤을 구사했다. 록의 기원이 블루스임을 그들보다 확실히 말해준 존재도 없다.


보컬 배우라고 할 믹 재거의 섹시한 카리스마와 키스 리처드의 독특한 리듬이 트레이드마크로, 때로 끈적끈적하고 때로 강력한 파워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전성기 시절 다분히 악동적인 이미지로 깨끗한 비틀스와 차별화되어 반항적 청춘의 우상으로 특급대우를 받았던 점도 록의 성격인 반(反)질서와 관련 중요한 대목이다.


대표작은 <(I Can't Get No) Satisfaction>, <As Tears Go By>, <Brown Sugar>이며 68년 <Beggars Banquet>, 69년 <Let It Bleed>, 71년 <Sticky Fingers> 등의 앨범은 지금도 행여 록의 명반이 선정될 때마다 어김없이 오르는 걸작들이다.

 

12. 버즈(Byrds)

1942년 시카고 태생의 로저 맥퀸(기타)을 비롯해 데이비드 크로스비(기타) 진 클락(퍼커션) 크리스 힐먼(베이스) 마이크 클락(드럼) 등 5인조 미국그룹. 6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되었다. 밥 딜런을 따라 포크록 붐에 가담해, 비틀스의 대항군으로 일컬어지며 그 부문에서 금자탑을 쌓았다. 첫 히트곡인 <Mr. Tambourine Man>도 딜런의 작품.


로저 맥퀸의 12현 기타에 의한 징글쟁글 사운드가 특징. <Turn! Turn! Turn!(To Everything There Is A Season)>은 65년 전미차트 정상에 올랐다. 또한 이듬해 발표한 몽롱한 사운드의 <8 Miles High>는 사이키델릭 록의 원조로 꼽힌다. 나중 컨트리록도 들려줬을 만큼 많은 사운드실험을 기울여 후대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얼터너티브 록의 원조로 꼽히는 알이엠(R.E.M.)은 버즈 사운드에 영감을 받은 대표적인 후배그룹.


멤버교체가 잦은 가운데 맥퀸, 클락, 힐먼은 트리오로 활동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크로스비는 67년 그룹을 떠나 크로스비 스틸스 앤 내시(Crosby, Stills &Nash)로 활동했다. 멤버 가운데 진 클락과 마이크 클락은 사망했다.

 

13. 더 후(The Who)


비틀스, 롤링 스톤스와 함께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삼분(三分)한 그룹. 대중적 인기는 둘에게 뒤졌으나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괴적인 무대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64년 런던에서 결성되어 그 무렵 영국의 반항하는 모드족(Mods) 정서를 음악으로, 행위로 실천했다. 대표곡인 <My Generation>에서 '늙기 전에 죽고 싶다'는 표현은 록의 명구로 남아 있다.


1945년생인 피트 타운센드(기타)와 1944년생인 로저 달트리(보컬)가 주축이지만 광포한 파워 드럼을 친 키스 문(47년생)도 유명하다. 베이스 멤버는 존 엔트위슬(44년생). 이들의 외모는 롤링 스톤스 저리 가라할 만큼 음험하고 불길했다. 피트 타운센드의 풍차 돌리기 주법과 기타 때려 부수기는 그들만의 브랜드.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불량한 이미지의 그룹이 나중 영화화되기도 한 정교한 내용의 록오페라 앨범 <Tommy>(69년)를 만들었다는 사실. 72년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차용한 앨범 <Who's Next>도 록의 명반으로 기록된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긴 키스 문은 약물과용으로 78년 세상을 떴다.

 

14.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소울의 대부(Godfather Of Soul). 50년대 중반 공식 데뷔해 60년대 중후반 소울의 폭발 시점을 맞아 전성기를 누렸다. 다이너마이트 폭발하는 듯한 샤우트와 비트를 타는 빼어난 가창력과 환상적인 춤 솜씨로도 흑인사회의 영웅이 됐다. 각각 흑인들의 쓰라림과 당당한 자세를 노래한 67년 <Cold Sweat Pt 1>과 68년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는 그의 존재를 각인시킨 소울의 표제 곡들이다.


이후 백업 밴드 제이비스(JB's)와 함께 세분화된 비트의 펑크(Funk) 음악의 유행에도 길을 텄다. 5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빌보드 팝 차트에 올린 곡만도 99곡. 사상 가장 톱40 히트송을 많이 보유한 인물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히트 맨'.


