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a Fitzgerald 엘라 피츠제럴드 (1917.04.25 ~ 1996.06.15)

엘라 피츠제랄드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사라 본(Sarah Vaughan)과 더불어 3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로 칭송받는 아티스트이다.

빌리 홀리데이가 우울하고 깊은 감성을 표현했다면, 엘라는 아름다운 음색과 넓은 음역을 지닌 젊고 밝은 여성적인 이미지의 대명사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무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스캣(Scat) 창법을 가장 능숙하게 소화해내는 가수로 인정받았다.

‘목소리’ 하나 만으로 그 어느 악기보다 즉흥적인 연주를 표현하였으며, 스윙과 비밥시대에 걸쳐 빛나는 목소리와 넘치는 스윙감을 통해 ‘재즈디바’로 각인되었다. 아마 그 어떤 뮤지션에게라도 재즈 가수 중에 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엘라 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만큼 그녀가 재즈가수로써 보여준 능력은 절대적이었다.

The First Lady of Song, 엘라 피츠제랄드의 명성과 늘 같이 있었던 이 표현은 그녀의 위대함을 가장 함축적으로 정의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녀에겐 하늘이 선물한 천상의 목소리가 있었고, 그 목소리와 함께 리듬과 멜로디를 폭넓게 다스리는 천부적인 음악성이 있었다.

아무리 나쁜 곡이라도 엘라의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면 새로운 생명력이 부여되었고 아름다운 빛으로 변하게 된다.

스윙 시대를 잠식했던 엘라 피츠제랄드가 모던 재즈의 자유를 흡수하면서 부터 모던 재즈 보컬의 세계도 엘라 피츠제랄드의 것이 되었다. 또한 루이 암스트롱으로부터 스캣의 방법론을 전수 받는 순간부터 '스캣'이라는 단어는 엘라 피츠제랄드의 상징으로 전이되었다.

스캣, 스윙, 임프로비제이션 등 재즈 싱어로서 최고의 테크닉을 보여주었으며, 말하듯 노래를 풀어나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슴절절하게 노래불렀던 빌리 할러데이와는 달리, 그는 밝고 유쾌한 음색을 갖고 있었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또한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한 해석과 풍부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이 선물한 맑고 아름다운 보이스, 안정된 호흡과 발성, 명암을 두루 읽는 다채로운 색감, 저음의 깊이와 고음의 열정을 넘나드는 폭넓은 음역, 리듬과 멜로디를 다스리는 자유로운 기악적 스캣, 밝고 우아한 비브라토, 가사에 실린 정감을 풍성하게 실어 나르는 전달력...모든 재즈 보컬리스트들이 진정 닮고자 했던 엘라 피츠제랄드. 그녀는 재즈 보컬의 이상형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 스캣 scat
뜻이 없는 음절에 붙인 선율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스캣은 재즈에서 가사 대신 “다다다디다다” 등 아무 뜻도 없는 소리로 노래하는 창법이다.
1926년 루이암스트롱이 《Heebie jeebies》라는 곡을 취입하던 중, 악보를 떨어뜨려 즉흥적으로 부른 것이 시초라고 하며, 1940년대 밥(bop) 유행기에 엘라 피츠제럴드 등이 이 기법을 사용하면서부터 널리 보급되었다. 뒤에 밥 싱잉(bop-singing)이라고도 하였다.

- 스윙 swing
재즈 연주 특유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듯한 리듬감을 형용한 말.

- 임프로비제이션 improvisation
예측불허. 즉석에서 완성된 것이라는 뜻. 즉흥연주. 스캣 가수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임프로비제이션을 했다. 엘라 피츠제럴드는 색소폰처럼 매우 끈적끈적한 스캣을 구사했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1917년 4월 25일 버지니아주의 소도시 뉴포트 뉴스에서 태어난다.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4살 때 뉴욕으로 이주해 온 소녀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밝고 유쾌하지 못했다. 어린 엘라는 아버지를 잃고 뉴욕의 뒷골목에서 어머니와 함께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

댄서가 되고 싶었던 엘라 피츠제랄드는 학교에서 합창단에서 활약했으며, 모두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했다. 여러 차례 작은 송 콘테스트에 입상하며 조심스럽게 보컬리스트로서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던 소녀는 1934년 열 여섯의 나이로 할렘 아폴로 극장에서 개최된 아마추어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한다. 25달러의 상금에 기뻐하고 있던 이 순박한 소녀는 그 자리에서 티니 브래도쇼 밴드에게 영입된다. "완벽한 목소리를 지닌 흑인 소녀가 있다"라는 소문은 금새 뉴욕의 재즈 클럽 전역으로 번졌고, 알토 색소포니스트 베니카터도 그녀에게 흠뻑 취해 있었다.

