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로진스키(Artur Rodzinski)
■ 아르투르 로진스키, Artur Rodzinski (January 1,1892 – November 27,1958)
유고슬라비아 태생의 미국의 지휘자.
아르투르 로진스키는 다이내믹하고 정열적인 연주가 특징인 명 지휘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러시아음악에는 정평이 나 있다.
그는 1984년 1월 2일, 폴란드인을 양친으로 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스플리트(Split)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비인 대학(University of Vienna)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다시 비인 음악원에 들어가 리스트의 제자였던 에밀 폰 자우어(Emil von Sauer, 1862-1942)와 예지 랄레비치(Jerzy Lalewicz, 1875-1951)에게 피아노를, 프란츠 샬크(Franz Schalk, 1863-1931)에게서 지휘법을, 조셉 마르크스(Joseph Marx, 1882-1964)와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1878-1934)에게 작곡을 배운 뒤에 지휘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처음에 루보프 합창단의 지휘자로서 출발하였다가 1920년 바르샤바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뒤 1923년부터는 바르샤바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는데, 그때 그의 연주를 들은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 1882-1977)에게 인정받음으로써 1926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1929년까지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부지휘자로 있으면서 커티스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1929 - 1932년 동안에는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니, 1933 - 1943 년 동안은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1943 - 1947 년 동안은 뉴욕 필하모니, 1947 - 1948년 동안은 시카고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있었다. 이런 경력으로 보다시피 그는 미국 내의 유수한 오케스트라는 모조리 거쳤다. 그리고 1937년에는 토스카니니의 의뢰로 NBC 교향악단의 트레이너러더 있었다. 그는 시카고 교향악단을 그만둔 뒤로는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객원지휘자로서 크게 활약하였는데, 1958년 시카고 가극장에서 바그너의 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and Isolde>를 공연중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로진스키는 성미가 과격했는 바, 스토코프스키나 토스카니니에게 발탁되어 트레이너가 될 정도였으므로 그 훈련도 사뭇 엄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로진스키는 그런 것들이 화가 되어 단원들과의 트러블이 잦았으며, 어느 오케스트라와도 오래 인연을 맺지 못하고 만년에는 프리가 되었다.
그의 지휘법은 영화 "카네기 홀"에서도 소개가 되었지만, 아주 스케일이 크고 다이내믹하며 정열적이면서도 직선적인 스타일이었다. 그의 레퍼토리는 아주 넓어서 고전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든 곡에 손을 대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러시아 현대음악에 권위가 있었다.
레코드는 LP초기에 많이 나왔었지만 지금은 모두 폐반되었다. 미국 CBS(CBS Records International), 컬럼비아(Columbia Records) 레이블에서 많이 나와 있는데, 후에 웨스트민스트(Westminster) 레이블로 이적하고 나서도 런던 필하모니를 지휘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을 선두로 한 명반이 많다.
이 앨범은 레너드 번스타인반과 더불어 이 작품의 대표반으로 꼽힌다.
특히 동 회사의 '라버러토리시리즈'라고 하는 수록 시간을 짧게 하고, 고 레벨 커팅을 하여 특별히 손질한 음반의 음질은 모노럴 레코드 말기의 오디오 매니어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코다이의 오페라 <하리 야노슈>와 프로코피예프의 >세 개의 오렌지에의 사랑>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챠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4번>,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등이 카달로그에 남아 있다.
글출처: 네이버 블로그 '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