33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반웰에서 태어나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자랐다. 흑인사회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명망이 높았으나 80년대에 경찰차 추월사건으로 수년간 복역해, 이미지에 흠집을 남겼다. 63년 뉴욕의 흑인전용무대인 아폴로극장에서의 라이브 앨범은 그의 진면목을 실감나게 전달하는 걸작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86년 로큰롤 명예전당에 등재되었다.

 

15.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소울음악의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 존재로 한때 소울의 왕(King Of Soul)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멤피스의 음반사 스택스 특유의 반 박자 늦은 백비트 곡이 딴 소울가수와의 차별 점이다. 흑인 소울 가수 가운데 드물게 곡을 직접 쓴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아레사 프랭클린의 67년 시그니처 송 <Respect>도 그가 써서 65년에 발표한 곡(차트순위 35위)이다.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리메이크하는 등 60년대 소울과 록이 동반자 사이임을 증명했다. 실제로 그는 출연진이 백인 뮤지션 일색이었던 67년 몬터리 페스티벌에 출연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1년 조지아주 도손 출신으로 샘 쿡(Sam Cooke)에 영향 받아 가수활동에 입문했다. 전성기였던 67년 12월 비행기추돌로 27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68년 전미차트 정상을 밟은 <(Sittin' On) The Dock Of The Bay>은 톤을 낮춘 소울 발라드의 수작. 이외에 <I've Loving You Too Long(To Stop Now)>와 <Try A Little Tenderness>도 잊을 수 없는 레퍼토리들이다.

 

16.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예나 지금이나 소울의 여왕(Queen Of Soul)으로 통하는 사상 최고의 소울 가수. 여러 조사기관이 20세기를 정리하면서 실시한 가수부문 설문에서 일제히 1위로 선정되었을 만큼, 소울 뿐 아니라 대중음악을 통틀어도 최고 가창력의 가수로 손꼽힌다.
영혼이 실린 가스펠 과 대중적인 리듬 앤 블루스의 결합을 노래로 완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소울의 메카가 된 어틀랜틱으로 이적해 데뷔곡인 <I Never Loved A Man(The Way I Love You)>를 앨러바마 소재의 머슬 숄즈 스튜디어에서 취입하던 날, 같이 참여한 연주자들이 그의 환상적인 노래솜씨에 경악한 나머지 녹음을 마치고 영광을 만끽하기 위해 어울려 춤을 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42년 멤피스에서 태어나 디트로이트에서 성장했다. 두 차례 이혼으로 사생활은 평탄하지 못했으나 80년대 중반 <Free Way Of Love>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래미상을 15차례나 수상했고 90년에는 그래미 '살아있는 전설'상을 받았다. 87년 로큰롤 명예전당에 여성 뮤지션 최초로 입적되는 기록도 갖고 있다. 대표작은 67년 디트로이트 흑인폭동 당시 시위대 찬가로도 불린 <Respect>를 비롯해 <Chain Of Fools> <Ain't No Way> 등.

 

17. 슈프림스(Supremes)


굴지의 흑인음악 전문음반사 '모타운의 상표'가 된 여성 트리오 보컬그룹. 64년 <Where Did Our Love Go>를 필두로 발표한 다섯 곡이 내리 전미차트 1위를 차지하는 등 69년까지 넘버원 곡만 12곡을 쏟아내는 가공할 슈퍼스타덤을 과시했다.


1944년 디트로이트 태생인 다이애너 로스를 축으로 메리 윌슨, 플로렌스 발라드와 함께 그룹이 결성되어 59년부터 노래했다. 이듬해 60년 모타운의 탐라 레이블과 계약해 처음에는 전문 백업보컬 팀으로 움직였다. 곧 섹시한 다이애너 로스의 투명한 음색을 전매특허로 시대를 석권했다. 그녀는 70년부터 개시한 솔로 활동을 통해서도 슈프림스 시절에 버금가는 히트퍼레이드를 전개했다.


우리에겐 라이오넬 리치와 호흡을 고른 81년 듀엣 곡 <Endless Love>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본고장 팝 팬들은 여전히 60년대 슈프림스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는 <Come See About Me> <Stop! In The Name Of Love> <Love Child>를 좋아한다.

