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px-Miles_davis_trumpet.jpg 마일즈 데이비스 (Miles Davi, 1926. 5. 26. ~ 1991. 9. 28.)

 

생애

 

1926년 5월 26일,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났고 이듬해에 이스트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치과의사였기 때문에, 다른 재즈 플레이어보다 매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음악 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10대 무렵부터 트럼펫에 흥미를 가져 연주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고교시절에는 지역의 재즈 밴드를 결성하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어른들과 밴드로 활약하였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노동자의 거주구역이 많았기 때문에, 클럽에서의 재즈 라이브가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일스는 많은 재즈 플레이어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18세에, 세인트루이스에 찰리 파커가 연주하러 왔을 때 우연히 찰리와 연주를 하게 되었다. 이후 줄리어드 음악원에 진학하였으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고, 찰리 파커, 맥스 로치 등과 함께 연주하기 시작한다. 1947년에는, 찰리 파커와 맥스 로치의 지원을 받아, 첫 리더 세션을 실시한다.

 

찰리의 수하로서, 비밥으로부터 캐리어가 시작되었지만, 마일스는 새로운 가능성을 필요로 하여 1948년 편곡가인 길 에반스와 만난다. 길의 협력을 얻고,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영향을 받은 《Birth of Cool (쿨의 탄생)》을 제작하였다. 첫 레코딩이었던 데뷔앨범은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이후 길 에반스와 함께 음반을 발표하였다.

 

1950년대부터, 아트 블래키등과 공동 출연하지만, 마약 문제로 연주 활동에서 멀어진다.

회복한 마일스는, 1953년 프레스티지 레코드에서 발표한 《워킨 (Workin')》이후, 하드 밥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1954년 12월 24일에는 델로니어스 몽크와 공동 출연하지만, 양자는 음악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이 공동 출연은 일반적으로 싸움 세션이라고 불린다.

 

1955년에는 존 콜트레인, 레드 갈란드, 폴 챔버스, 필리 조 존스의 멤버로, 제1기 퀸텟을 결성한다. 같은해,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찰리 파커의 추모를 위한 올스타 밴드에 참가하였다. 이 때의 연주가 계기가 되어 콜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하였다. 1956년에 이적 후 첫 작품인 《라운드 어바웃 미드나잇(Round About Midnight)》을 발표한다.

 

한편, 프레스티지와 남겨진 계약을 끝마치기 위해서, 2일간 앨범 4매분의 녹음을 하였다. 24곡 모두 원 테이크로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마라톤 세션이라고 불린다(실제로는 연속 2일간이 아니고, 2회의 세션의 사이에는 약 5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연주는 《워킹(Workin')》 《스티밍(Steamin')》 《릴랙싱(Relaxin')》 《쿠킹(Cookin')》 4개의 앨범에 수록되었고 프레스티지는 이 4매를 매년 1매씩 4년에 걸쳐 발매했다.

 

또, 1957년에는 파리에 건너가, 현지의 재즈맨과 함께,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음악을 러쉬에 맞추어 즉흥연주로 제작하였다. 1958년에 캐논볼 애덜리를 더하여, 밴드는 섹스텟(6인 편성)이 되었다. 같은해 캐논볼의 《섬씽 엘스》에 참가하였다. 또, 레드 갈란드가 탈퇴했기 때문에, 피아노에 빌 에반스를 맞이한다.

 

빌은 밴드에 클래식 음악(특히 라벨, 라흐마니노프) 이론을 반입해 마일스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흑인 피아니스트를 고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일스 밴드의 흑인 팬으로이러한 부터 인종차별 문제가 제기되어 (당시 빌은 유일한 백인 멤버였다)가입한 지 7개월 만에 탈퇴하였다. 그 후 빌을 특별히 복귀시켜, 마일스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를 제작. 모드적인 재즈방법론을 나타내었다.

 

1960년에는 존 콜트레인이 그룹을 탈퇴하고, 다른 멤버도 수시로 교체된다.

