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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실 (1950년생)

70년대를 풍미하던 통기타 포크가수 이연실,

1970년 '가수 팔도대항전'이라는가요제 프로에서 전북대표로 출전해 입상.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 조소과에 재학중이던 1971년 제5회 MBC팝 콘서트에서

'조용한 여자'등의 자작곡을 진지하게 열창하며 데뷰 리사이틀을 가졌다.

이 리사이틀에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Melanie Safka'(1947년우수에젖은듯한 목소리의주인공) 풍의 여유와 기교를 과시하며 큰 기대를 받는 유망주로 떠오르는데

이연실은 그해 첫앨법 '새색시 시집가네'를 발표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일상적인 생활의 삶을 노래하기를 원했던 그녀는 노래뿐만 아니라 작사,작곡 까지 다재다능함과 더불어 진지한 삶의체험을 통해 솔직하면서도 호소력이 짙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그녀의 매력이다.

이연실은 1950년 전북 군산에서 4남2녀중 차녀로 태어난다

군산대학교 교수였던 아버지와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가수 이연실은 군산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다. 1970년 <가수 팔도대항전>이란 가요제 프로에서 전북대표로 출전하여 입선.
홍대 미대에 재학중이던 이연실은 아르바이트로 소공동 조선호텔뒤 라이브 클럽인 <포시즌>에서 노래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배호의 "누가울어" "안녕" , 박경희의 "저꽃속에 찬란한 빛이" 그리고 예비군가를 작사한 60년대 최고의 작사가 전우씨의 눈에 띄여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참고로 전우씨는 1978년 간경화로 42세란 짧은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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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9월 제5회 <MBC 팝콘서트>에서 자작곡 "조용한 여자"로 데뷔 리사이틀을 갖고 또한 딕훼밀리의 "또 만나요"를 만든 오세은과 조인트 콘서트를 열며 활발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해 11월 데뷔앨범인 <새색시 시집가네>에서 "새색시 시집가네" "둘이서 걸어요" "비둘기집" "하얀눈길"을 발표한다.

1972년 7월 송창식,윤형주,김세환,어은경과 함께 국내 최초의 포크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에서 이연실은 "그이 지금 어디에"와 자신이 작사한 "찔레꽃"을 발표한다. 또한 홍익대 재학시절 음악과 인생을 알기위해 휴학까지 하고 대구로 내려가 다방 레지생활까지 하던 열정적이고 당찼던 이연실은 그해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위해 대학생활을 중단하고 홍익대를 자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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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3월 3집앨범에서 "시악시 마음" "잃어버린 전설" "기다리는 아이" "별리" 발표
12월 이연실과 최헌의 스플릿 앨범에서 "이밤" "소낙비" "나의 길" 발표
1975년 11월 이연실과 박인희의 스플릿 앨범에서 "한자 두자 일곱치" "먼 나라" 발표
그해 12월11일 일명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동료가수인 정훈희 이수미 이현과 함께 자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연실은 사안이 경미하다고 하여 훈방조치 된다.

1976년 5월 <고운노래 모음집>에서 "조용한 여자" "이제는"를 발표하며 재기 한다. 1981년 5월 이연실의 최대의 히트곡인 "목로주점"이 담긴 앨범을 발표한다. 1983년 2월 양병집의 "오늘 같은날"과 이태원의 "솔개"를 만든 작곡가 윤명환과 손을 잡고 10번째 앨범에서 "그이" "문을 닫고" "겨울"등을 발표한다. 1985년 5월 남편인 김영균과 함께 12번째 앨범에서 "잠실 야구장" "어떤 약속"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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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그녀의 18년 음악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앨범인 13번째 앨범에서 "역" "찔레꽃" "비"등을 발표하고 "민들레"란 노래를 머리에 둔 14번째 앨범인 <새노래 모음집>등 결산과 출발을 의미하는 2장의 앨범을 4월에 동시에 발표하게 된다.
(참고로 14번째 앨범에 수록된 "노란 민들레"는 [겨울공화국]의 민중서정시인이자 평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양성우씨의 서정시에 이연실이 곡을 만든 것으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희생된 넋들을 기리는 일종의 진혼곡이다)

1993년 민주당 임채정의원의 후원회에 전유성,엄용수와 함께 참여한다.
1994년 한돌의 <내나라는 공사중>이란 3번째 독집음반 작업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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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에 들어 이연실은 가수 활동을 그만 두면서 이후 이연실의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게 되었으며 더욱이 한때 건강마저 좋지 않다는 소문마저 떠돌던 터라 그의 오랜 펜들을 더욱더 궁금하게 그리고 안타깝게 하고 있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올가 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는 공주의
웃음띄운 그 입술에 노래소리 드높다

동편저쪽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우리다
다시 못 볼 그 옛날에 올가 강물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그토록 슬프고 그토록 생생한 나의 노래여!