 

18.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로서, 60년대 말 그가 출현하는 순간 모든 프로 연주자들이 숨이 멎어버렸을 정도의 천재적 역량을 과시했다. 앰프와 기타의 픽업 사이의 가장 소음이 잘 들리는 지점을 찾아 피드백 효과를 창조했고 그만큼 와와 페달을 유효하게 활용한 기타연주자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시애틀에서 1942년 출생해 포크의 본거지인 뉴욕의 그리니치 일대에서 활동했으나 주목받지 못한 채 영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노엘 레딩(베이스) 미치 미첼(드럼)과 함께 3인조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어리언스'로 활동. 애니멀스의 멤버였던 채스 챈들러가 발탁해 그들의 매니지먼트를 맡았다.


미국 데뷔 무대였던 67년 몬터리 팝 페스티벌에서 기타에 불을 지르는 지극히 반항적인 퍼포먼스를 벌여, 시대의 표상으로 부상했다. 69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는 미국의 애국가 <Star Spangled Banner>를 노이즈와 총탄 같은 연발 연주로 일관된 기타 사운드로 재해석, 미국정부의 월남전 참전을 비판했다.


70년 수면제 과용에 의한 구토로 앰뷸런스에 실려 가던 도중 사망했다. 27살의 요절. 대표곡은 <Purple Haze> <Foxey Lady> <All Along The Watchtower>. DVD에 가장 많이 조명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19.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샌프란시스코 히피 시절을 수놓은 로큰롤의 화신이자 그 무렵의 '백인 블루스' 열풍에 불을 댕긴 여걸이다. 1943년 텍사스 포트아더에서 출생해 히피 라이프스타일에 끌린 채 66년 홀연히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왔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빅 브라더 앤 더 홀딩 컴퍼니'에 리드 싱어로 합류해 마치 무당 같은 광기로 무대를 평정, 관객들의 전율을 일으켰다.


한 인터뷰에서 “언젠가 한 콘서트에서 2만5천명 관객과 섹스하고 그런 뒤 집에 홀로 가는 내용의 노래를 쓸 것”이라고 한 말은 소외와 폭발로 점철된 히피 세대정서를 축약한다. 68년 그룹을 나온 뒤는 비교적 잔잔한 블루스로 전향했지만, 마약과용으로 27살의 꽃다운 나이인 70년에 불운한 생을 마감했다.


사후 발표된 노래 <Me And Bobby McGee>(71년)는 추모열기로 빌보드 정상을 점했다. 하지만 대표작은 '어떻게 저런 노래가 나오나?' 하는 경탄을 부르는 67년 <Cheap Thrills> 앨범의 <Ball And Chain>과 <Summertime>.

 

20. 도어스(Doors)



60년대 중후반 사이키델릭 록 시대를 주름잡은 4인조 밴드. 그룹의 중핵은 노래하는 짐 모리슨(Jim Morrison)이었다. 1943년 플로리다 멜버른에서 출생한 그는 레이 만자렉(키보드) 로비 크리거(기타) 존 덴스모어(드럼)와 결성한 그룹에 특유의 시적(詩的) 감수성을 부여, 시와 로큰롤의 결합을 꾀했다. <Light My Fire>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룬 <The End>가 대표작.
랭보는 물론, 비트 시인인 알렌 긴스버그와 잭 케루악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그는 사회규범으로 인해 억눌린 인간의 욕망과 자아를 찾기 위해 온몸으로 기성의 질서와 체제에 덤벼든 반항아였다. “나는 혁명 무질서 혼란 그리고 이 시대에 무의미해 보이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내게는 그것들이야말로 자유로 향하는 진정한 길로 보인다!”


무대에서 수차례 선동적 구호와 외설적 행위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70년 12월,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미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향했으나 이듬해 7월 호텔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프린 뒤를 이은 27살 요절. 91년에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도어스>가 상영되어 다시 한번 짐 모리슨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21.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백인 블루스 기타의 전형을 제시한 인물. 야드버즈(Yardbirds)가 상업적으로 흐른다는 이유로 탈퇴해 좀더 블루스에 헌신하기 위해 존 메이욜 앤 더 블루스 블레이커스(John Mayall &The Blues Breakers)에 몸담았고, 이후 즉흥 연주 잼의 미학을 확립한 그룹 크림(Cream)을 시작으로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 데릭 앤 더 도미노스(Derek &The Dominoes)를 두루 거쳤다. 흑인 연주자를 능가하는 순도 높은 블루스를 그만의 것이다. '기타의 신'이 별명.