이때부터 한동안 멤버는 고정되지 않고(이 시기 소니 롤린즈나, J.J.존슨 등과 다시 공동 출연하였다),

눈에 띄는 작품도 적고, 라이브 레코딩이 중심이 되어 간다.

 

1963년에 허비 행콕, 론 카터, 토니 윌리암스가 그룹에 참가하였다.

1964년 7월에 첫 일본 방문을 하게 되고 같은 해 가을에 웨인 쇼터를 맞이해 제2기 퀸텟이 확립되어 1968년 전반까지 이 멤버로 활동하였다. 도중 마일스의 건강 상태의 악화로 휴식이 불가피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녹음된 작품은 그다지 많게는 없었지만 《소서러(Sorcerer)》, 《네페르티티(Nefertiti)》 등 뛰어난 앨범을 발표해, 연주면에서도 작곡면에서도 4비트 스타일의 재즈로서는 최고 수준까지 올라가 이 퀸텟은, '황금 퀸텟'이라고 불린다. 마일스 자신도 이 퀸텟을 '위대한 밴드'라고 평가하며 네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았다고 말하였다.

 

1968년, 8비트의 리듬과 일렉트릭 악기를 도입한, 《마일스 인 더 스카이(Miles in the Sky)》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조 자비눌이 밴드에 가입하고, 1969년 《인 어 사일런트 웨이(In a Silent Way)》 《비치스 브류(Bitches Brew)》라는 작품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러한 작품이 70년대 이후의 재즈-락 퓨전 붐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대재즈-락 퓨전(이하 퓨전) 붐으로 밴드의 멤버였던 허비 행콕이나 칙 코리아등이 리더로서 히트작을 연발하였다. 한편, 마일스 자신은 펑크색이 강한, 보다 리듬을 강조한 스타일로 진전하여, 퓨전과는 차별을 두는 하드한 음악을 전개한다. 1972년에 발표된 《온 더 코너(On the Corner)》는, 현재에도 그 진보성이 화제가 되는 문제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일스의 음악은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더 건강 상태도 한층 더 악화되어, 일본에서의 라이브 녹음 《아가르타(Agharta)》, 《판게아(Pangaea)》를 마지막으로, 1975년 이후 은퇴선언을 하게 된다.


1980년에 마커스 밀러 등의 서포트를 받아 활동을 재개한다. 이듬해에 복귀작 《더 맨 위드 더 혼(The Man with the Horn)》을 발표한다. 1980년대는 팝의 색채를 강하게 하여 마이클 잭슨이나 신디 로퍼 등의 작품을 채택하거나 밴드를 따르게 하지 않고 미리 완성된 트랙 위에 트럼펫을 씌우는 팝스 뮤지션의 제작 스타일을 도입했다.

 

1991년에는 유작인 《두 밥(Doo Bop)》에서 힙합 뮤지션인 이지 모 비를 게스트로 맞이해 랩과 재즈를 접목한 힙합재즈를 선보였으나, 본격적인 인기를 일으키기도 전인 1991년 9월 28일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에 있는 St. John's Hospital and Health Center에서 사망하였다.


음악적 스타일
 
음악마일스의 트럼펫 플레이의 대범한 특징은, 뮤트를 사용하되, 비브라토를 쓰지않고, 빠르게 연주하는 등의 테크닉에는 별로 의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디지 길레스피 스타일의 하이톤을 피해 중음역이 트럼펫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나온다는 생각을 갖고 자주 사용했다. 후에는, 쓸데 없는 소리를 일절 내지 않는다고 한 방향성과 연결되어 멤버에게도 그러한 방향성을 암묵적으로 요구했다.

