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 - 그 음악의 뒷 얘기
 


60년대에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며 떵떵거리던 비틀스가 꼭 만나고자 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로 하여금 세계 정복의 꿈을 키우게 한 인물.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비틀스를 만든 존 레논은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에 내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심지어 통기타의 영웅으로 유명한 밥 딜런마저 꿈은 '엘비스보다 큰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저스트 어 프렌드'라는 곡으로 유명한 마크 앨몬드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는 황제다. 다른 설명은 일체 필요없다!”

 

로큰롤을 한다는 비틀스가 '로큰롤의 황제'를 만나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엘비스가 없었다면 자신들도 없다는 것을 비틀스는 알고 있었다.

 

'청춘의 음악적 독립'을 이끈 공로자

 

엘비스는 세상을 송두리째 바꿨다. 엘비스가 등장하기 전에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을 울려대는 로큰롤은 보편화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56년 '상심의 호텔(Heartbreak hotel)'이란 곡과 함께 출현한 엘비스를 통해서 로큰롤이 무엇인가를 알았다.

 

젊은이들은 뜨거운 피가 넘치는 로큰롤에 열광했고 어른들은 이상한 음악에 청춘이 물드는 것 같아 걱정했다. 기성 세대는 10대들의 일탈 행동의 뒤에 로큰롤과 엘비스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한 경찰의 푸념이 기성 세대의 일반적 시선을 알려준다. “만약 엘비스가 TV아닌 거리에서 그렇게 몸을 놀렸더라면 그를 체포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도한 로큰롤의 물결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일순간 음악은 선율 중심의 스탠다드 음악에서 격렬한 리듬의 로큰롤로 바뀌었다.

 

로큰롤 이전의 주류 음악이 바로 이 스탠다드 팝 음악이었다. 작년에 사망한 프랭크 시내트라로 대표되는 이 음악은 50년대 초반만 해도 세대 전체에 걸쳐 인기를 누린 음악이었다. 노년도 청년도 어린이도 이 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엘비스가 로큰롤을 대중화하면서 이 가운데 젊은이들은 스탠다드 팝 진영으로부터 떨어져나오 로큰롤로 방향을 선회했다. 엘비스가 서구 음악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처럼 '청춘의 음악적 독립'을 이끈 공로 때문이다.

 

“저 백인 친구는 어째서 검둥이 노래를 부르는 거지?”

 

로큰롤이란 과연 어떤 음악인가. 지금은 백인들이 로큰롤을 많이 해 록을 백인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록은 실은 흑인 음악인 블루스가 기초가 되어 백인 음악인 컨트리와 합쳐진 음악이다. 그야말로 흑백 음악의 융합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는 누구보다도 로큰롤의 정체를 잘 담아냈다. 그는 전형적인 백인이지만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에는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냄새가 공존했다. 유명한 곡 '러브 미 텐더'만 해도 흑인의 창법이 구사된 노래이다. 그가 공연할 때 백인들은 “저 백인 친구는 어째서 검둥이 노래를 부르는 거지?”하며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엘비스의 가창력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로큰롤이 막 탄생했을 때 스탠다드 팝 가수들은 음정이 불안한 로큰롤 가수의 가창력을 많이 물고 늘어졌다. 한마디로 그들의 노래 솜씨는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로큰롤 음악의 매력은 가수의 정확한 음정보다는 개성적인 음색과 자유로운 가창에 있지만 이런 것은 평가의 대상이 되질 못했다.

 

엘비스는 하지만 모든 비판과 지적을 단숨에 잠재웠다. 군에서 돌아온 후 1960년부터 그는 어떤 스탠다드 가수보다 훌륭한 가창력을 과시했다. 이 무렵의 노래들 중에 이탈리아 민요인 '오 솔레 미오'를 영어로 부른 '지금 아니면 안돼(It`s now or never)'나 '오늘 밤 외로운가요(Are you lonesome tonight)',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어(Can`t help falling in love)'와 같은 스탠다드 풍의 곡들이 대표적이다.

 

그토록 엘비스를 성토하던 프랭크 시내트라도 그를 가리켜 '매직 보컬'의 소유자로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로큰롤에 대한 일종의 배신(?)으로 비춰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국민가수로 승격되면서 록 가수는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록음악 진영에서 엘비스에 대한 평가를 절하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엘비스는 슈퍼스타로 떠오른 뒤 사실상 은둔했다. 극성 팬들 때문에 길을 나갈 수도, 산책할 수도, 쇼핑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는 “난 정말 이제 엘비스인 게 너무 지겹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다. 그는 세상과 차단된 채 42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로 발표되었지만 사인을 두고 약물중독설, 자살설 등 무수한 의혹이 뒤따랐다. 그는 화려하게 로큰롤의 꽃을 피웠지만 명성의 울타리에 갇혀 희생된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실로 스타덤이 얼마나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는가를 엘비스만큼 웅변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하지만 엘비스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애착은 절대적이다. 그를 대통령 이상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든다. 그가 살았던 그레이스랜드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참배객의 발길이 계속되고 있다. 해마다 엘비스를 닮은 인물 선발대회가 성대하게 열린다.

'날 사랑해주오(Love me)'와 같은 노래를 들으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음을 능란하게 지배하는 그의 탁월한 재능 때문이다. “우리는 엘비스에게 동의한 것과 같은 어떠한 동의도 앞으로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평론가 레스터 뱅스의 단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엘비스는 로큰롤 즉 오늘날의 록을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대중음악'으로 만들었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금세기 대중문화사에서 그만큼 찬란한 위용의 깃대를 꽂은 인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