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jpg 최초의 순수 우리말 듀오.
창작곡으로 포크열풍 주도.


트윈폴리오를 기점으로 1970년대는 번안곡 위주의 포크 듀오 전성 시대였다. 하지만 남성 포크 듀오 ‘4월과 5월’은 드물게 창작 곡으로 포크 열풍을 주도했다.

 

리더는 중앙대 작곡과 출신 백순진. 70년대 젊은 영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화’ ‘바다의 여인’ ‘등불’ ‘옛사랑’ ‘겨울 바람’ ‘님의 노래’등 히트 송뿐 아니라 그의 실험적인 순수 창작 포크 실험은 의미심장했다.


오랜 세월 속에 그는 잊혀진 존재가 되었지만, 서수남 하청일 쉐그린 윤연선 이영식 이수미 임희숙 김세환 오정선 등 많은 가수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히트 넘버를 선사, 7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초반을 풍미한 히트 작곡가였다.

 

백순진은 주한 미군과 연계된 사업을 했던 부친 백종근씨와 허을려씨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1949년 10월 9일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남산국민학교 2학년 때 이사한 그의 불광동 집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어 어린 시절부터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한 셈이다.
노래를 하면 상으로 10원을 주었던 이모의 영향은 컸다. 서대문국민학교 2학년 때 여 선생님이 노래를 시켜 ‘조개 껍질’을 불렀다. 노래를 듣던 선생님이 감동을 받고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런 일에 놀랬지만 노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다.


휘문고 1학년 때 타임지에서 본 비틀즈의 사진에 매력에 느껴 어머니를 졸라 전기 기타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다. 기타 실력이 늘자 같은 반 친구 3명과 ‘휘문 문학의 밤’에 출연해 비치 보이스의 ‘Sloop John B’를 불러 진명ㆍ창덕ㆍ이화여고생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부러움을 한 몸에 샀던 그는 야구장에서 전기 기타로 응원을 주도해 더욱 유명해 졌다.


고 2때는 친구들과 록 그룹 Angel’s를 결성했다. 종로예식장에서 리사이틀을 열자 구경 왔던 한 관객이 미 8군 무대 아르바이트를 주선해 주었다. 이후 음대 진학을 위해 이교숙, 나운영 교수에게 개인 레슨을 받아 창작의 물꼬를 텄다. 작곡과 진학 후 집에서 기타 레슨을 시작했다.


71년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대학 그룹 사운드 경연 대회에서 2위를 했던 항공대 런어웨이의 기타 연주를 지도했다. 입상 기념 파티 후 베이스 기타 이수영의 소개로 성전다방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의 동생 이수만(서울대생)을 만났다. 음악적 야망이 느껴진 이수만과 듀오를 결성했다. 성대가 약했던 그는 노래 잘하는 파트너가 필요했던 것.


팀 명은 어감도 좋고‘만물이 소생하고 활기가 넘치듯 가요계에 새 바람을 불어 넣자’는 뜻으로‘4월과 5월’로 정했다. 최초의 순 수 우리말 포크 듀오의 탄생이었다. 데뷔 음반에 4월은 백순진, 5월은 김태풍으로 설명한 것은 오해였다. 후에 결성한 포크 록 그룹의 이름도‘들개들’로 정한 것은 외국 것만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항이었다.


“사실 가수가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 나는 부를만한 우리 노래가 없고 팝송만을 선호하는 학생들과 가수들에게 순수 우리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하고 싶었다.”어느날 이수만이 “명동 YWCA 청개구리에 엄청나게 노래잘하는 여자가 있다”고 했다.


양희은이었다. 찾아간 김에 ‘스카보로우 페어’를 연주하자 사회자 이백천이 “기타로 하프를 연주하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이후 청개구리에서 김민기 서유석 김세환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과 교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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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에서 만난 임문일의 주선으로 CBS의 ‘밤과 음악사이’에 출연했다. 첫 방송 출연 후 71년 청평페스티발, KBS TV ‘젊은 세대’ 등으로 인지도를 넓혀 나갔다. 하지만 이수만이 늑막염에 걸려 도중 하차를 해, 기타 레슨생이던 외국어대 불어과 3학년 김태풍을 영입했다. 2기의 첫 무대는 일주일 후 시민회관 공연이었다.