그녀가 대성할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판단한 베니카터는 이 촌티 나는 소녀를 칙 웹(드럼)에게 소개한다. 스윙의 열기와 함깨 밴드 싱어의 인기도 필수적이었던 시절, 여느 스윙 밴드들은 미모와 가창력을 겸비한 예비 스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칙 웹은 이 덩치 큰 소녀의 외적인 조건을 모두 가릴 만큼 탁월한 음악성이 있음을 직시하고 주저 없이 그녀를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허락했다. 칙 웹의 기대는 그대로 적중했다.

수줍게 인사하던 소녀는 마이크를 잡는 순간부터 강렬한 카리스마로 청중을 끌어 들였고, 그녀의 무대에는 언제나 앵콜이 메아리쳤다.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많은 재즈계 인사들이 찾아왔고, 엘라 피츠제랄드는 어느새 칙 웹 밴드의 얼굴이 되었다. 테디 윌슨, 배니 굿맨과의 레코딩으로 더욱 광범위해진 엘라의 영역은 1938년 칙 웹이 병상에 눕자 한층 부각되었다.

밴드의 편곡자 밴 알렉산더와 함께 칙 웹의 빈자리를 메웠던 엘라는 이듬해 칙 웹의 죽음을 맞는다.
리더의 부재,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멤버들은 며칠동안 고심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바로 엘라 피츠제랄드가 새로운 밴드를 이끌어 가는 것이었다. 보컬리스트가 리더로, 그것도 이제 스물을 갓 넘긴 흑인 여성이...모험이었지만 엘라는 주위의 우려를 씻어 주었다. 엘라가 리더로 이끌었던 2년 동안 밴드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지만, 엘라 피츠제랄트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한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밴드를 탈퇴하여 보컬 솔리스트로 독립한다.

41년부터 솔리스트로 새 출발한 엘라 피츠제랄드의 기세는 그칠 줄 몰랐고 테가에서는 그녀를 위해 항상 당대 최고의 가악 주자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엘라는 소중한 음악적 은인과 만난다. 당시 테카에서는 'Ella & friends'라는 컨셉으로 화련한 연주자와 엘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었는데, 이 중 한명이 바로 재즈 보컬의 시조 스켓의 창시자 루이 암스트로이었다.

트럼펫의 톤과 프레이즈를 목소리로 표현하는 스캣을 접하면서, 그 자유로운 즉흥성과 다채로운 표현은 엘라의 마음을 앗아갔다. 엘라 피츠제랄드는 루이 암스트롱과의 만남에서 스켓의 비법을 전수 받고, 당시 거대한 폭풍처럼 몰아 닥친 모던 재즈의 코드와 리듬을 흡수하여 사라 본이 열어 놓은 모던 재즈 보컬의 세계로 뛰어 든다.

엘라의 데뷔에서 40년대까지의 과정, 그녀가 스윙 싱어의 주역에서 모던 재즈 보컬로 변신하는 과정은 데카에서의 (4CDs)에 기록되어 있다.

엘라 피츠제랄드의 초창기 활동이 알차게 편집되어 있는 이 앨범에서는 엘라의 싱그러움과 풍성한 스윙감이 전면에 깔려 있으며, 엘라가 스윙에서 모던 재즈로 이동하는 과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만약 엘라의 빅 밴드 시절이 궁금하시다면 역시 흣날 데타에서 재구성한 [The Early Years Part 1, 2)(4CDs)]가 적합한 텍스트일 것이다. Part 1에는 'A-Tisket, A-Tasket'등 칙 웹 오케스트라 시절의 픗픗함이, Part 2에서는 밴드 리더로서의 엘라의 화려한 명연이 발췌되어 있다.

글 출처 : 희아의 지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