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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본은 엘라 핏츠제랄드와 빌리 홀리데이와 동시대에 노래를 불렀으며 두 보컬들과는 다르게 음색이 어두우며 풍부해서 음역이 테너에서 바리톤의 음역까지 소화해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밥(Bop)시대의 거의 최초의 보컬로 파아노 실력도 갖추고 있어서 빅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이런 연주 실력에 화성에 대한 지식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밥(Bop)시대라고 해서 스캣(Scat)을 자유자재로 하거 즉흥연주를 했던것은 아니며 발음과 음정, 박자를 효과적으로 이용할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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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Magic>


<Nature Boy>, <It's Magic>등의 1948년 히트를 친곡이 존재하며 1958년 그녀가 부른'Broken Hearted Melody'는 백만장이상 팔리게 됩니다. 또한 그녀가 부른 <Summer Time>은 다른 어떤가수가 부른 노래보다 가장 완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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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Hearted Melody>




사라 본(Sarah Vau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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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3월 27일 ~ 1990 년 4월 3일


사라 본(Sarah Lois Vaughan)은 미국 뉴저지주 뉴아크(Newark)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제이크(Jake) 본은 목수였으며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에이다(Ada)본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세탁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1차 세계 대전중 버지니아에서 뉴어크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아버지 제이크 본은 매우 신앙깊은 기독교 신자였으며 사라본은 7세에 피아노를 배우고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때때로 리허설때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합니다.


사라본은 어릴적부터 레코드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푹 빠져 지냈으며 10대중반에 불법의 뉴아크 나이트클럽에서 눈에 띄어 피아니스트로 진출하게 되지만 그녀의 이런 생활은 고등학교 학업에 지장을 주어 고등학교 3학년때 중퇴를 하게됩니다.


사라 본은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서 빅밴드의 음악을 듣고 뉴욕으로 갈것을 결심하고 그녀의 친구 '도리스 로빈슨'과 뉴욕으로 떠나게 됩니다. 1942년 가을 사라 본이 18세때 그녀의 친구 '도리스'는 '아폴로 극장' 아마츄어 나이트 콘테스트에 출전하게 되며 사라 본은 이때 피아노 반주를 해줘 2등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후에 그녀는 아폴로 극장에서 주체하는 콘테스트에서 'Body and Soul'을 불러 우승을 했으며 아폴로 극장에서 노래를 부를수 있게됩니다.


사라 본은 얼 하인즈(Earl Hines) 빅 밴드의  피아노와 보컬을 맡게 되는 행운을 얻고 후에 얼 하인즈 밴드에 있던 빌리 엑스테인(Billy Eckstine) 빅 밴드에서 자신의 음악꽃을 피우게 됩니다.




사라본, 활동의 시작



사라 본은 1943년과 44년에 얼 하인즈 빅밴드와 빌리 엑스테인 빅밴드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당시 밴드는 음악가 조함(American Federation of Music)이거나 가수 조합(American Guild of Variety Artists)으로서 그녀를 고용할 수 있어서 피아니스트로 고용하여 피아노와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하지만 후에 Cliff Smalls 가 트럼본과 피아니스트로 합류되면서 사라 본은 노래에 열중 할 수 있게됩니다.


얼 하인즈 밴드는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 트롬본 연주자 베니 그린이 연주하는 밴드로 최고의 비밥(Be Bop) 연주자들의 집합소가 됩니다.


빌리 엑스테인은 1943년말 하인즈 밴드를 탈퇴하고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자신의 빅밴드를 결성하게 됩니다.


빌리 엑스테인도 재즈의 역사에 남는 많은 뮤지션들이 거쳐간 밴드가 됩니다. 마일즈 데이비스, 케니 도햄, 아트 블레키, 덱스터 고든등이 그의 밴드를 거쳐갑니다. 이때 사라 본은 최초의 밥 보컬을 구사하는 보컬중 한사람이 됩니다.


1944년 사라본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개할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빌리 엑스테인 밴드에 합류하게 되며 1944년 12월 5일 사라 본의 첫번째 음반 기록인 "I'll Wait and Pray" 를 부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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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본의 'I'll Wait and Pray'


밴드의 피아니스트 존 말라(John Malachi)는 사라본에게 그녀의 개성에 맞춰 '건방진, 대담한(Sassy)'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줍니다. 동료들이 지어준 'Sassy'라는 별병을 좋아했으며 사라 본은 종종 'Sassie'라고 적곤 했습니다.


사라 본은 일생동안 엑스테인과 가까이 지내고 함께 많은 작업을 하지만 솔로 경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1944년 말에 엑스테인 밴드를 탈퇴하게 됩니다.