긴장이 되어 진정제를 먹고 무대에 올랐던 김태풍은 이천호텔을 경영했던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DJ 이종환이 주선한 데뷔 음반의 녹음은 이수만과 했지만 재킷은 김태풍과 촬영한 사진으로 발매 된 것.“사실 데뷔 음반은 정식 녹음이 아닌 방송 출연 음원이라 음질이 엉망이다. 멤버 교체가 되었지만 제작비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재녹음을 못했다.”


이 음반이 1972년 4월에 발표된 오아시스 ‘포크 페스티발 1집’이다. 창작한 12곡이 수록된 데뷔 음반에는 4월과 5월이 7곡을, 쉐그린 홍민 이수미 최병걸과 안혜경 등이 5곡을 불렀다. 백순진이 작사 작곡에 편곡까지 직접 맡은 선구적인 앨범이었다. 이후 DJ 이종환과 가깝게 지내며 MBC라디오 ‘청춘 파라다이스’에 고정 출연을 했다.


또한 72년 5월, 몇 곡을 재녹음을 해 ‘포크페스티발 2집’을 발표했다. 그래서 이수만 김태풍이 부른 2가지 버전의 같은 노래가 생겼던 것. 당시 표절곡이란 이유로 잠시 방송 금지되었던 히트곡 ‘화’는 이종환과 방송윤리위 사이에 벌어진 파워 게임의 희생양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6월,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살롱에서 시작된 ‘맷돌’ 공연에 참여했다. 이 공연은 우리노래 찾기 일환으로, 포크의 저변을 넓혔던 노래 운동이었다.


참가했던 백순진 김민기 양희은 서유석 등 포크 가수들은 군사 정권에 의해 억압된 자유와 저항 의식을 포크 송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숨겨진 사실 하나.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맷돌 공연때 ‘딩동댕 지난 여름’가사를 송창식과 백순진이 동시에 다른 곡을 만들어 발표를 했다.


송창식은 대중이 기억하는 히트 곡 버전으로 노래했고, 백순진은 가야금 2대와 통기타 2대가 어우러지는 실험적인 협연 양식으로서 국악 포크를 시도했다..


공식 무대에서 시도된 첫 국악 포크였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한 국악인이 ‘다시는 그런 장난 하지 말라’고 혼을 냈다. 웃어넘겼지만 음악엔 한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험적인 그의 곡은 방송을 거의 타지 못하고 송창식의 노래가 히트되었지만 지금도 그는 당시의 시도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심창균은 당시 보사부장관의 아들. 맷돌 공연이 제약 속에서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컸다.


1973년 이화여대 강당에서 동료 가수 10여명과 불우 이웃 돕기 공연을 열었던 백순진은 내쉬빌, 르네상스, 르시랑스 등에서 노래와 사회를 보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갔다. 73년 12월, 백순진, 김태풍과 고 김정호가 한 TV프로에 출연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김태풍이 탈퇴를 하고 김정호가 새로운 멤버가 되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당시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김정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타 하나를 메고 비원 옆 꽃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던 처지였다. 백순진은 동생의 소개로 김정호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고 단번에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김정호의 신기에 가까운 기타 실력을 본 서유석과 특히 김세환은“사부님으로 모셔야겠다”고 감탄을 했다.


멤버 교체된 3기 4월과 5월은 74년 1월부터 KBS TV ‘젊음의 행진’등 방송 출연과 더불어 월 40여 만원의 개런티를 받고 명동 OB'S 캐빈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어느 날 김정호가 펑크를 냈다. 자신의 힘으로 처음 돈을 번 김정호는 부친에게 월급을 자랑하며 가족이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딴따라 짓 하냐”는 부친의 무시에 좌절한 김정호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 백순진은 “그의 부친이 음악성을 인정하고 감싸 주었다면 김정호는 정말 한국 음악계의 큰 인물이 되었을 재목이었다”고 지금도 아쉬워한다. 이미 김정호의 재능을 인정한 지구레코드는 백순진을 통해 ‘4월과 5월’의 전속을 추진했다.