 

악곡상의 주된 특징은, 초기에는, 테마의 뒤와 각각의 순서에 솔로 연주를 하여, 그 사이 백업으로서 호응하거나 부추기는 일은 있어도, 애드립 연주를 동시에 둘 이상 부딪치지 않고, 그 후, 다시 테마로 돌아와 끝나는 전형적인 재즈 형식을 보인다. 1960년대 이후는, 테마로 돌아오지 않고 끝나는 작품도 볼 수 있다. 또, 1980년대의 무대에서는, 트럼펫 외에 신시사이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스튜디오 앨범은 수록 시간 관계 상 편집으로 컷 되거나 이어 맞추는 것이 많았지만, 소리를 갈아넣지는 않았다. 무대에서는, 스튜디오 수록의 신작곡이나 최첨단의 소리를 내는 것보다, 그 때의 악기 편성으로 유명한 곡을 연주하는 일이 많았다.

 

클래식 등의 편곡도 연구해, 쿨 재즈나 그 이후의 완전하게 편곡된 재즈에 대하여 그 성과가 발휘되었다.

특히 그가 도입한 스타일 중에는 모드 선법이 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앨범 《카인드 오브 블루》을 통해 모달 재즈의 발단이 되었다. 이는 찰리 파커 등이 자랑으로 여긴 비밥에 한계를 느껴 음계에 도레미가 도입되기 이전의 낡은 교회 선법을 적극적으로 거두어들인 결과이다.

 

그 밖에도 블루스, 락, 힙합 등도 도입해 재즈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장르의 음악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미 헨드릭스나 프린스를 높게 평가하고 있던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지미와의 공동 출연은 비공식인 세션만으로 끝났고, 프린스 작곡의 《제일바이트》 음원은, 지금도 미발표인 상태이다. 또, 《유어 언더 어레스트(You're under arrest)》에서는 스팅이 나레이션으로서 게스트 참가하였고, 마이클 잭슨과 신디 로퍼의 커버도 수록되어 있다.

 

음악적으로 유연하고 진보적이지만, 프리 재즈 분야에는 손을 대지 않고, 오넷 콜맨을 비판한 적도 있다. 무대에서의 공연에 대하여 관객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일부에서 비판되었지만, 케니 가렛은 '그는 지휘자이다'고 옹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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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스는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항상 비판적이었다.

'백인에 의한 미국'에 대한 혐오가 있어 카스트로는 미국을 비판하는 데 3일 걸린다고 했지만, 나라면 일주일 걸린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것은 인종차별에 대한 그 나름의 분노일 것이다.

 

그러나, 음악성 추구를 위해서는 인종을 초월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편곡자로서 마일스가 가장 가까운 친구라 칭하는 빌 에반스로부터는 생애에 걸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명작 《쿨의 탄생》에는 리 코니츠, 게리 멀리건이라는 백인 뮤지션을 기용했다. 제 1기 퀸텟 시대에, 일시적으로 빌 에반스를 밴드 멤버로 맞아들였을 때, 당시 주된 마일스 음악의 청취자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층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마일스는 '좋은 플레이를 하는 놈이라면, 피부색이 녹색인 놈이라도 고용한다'고 호언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60년대 말의 일렉트릭 음악 도입기는 조 자비눌과 존 맥러플린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재능을 평가하고 있었고, 그 후도 칙 코리아와 키스 자렛, 데이브 리브먼 등 많은 백인 멤버가 마일스의 밴드를 거쳐갔다. 피아니스트 케이 아카기는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1989년부터 2년간 정식 멤버로서 활약했다.

 

그는 빠른 물건을 좋아했다. 항상 페라리등의 스포츠카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최고 속도의 스포츠인 복싱을 즐겼다. 이러한 속도에 대한 집착은 차로 이동하면 1시간 만에 가는 곳을, 비행기 타는 것을 고집해 3시간 걸린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80년에 복귀한 후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몰두해, 《스타 피플》의 쟈켓은 스스로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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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할 Album

 

 

01. Porgy and Bess

02. Round Midnight

03. The Theme

04. The cool Miles Vol. 1

05. Miles Of Davis

 

06. Miles and Coltrane Quintet

07. I Cound Write a Book

08. At Newport

09. Miles Davis and Modern

10. Flamenco Ske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