우리 노래의 첫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박인희와 이연실. 그들은 여느 가수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온다. 바로 고백하자면, 그들은 여옥의 후예들이다. 백수광부의 처가 불렀던 노래가 되기 전의 노래에 곡을 붙이고 말을 만든 여옥처럼 그들은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육성에 음악이라는 옷을 입혔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장했고 내 성장 주기는 그 노래를 들은 횟수와 정확히 비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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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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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실의 노래들도 그러긴 마찬가지였다. 듀엣 한마음 출신의 양하영이 어느 고아원에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철철 흘리며 부르던 <찔레꽃>이나 봄의 눈부심, 그 찬란한 생명의 태동을 이만큼 더 꿋꿋하게 표현한 곡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민들레>나 6,70년대적인 정서가 그대로 배여 있으면서도 지금 들어도 결코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목로주점>이나 첫사랑의 아픔이 초경의 비릿함처럼 묻어나는 <새색시 시집가네>나 소월의 시에 가락을 붙인 <부모>도 정겹기가 그지없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번안해서 취입했던 <스텐 카라친>이나 <릴리 마를렌> 혹은 더 나아가 우리의 구전민요나 광복군의 노래에서 차용한 <타박네>나 <고향꿈> 같은 곡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서유석이나 양병집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박인희처럼 이연실 또한 단순한 번안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줄 알았던 포크 싱어였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다른 점이 있다면 박인희가 노래에 담겨있는 서정적인 감수성에 치우쳤다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이연실은 포크송만이 지닐 수 있는 민중들의 끈질긴 정한을 잡아냈다는 점이다.

그러한 미덕은 방의경의 <불나무>나 <내 집>, <폭풍의 언덕에 서면 내 손을 잡아주오>나 김인순의 <나비야>와 <하양나비>, 윤연선의 <그 소년>, <고아>, <님이 오는 소리> 그리고 박영애와 이현경의 <아름다운 사람>이나 <그리워라>, <초겨울> 같은 곡으로 흡수되고 확장된다. 그러니까 서유석의 <친구야>나 <그림자>, 양병집의 <부활가>나 <엄마, 엄마 아-엄마>에 나타난 짙은 사회성과 정치성의 또 다른 지점을 이연실이 열어놓았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객관적일 것이다.

아, 그러나 어찌됐든 윤명환의 곡 <오늘 같은 날>이나 <솔개>, <종이꽃>을 부르는 이연실, 그녀의 음성은 서늘하다못해 고혹적이다. 그녀의 음성엔 향토적인 애잔함과 그리움도 녹아있지만 도회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의 향취도 진하게 배여 있다. 그러니까 다들 이연실, 이연실 하는 걸까. 뭐라고 정확하게 꼬집어낼 수 없는 그 미묘한 음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출신의 여성가수 토니 차일즈와 애팔래치아 산맥의 작은 마을에 은둔했던 제인 리치의 염세적인 슬픔이 깃든 허스키한 목소리를 연상시킨다. 하여, 이연실이 청중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꽃반지 끼고>의 은 희가 자아내는 청정무구한 애수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겠다. 곽성삼이 <귀향>이나 <나그네>, <길손> 등에서 추구한 고향의식과 박동률이 <고향가는 길>과 <굴렁쇠>, <잃어버린 시간>에서 보여준 사라진 고향에 대한 생각이 다르듯이.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 이연실, <찔레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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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을 부르며 나는 울었다. 가시에 찔려서도 아니고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단지 한 사람이 그리워서였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였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서였다. 그이는 이곳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지상에서 가뭇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와 나는 같은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다.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차를 마시며 웃을 수도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수도 없다. 그가 옷을 입는 방식에 대해서 흉을 볼 수도 없고 팔짱을 끼고 행복한 웃음소리에 파묻혀 산책을 할 수도 없다. 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는데 그를 이제 더 이상은 볼 수 없다는 이 맹목적 현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아니, 그것은 아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일 것이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나는 무서운 것이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부재에 대한 어떤 위안이나 상황설명도 그가 내 눈앞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진실을 은폐할 도리는 없다. 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이라는 불가의 보편적인 법리를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가 않다.