크림 때 히트곡인 <Sunshine Of Your Love>와 데릭 시절의 <Layla>는 70년대 록의 금자탑으로 기록된다. 비틀스 조지 해리슨의 아내인 패티 보이드에게 실연 당하고 만든 처절한 비가(悲歌)인 후자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블루스의 고통을 닮은 그의 실제 삶은 죽은 어린 아들에게 바치는 92년의 <Tears In Heaven>로 다시 반복되었다. 이 곡은 언플러그드 음악의 기폭제가 됐다. 1945년 영국 리플리 태생.

 

22.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1944년 런던 태생인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흔들리던 야드버즈를 살려 확대 재생산한 그룹. 로버트 플랜트(보컬), 존 폴 존스(베이스, 키보드), 존 보냄(드럼)과 함께 4인조로 68년 결성했다. 라이벌 딥 퍼플과 더불어 헤비메탈 형식미를 확립했고, 70년대 헤비메탈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때문에 헤비메탈 밴드로 인식되어 있지만 실은 블루스, 포크, 인도음악, 레게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장르를 소화해냈다.


하이 톤에 그림 그리는 듯한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을 위시해 각 멤버들의 역량이 워낙 출중해 그들의 연주는 지망생들에게 록의 교과서로 통했다. 대표곡은 <Whole Lotta Love>와 <Stairway To Heaven>.


74년에는 독자적인 레이블인 스완 송을 설립. 75년 전미 순회공연은 흥행의 신기원을 이룩했고, 당시 미국 포드대통령의 두 딸은 TV에 출연해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80년 존 보냄이 과음으로 사망하자 “그가 없는 레드 제플린은 의미가 없다”며 지체 없이 해체를 선언, 그 의리로도 마니아들의 호감을 샀다.

 

23. 산타나(Santana)


전설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Soul Sacrifice>를 연주해 혜성처럼 나타난 그룹. 70년에 발표한 명반 <Abraxas>의 수록곡 <Oye Como Va>가 실증하듯 라틴 리듬에 록을 결합한 이른바 '라틴 록'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1947년 멕시코 태생인 기타연주자 카를로스 산타나의 이름을 그룹명으로 채택했다.


카를로스 산타나의 연주는 화려한 스케일은 아니나 범접 불허의 확실한 그만의 기타 톤을 소유하고 있다는 평. 대표곡은 <Black Magic Woman> <Europa> 등이며 국내에선 낭만적 연주곡 <Samba Pa Ti>가 애청되었다.


90년대 들어 잊혀질 뻔했다가 세기말 라틴 팝 열풍 속에 내놓은 앨범 <Supernatural>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 앨범은 <Smooth> <Maria, Maria> 등의 슈퍼 히트곡과 함께 10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2001년 그래미상 8개 부문 수상.

 

24.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


DVD에서는 조망되지 않고 있으나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60년대 포크 듀엣.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은 1941년생 동갑내기에 고교동창으로 모두 뉴욕 출신. 학창시절에 탐 앤 제리(Tom &Jerry)로 활동하다 64년 헤어졌으나 65년 다시 만나 듀엣 활동을 재개했다.


<The Sound Of Silence>는 원래 통기타 곡이었으나 폴 사이먼 부재중에 '포크록' 시대임을 간파한 프로듀서가 록 리듬을 가미시켜 싱글로 발표, 사이먼을 놀라게 했다는 것. 대선 후보로 나선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암살과 맞물려 발표된 <Mrs. Robinson>과 불후의 명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대표작.


아트 가펑클의 성악적 발성과 폴 사이먼의 정교한 작곡이 트레이드마크. 71년 견해차로 갈라섰으나 간헐적으로 재결합, 2004년 전미 순회공연(타이틀 'Old Friends')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25.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그가 소속된 모타운 뿐 아니라 전체 흑인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인물. 시각장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등 다방면에서 이름처럼 경이적인 역량을 과시했다. 하모니카 연주만도 일급.


1950년 미시간주 사이그뉴 태생으로 열 살 적인 60년 모타운과 음반 계약을 맺었다. 63년 '리틀 스티비 원더'란 이름으로 발표한 곡 <Fingertips-Pt 2>는 빌보드 1위에 올라 최연소 넘버원 송을 기록. 70년 모타운과 재계약하면서 아티스트 자유를 확보, 이후 줄줄이 수작앨범을 내놓았다. 명반 단골 아티스트!


곡은 <Superstition>과 <I Wish>, 앨범은 76년 작 <Songs In The Key Of Life>가 대표작. 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 소울, 펑크, 재즈를 포괄해 흑인음악의 용광로와 같은 재능을 발했다. 인권운동가로도 명망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