솔로로서의 활동


1945년 사라본은 뉴욕의 52번가 클럽인 'Theree Deuces', 'The Famous Door', 'The Downbeat', 'Onyx Club'에서 솔로활동을 위한 계약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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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본은 1945년 5월 11일 'Guild Label' 에서 'Lover Man' 을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Tp), 찰리 파커(Sax), 알 헤이그(Al Haig, Piano), 컬리 루셀(Curly Russell, Bass), Sid Catlett(Dr.)와 함께 녹음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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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lude


사라 본은 'A Night In Tunisia'의 보컬 버전인 'Interlude' 앨범도 만들었으며 후에 그녀는 약간 다른버젼인 3개의 다른 곡을 길레스피와 찰리파커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게 됩니다.(Continental 시리즈)


1946년 Music craft 레이블 Albert Marx는 그녀에게 앨범 계약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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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 본과 그녀의 남편이자 매니저였던 조지 트레드윌



이당시 본은 Crown, Gotham 레이블에서 녹음을 하던 시기이며 'Cafe Society', 'Downtown' 클럽등에서 지속적인 클럽 연주를 했으며 'Cafe Society'에서 존 카비(John Kirby)밴드에서 활동하다 만난 트럼페터 조지 트래드웰(George Treadwell)과 친구가 되어 트레드웰은 보간의 매니저및 음악 감독역을 해줍니다. 그의 매니저역할은 사라 본을 긍정적으로 변화를 만들어줍니다.


이런 그들의 지속적인 관계는 1946년 9월 16일 결혼까지 이어집니다.


Music Craft 레이블에서의 녹음은  'If You Could See Me Now', 'Don't Blame Me', 'I've Got a Crush on You', ' Everything I Have Is Yours', 'Body and Soul' 등을 녹음하게 되며 현대에 와서 재즈 애호가들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는 곡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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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Craft 레이블과의 관계는 1948년까지 이어지며, 1947년 'Tenderly'는 예상치 못하게 대중적으로 히트를 치게 됩니다. 또한 1947년 12월 27일 발매한 'It's Magic'는 1948년 성공적인 히트를 기록하게 되며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곡을 기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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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HI-FI>


1947년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최고 스타상을 수상하게되며 와 메트로놈(1948)과 다운비트에서도 보컬부문 최고의 인기상에 뽑혔습니다. 1948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하게되는데 이때부터 상업적인 팝 발라드의 음악을 노래하게 되며 많은 비평가들은 그녀의 노래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콜롬비아 레코드의 <In- Hi-Fi>에서 마일즈 데이비스와 지미존스, 베니 그린등과 함께 작업하여 멋진 노래를 불러주며 최고의 보컬로 인정 받기도 합니다.


사라본은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여러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시카고의 디스크 작키 데이브 가로웨이는 그녀의 두번째 닉네임 'The Divene One'을 만들어줍니다. 1953년과 DuMont's 의 버라이어티 쇼에 에서 'My Funny Valentine'과 'Linger Awhile'을 노래하게 됩니다.



1953년 그녀는 Mercury Records와 계약을 하게 됩니다. 


1954년 가일 'Make Yourself Comfortable'을 발매하여 히트시키며 카운트 베이시와 함께 작업한 'How Important Can It be'와 'Whatever Lola Wants', 'The Banana Boat Song', 'You Ought to Have A Wife', 'Misty'등을 연달아 히트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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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사라본은 클리포드 브라운 함께 앨범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을 내는데 평론가들로 부터 격찬을 받았으며 아직도 사라 본의 대표적인 음반으로 수록곡 'Lullaby of Birdland'는 아직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57년 빌리 엑스테인과 다시 결합하여 'Passing Strangers'를 불렀으며 'Cheek to Cheek''엘라 핏제럴드' 버전과는 다르게 그녀만의 독특한 음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은 여러 투어를 다니기 시작하여 재즈페스티벌과 카네기 홀에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와 함께 빌리 홀리데이, 찰리 파커, 레스터 영등과 연주를 하기도 합니다.


'Big Show'투어로 미국 전역을 다니기도 하며 매우 성공적인 투어를 보내지만 1958년 트레드웰과 이혼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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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Atkins 와 사라 본


1958년 사라 본은 트레드웰과 이혼후 1959년 9월 4일 시카고에서 C.B Atkins와 결혼하게 됩니다. 앳킨스는 음악에 대한 경험은 없었지만 트레드웰과 같이 사라 본의 매니저를 해주었으며 뉴저지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1959년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이 종료되며 Morris LevyRoulette Records라는 작은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습니다. 1960년 4월 지미 존스, 퀸시 존스, 베니 카터등과 함께 앨범을 발매하게 됩니다. 이 앨범은 'Serenata', 'Eternally', 'You're My Baby'등의 히트곡을 만들며 팝 차트에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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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After Hours, 먼델 로위(Guitar), 조지 두비비어(Bass)>, 1962년 <Sarah +2, 바니 케슬(Guitar), 조 콤포트(Bass)>를 발매 하게 됩니다.