존재의 부재와 현존에 관한 문제는 시각적인 것이다. 청각과 후각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오감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없음으로 인해 벌어지는 그 모든 실존의 현상들을 마주하기가 겁이 난다. 슬픔의 무게와 상실의 아픔을 감당할 수가 없다. 고통스러운 것은 끝끝내 고통스러움 그 자체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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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실의 노래는 내가 사랑했던 대상이 이제는 멀리 떠나버려서 다시는 내게로 되돌아올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나는 다만 그의 노래를 가끔씩 흥얼거리면서 어리석은 추억과 감상에 젖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러한 추억과 감상이 그의 순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한 줌의 재로 화하는 날, 나 역시 그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함을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내야 함을 알고 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바람 불고 비오는 날 혹은 문득문득 누군가가 아무 허락도 없이 내 마음의 빗장을 부수고 내 속으로 쳐들어는 날이면 기꺼이 그들에게 나를, 내 영혼의 전부를 송두리째 온전히 내맡길 준비가 되어 있다. 내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겠는가.

이연실의 노래를 부르는 순간, 나는 그의 노래가 되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건 때로 내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나를 흔드는 노래 그리하여 내 생의 일부가 되는 노래, 그 노래는 내 몸과도 같다. 노래가 몸이 되고 몸이 노래가 되는 경지, 노래에 취해 내 몸이 대기 속으로 흡수되는 듯한 어떤 떨림의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내가 아닌 나, 단백질의 분자로 구성된 유기물질이 아닌 신성한 존재감에 전율하는 그 무엇. 그것이 무엇이라 한들 어떠랴. 이연실의 노래는 나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 향수는 노스탤지어가 아니다. 내가 향수의 주체가 되어 그의 노래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내 눈앞엔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나'의 영혼과 '그'의 영혼이 자유롭게 교감하는 무한 혼융(混融)의 세계이다. 비유는 낡아도 결코 낡을 수 없는 생처럼 그렇게 그의 노래는 살아있다. 김혜린의 <비천무>와 오 수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에서처럼.

글 출처 : 웹진 가슴 최창근 200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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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 저쪽 물 위에서"라는 가사는 "돈 코샄(돈강 유역의 코사크족 혹은, 카자크족)의 무리에서"라는 가사가 와전된 가사인 듯 하다고 한다.

스텐카 라진[Razin, Stepan Timofeyevich, 1630?~1671.6.16] 이라고도 한다. 돈 지방의 카자크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카자크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증오하여, 무산(無産) 카자크와 도망 농노(農奴)를 규합, 166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볼가강 하류와 카스피해 연안을 횝쓸고 다녔다.

1670년 다시 볼가로 진출, 강어귀의 아스트라한을 점령한 뒤 북상(北上)하여 볼가 중류까지의 광대한 지역의 농민을 지주와 관리들에 대항하는 반란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그해 10월 반란군은 심비르스크(현재의 울리야노프스크) 교외에서 정부군에 대패하여, 라진은 남쪽으로 도망쳐 돈에서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이듬해 4월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 처형되었다. 이 반란은 러시아 역사상 대규모 농민반란으로서, 그는 민요(스텐카 라진)로도 불리어 오랫동안 러시아 농민의 기억에 남았다.

여름에는 그런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데 지금처럼 늦가을이나 겨울만 되면 시베리아와 러시아의 대지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70년대 이연실이 이 노래를 부를때 기관에서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저리 짜집기 했기에 글과 사진과 노래의 출처를 밝히는게 웃기는것 같아서 고마 그냥 통과^^ 이럴땐 동네장사가 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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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혁명 후, 내전기 백군이 7년에 걸쳐 가장 치열하게 적군에 저항한 격전지로 유명하며, 솔로호프의 노벨상 수상작인 <고요한 돈 강>의 실제 무대이기도 하다. 그 후 정부의 집중투자로 대규모 공장, 특히 트랙터 공장이 건설되면서 공업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계 2차대전 중에 200여일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나, 제대로 성한 건물하나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후 대대적인 복구작업에 착수해 1950년대에는 세계 제1의 담수량을 자랑하는 볼가강 하류 볼시키시에 유럽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완공되었다. 값싼 전력을 이용하려는 각종 중화학공업, 군산복합체도 집중적으로 들어서고 러시아의 핵심 공업 지역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1961년 스탈린그라드에서 볼고그라드(Volgograd)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연실, 그 청아한 음유시인의 기억