하지만 ‘작곡가로도 전속하라’는 조항에 김정호가 반발했다. 또 두 사람은 라이프 사이클이 달랐다. 담배와 대마초 흡연에 대한 간섭이 싫었던 김정호는 이종환의 주선으로 유니버샬과 전속 계약을 맺고 2달 만에 팀을 탈퇴했다. 이에 김태풍이 재 합류하면서 음악적인 변화를 꾀했다.


듀오 활동을 유지하면서 포크 록 그룹 ‘들개들’을 결성했던 것. 라인 업은 서울의대 본과 2학년 민병진(현재 서울치과병원 이사장)이 키보드, 연세대 불문과 3학년 김찬이 드럼, 백순진이 리드 기타, 김태풍은 세컨 기타, 이수만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멤버들은 리더 백순진의 행촌동 집 지하실에 모여 연습을 했다.


당시 개인 녹음실까지 있었던 백순진의 집은 포크 가수들의 아지트였다. 창립 기념공연은 74년 7월 13일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렸지만 ‘들개들’은 음반을 남기지는 않았고 ‘4월과 5월’은 74년에 4집까지 발표를 했다. 따라 부르기 쉽고 서정적인 멜로디의 ‘4월과 5월’의 노래들은 젊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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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곡 중의 하나인 ‘화(和)’와 ‘영화와 함께’는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다. 6년 동안 사귀었던 상명여사대 미술과를 졸업한 당시 백순진의 여자 친구이자 현재의 아내를 위한 애틋한 곡이다. 본명이 ‘영화’는 아니었지만 백순진은 그녀를‘화’라고 불렀고 YMCA 수영장에서 만났지만 음악으로 표현하기 어색해 스케이트 장으로 고쳐 노래를 만들었다.


군사 정권의 장발 단속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를 담은 ‘어떤 말씀’은 암울했던 젊은 층에 속 시원한 통쾌감을 안겨주었던 명곡. 하지만 사회의 부조리를 담은 많은 창작 곡이 심의에서 탈락하자 백순진은 좌절하기 시작했다. 대마초 사건은 해체를 불러왔다.


당시 대마초 흡연을 적극 말렸던 이들조차 새벽 5시에 정보부에 끌려가 무조건 대마초 흡연자 20명을 불어야 했던 현실은 노래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게 했다. 이천호텔을 운영했던 김태풍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어울렸던 포크 가수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아준 포크 음악의 숨겨진 후원자.


당시 이천호텔은 포크 가수들이 음악을 논하고 결속을 다졌던 또 다른 아지트였다. 면목이 없어진 김태풍은 노래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지금은 서울에서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백순진은 74년 말, 오토프러덕션을 창립 제작자로 변신해 오정선, 영주와 은주, 서미숙, 박형철등을 키웠다.


현재 활동을 하는 4월과 5월의 김영진, 이지민 듀오의 원래 이름은 하야로비. 백순진의 기획으로 4기로 거듭난 이들은 히트곡 ‘장미’로 동양방송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팀을 해체 시킨 아픔을 가지고 있다. 작곡,작사,편곡,판매,홍보 등 일체를 혼자 도맡았던 백순진은 부도를 맞으면서 기흉으로 건강이 나빠져 3개월간 입원을 했다.


그래서 퇴원 후에는 부친의 노스웨스트항공 총대리점인 샤프항공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뉴욕에서 국제 항공업체인 샤프 익스프레스를 운영하며 코알라프로덕션의 고문으로 최근 심수봉의 뉴욕 공연을 주선하며 음악 비즈니스를 재개했다.


백순진, 김태풍의 아름다운 포크 멜로디에 자유로웠던 70년대 젊은 영혼은 없었다. 작년부터 불기 시작한 7080세대 음악 부활 붐 속에 그들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민기, 김의철, 방의경, 현경과 영애, 한대수, 윤연선 등 70년대 중요 포크 가수들의 이름과 음반이 부활되고 있는 지금, ‘4월과 5월’백순진의 음악 활동은 재평가되어야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글 :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