사라 본은 아이를 낳을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와 앳킨스는1961년 Debra Lois를 입양합니다. 하지만 1963년 앳킨스의 폭력으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됩니다.


앳킨스는 15만 달러의 빚이 있었고 집은 결국 압수 당하게 되며 양육권은 사라 본이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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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ssy Swings Again, 1967>


1963년 룰렛 레코드와 계약이 만료되고 사라 본은 다시 머큐리 레코드와 손을 잡습니다. 1963년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덴마크의 공연을 다녀오기도 하며 1965년 존슨 대통령을 위한 백악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1967년 그녀의 계약이 종료되는데 <Sassy Swings Again>발매 이후 오랫동안 그녀는 음반사와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사라 본의 새로운 도전


1971년 머큐리 레코드 프로듀서 밥 세드는 새로운 앨범을 제작할것을 그녀에게 묻게 됩니다. <Time In My Life>로 다시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72년 미셀 르그랑(Michael Legrand)듀엣 앨범을 발표하는등 주류음악(Mainstream)을 시도 하게 됩니다.


1973년 그녀의 트리오로 일본 도쿄에 다녀온 라이브 앨범도 기록 하게 되지만 1977년까지 그녀는 앨범 계약없이 콘서트등에만 참석하게 됩니다.


콘서트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함께했으며 1974년  마이클 틸슨 토마스(현 샌프란시스코 오캐스트라 지휘자)와 함께 로스 앤젤레스 필하모닉과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 마샬 피셔가 그녀의 매니저를 맡았는데 1977년까지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마친후 마샬 피셔와도 매니저 관계를 마치게 됩니다.


마샬피셔는 사라 본의 세번째 남편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합법적인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1978년 카운트 베이시 밴드의 트럼페터인 웨이몬드 리드(Waymond Reed)와 세번째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1981년 이혼합니다.


1977년 사라본은 파블로 레코드(Pablo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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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레코드의 사라 본의 첫 앨범 <I Love Brazil!>을 발표합니다. 이 앨범은 그래미에 노미네이트 되게 됩니다. 사라본은 파블로 레코드에서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 <The Duke Elington Songbook, Vol.1,2>, <Copacabana> 를 발표하며 브라질 음악등의 접목을 시도 했는데 평론가들의 혹평 이 있었지만 팬들은 그녀의 새로운 시도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앨범과 그녀의 죽음


1980년대에는 사라본은 다시 주목 받게 됩니다. 그녀의 업적을 인정해주며 그녀에게 공헌 인증 상패와 상을 주게 됩니다. 1980년 Emmy Award에서 특별상을 받게 되며 1985년 마이클 틸슨 토마스와 재결합하여 그래미에서  Best Jazz Vocla Performance Female상을, Hollywood Walk of Fame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되고, 1988년 American Jazz Hall of Fame의 재즈의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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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ncy Jones 의 <Black on the Block>


사라 본의 마지막 앨범은  1989년 퀸시 존스의 앨범 <Black on the Block>으로 이 앨버에서 엘라 핏 제럴드와 함께 듀엣으로 스캣(Scat)을 선보이는데 엘라와 사라 본이 공식으로 같이 녹음한 유일한 앨범이기도 합니다. 


사라본은 1989년 건강이 많이 안좋아지기 시작합니다. 관절염등으로도 89년도의 유럽공연을 취소하게 되었으며 블루 노트 재즈 클럽에서 공연하는동안 폐암진단을 받게 됩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그녀의 딸과 함께 지내게 되며 그녀의 66번째 생일을 맞이한지 일주일 후 1990년 4월3일 저녁에 눈을 감게 됩니다.


사라 본의 장례식은 자신의 고향인 뉴아크에 있는 교회에서 진행 됩니다.




마치며...


다음 시간에는 엘라 핏츠제럴드에 대한 글을쓰며 동시대 '빌리 홀리데이, 엘라 핏츠제럴드, 사라 본' 이세명의 재즈 보컬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라본의 수많은 앨범들이 존재해서 많은이들이 듣는 그녀에 대한 각별한 곡과 앨범들이 각기 달라서 앨범 하나 하나 설명해드리지 못한것 같습니다.


사라본의 주요 앨범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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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싸잡아서 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