유행가, 혹은 대중가요라는 이름은, 그 의미 만으로 보자면 시(詩)와 다르지 않다.
시는 한때 한 시절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유행의 노래이며 뭇사람들이 즐기는 신명의 가락이었다. 지나간 가수 중에서 가장 시인다웠던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박인희를 들겠다. 그녀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그대로 낭송했고 '세월이 가면'은 곡을 붙여 불렀다. 박인환의 이 시들은 박인희의 그 곱고 애절하면서도 절제있는 목소리를 통해야 제 맛이 날 정도다. 박인희의 '모닥불'이나 '끝이 없는 길' '얼굴'은 한 시절을 감전시킨 음표의 시(詩)다. 그 노래들은 넋나간 듯 늦가을 밤을 지키며 모닥불 가에서 목이 쉬도록 불러야 원음(原音)이 나온다.

박인희 뿐 아니라, 서유석이나 정태춘에게도 시와 대중가요의 쿨한 만남은 계속된다.
그들 또한 모두 각자의 물길로 각자의 노를 저어 각자의 빛깔로 각자의 소신으로 저쪽, 시의 등대가 희부윰한 안개 속을 멀리까지 저어나간다. 하지만 나는 박인희의 시대에 등장해, 알 수 없는 신비감으로 귀를 사로잡았던, 어쩌면 그 야릇한 비현실감 때문에 유령처럼 느껴지는 한 여자를 기억한다. 그가 이연실이다.

이연실의 '찔레꽃'과 '새색시 시집가네' 그리고 '타박네'는 산업화의 멀미 속에서 성장정지의 볼멘소리같은 어린 중얼거림이 기이한 공명으로 울려퍼졌다. 그가 저 향토빛 노래를 부를 때면 그에겐 찔레꽃 민들레 향기가 났고 그의 고무신엔 흙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스텐카라친'이나 '릴리 마를렌'을 부를 땐, 꿈의 담장을 넘어 엿보았던 그 낯선 풍경 속에서 히아신스를 꽂은 소녀가 돋아났다. 그 이국적인 정조는 감미와 퇴폐가 설탕과 프림처럼 섞여 혀끝으로 녹아든다.

내가 한 시절 가장 매료됐던 그녀의 노래는 '조용한 여자'이다.
어젯밤 꿈 속에서 보랏빛 새 한 마리, 밤이 새도록 쫓아헤매다 잠에서 깨어났지요,로 시작하는 그 노래. 이제 막 그리움의 초경(初經)을 시작하는 풋소녀의 싱숭생숭을 마치 숨소리 붙들듯 잡아낸 멋진 노래였다. 하지만 '나는 소녀가 아니고 여인 또한 아직은 아니지만, 장발 단속엔 안 걸리니 여자는 분명 여자지요'라고 말하는, 어렴풋한 정체성의 인식은 그녀가 꿈에서 발견한 보랏빛 새처럼,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비치는 달콤한 세상으로 향해 있다.

나는 조용한 여자를 통해, 여자의 마음을 엿보았고, 그녀를 통해 여자의 눈을 만났다. 조용한 건, 다름이 아니라, 그녀를 노크해줄 어떤 존재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의 고요이다. 순결이란 어쩌면, 아직 사건이 시작되지 않은 영화를 보는 설렘과 기대처럼, 두근거리는 퇴폐의 기분이란 걸, 저 노래는 가르쳐주었다. 이연실의 목소리는 감정을 가공하지 않고, 슬픔을 더 보태지 않은, 교태도 섞지 않은 맑은 물소리같이 흘러들어온다. 잡티가 섞이지 않았기에 어쩐지 불안하고 어쩐지 서글프고 어쩐지 외롭다.

대중가요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를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연실의 '소낙비'를 얘기하리라.
이 희한한 번안곡에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의 장면들에서 느끼는 시적인 설렘, 혹은 요즘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등의 판타지 영화의 매력을 생생하고 아름답게 담고 있다. 검은 고깔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와, 그 아래 크레용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세상. 세상을 덮는 소낙비의 눈으로 바라본 풍경들은,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이 그리지 못했던 상쾌하고 따뜻한 세상을 스냅스냅으로 보여준다.

빗소리를 타고 날아다니는 노래, 마녀와 세상이 공존하는 노래, 어쩌면 현실의 최루탄과 억압적 공기를 피해, 꿈으로 달아난 사람들이 바라본 한 바탕의 '헛 것'들. 그게 아프고도 감미롭게 붙들린다. 나는 '소낙비' 만한 음유시를, 이연실같은 음유시인을, 이후 들은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과연 그런지 빗소리에 젖어보시라. (2004, 11, 4)

글 출처 : 옛날다방 (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