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이안 챈트(Gregorian Chant)에 대한 이해

 

 서론(序論)

 

음악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음악은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문화 전체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음악의 역사적 연구는 사회, 겨여제, 정치, 문화, 철학 등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하여 진다. 음악은 알아볼 수 있는 한도의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한 수단으로서 시, 연극, 종교적 문서 등의 문학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역사적 지식의 종류로 살펴보면 형식, 양식, 기법, 미디어(Media) 등으로 알 수 있다. 시대의 구분으로 서양음악은 전(前) 기독교 시대(고대), 중세 '르네사아스(Renaissance)' 시대, '바로크(Baroque)'시대, 고전파(古典派)시대, 낭만파(浪漫派)시대, 현대(現代)로 나우어지기도 한다. 

 

초기의 기독교 음악은 '시편창(Psalmody-찬송가집)'에서 '그레고리안 첸트(Gregorian Chant)'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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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起原)

 

그레고리안 성가는 중세가톨릭교회 64대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1세(St. Grgorius)'의 이름을 딴 것이며, '성 그레고리우스'가 주도하여 각 나라별, 지역별로 부르던 성가를 수집한 다음, 교황청에서 정리한 미사곡이다. 초기 기독교의 단선율 성가의 기원을 살펴보면 특히 중요한 다음 세 지역을 손꼽을 수 있다.

 

① ‘비잔티움(Byzantium)’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Contantinople’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 부른다) ‘힘(Hymn/찬가)’의 융성에 크게 공헌했다.

② ‘시리아(Syria)’는 팔레스티나 근방의 로마제국의 일부였고, 현저한 종교활동의 무대였으며, ‘안티폰(Antiphon/교창)’ 및 ‘리스판서리(Responsory/응창)’이라는 두 가창법의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수행하였다. 

③ ‘팔레스티나(Palestina)’에 있어서의 ‘히브리어(Hebrew Language)’의 종교노래, 즉 ‘히브루 첸트(Hebrew Chant)’는 아마도 초기 기독교 시ᅟᅥᆼ가의 가장 중요하며 가장 대규모적인 원천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레고리안 챈트(Gregorian Chant)

 

그 유구한 역사적 배경을 짧게 설명하자면, '그레고리안 챈트' 혹은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불리는 이 성가(聖歌)는 복잡한 화음구성이나 여러 성부(聲部)를 두지 않는 단 선율로 인해 '플레인 챈트(Plain Chant)'로 불린다. 단순히 설명할 수 없는 '그레고리안 챈트'의 유구한 전통한 다양한 기독교의 성가들, 특히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해 종교음악의 '다성 음악(Poluphony)'의 발전의 주요한 축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양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레고리안 챈트'는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Papa Gregorio Magno, 540~504)'에 의해 카톨릭 교회 최초의 공식 '캔터스 리투리지아(Cantus Liturgia/전례 상가)'로 인준되면서 현존하는 수많은 서양 음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레고리안 챈트'랄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누어지고 분파되었던 당시의 성가를 재정립하면서 하나의 성가집으로 묶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그레고리안 챈트'로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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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음악과 같이 하는 애플잭 -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