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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

오작교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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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humb-phinf.pstatic.jpg Rafael Kubelik(1914 – 1996)

 

라파엘 쿠벨릭(본명 라파엘 예로님 쿠벨릭)은 1914년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릭 (Jan Kubelík, 1880~1940)의 아들로 체코 비호리(Býchory)에서 태어났다.

 

라파엘의 어머니는 헝가리의 백작 부인이었던 안나 줄리 마리 셸 폰 베세니외(Anna Julie Marie Széll von Bessenyö)이다.

안나는 의사와 오페라 가수를 부모로 두었지만 얀 쿠벨릭과 결혼 전 헝가리 귀족과 결혼해 후작의 칭호를 얻고 있었다.

부부는 5명의 딸, 3명의 아들을 두었고 지휘자가 된 라파엘 이외에 라파엘의 누나인 아니타(1904년생)도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소년 쿠벨릭의 음악적인 환경은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글을 읽고 쓰게 되기 전에 먼저 악보를 읽을 줄 알게 됐다.

그는 부모를 졸라 베토벤 교향곡 전곡의 악보를 구입했다. 그리고 학교 수업 중이나 늦은 밤 자기 전에 침대에서 악보를 읽으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쿠벨릭은 13세 때 정식으로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휘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아버지 얀 쿠벨릭의 반주 피아니스트로 유럽과 미국 연주 여행에 동행했다. 이 무렵 라파엘은 아버지가 10편의 콘서트에서 30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시리즈 콘서트에서 지휘를 맡기도 했다.

 

쿠벨릭이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14세 때였다.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과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말러의 <교향곡 1번>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들 외에 쿠벨릭이 영향을 받은 지휘자로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클레멘스 크라우스,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등이었다.

 

이후 쿠벨릭은 프라하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 지휘를 배웠다. 1934년 자신이 직접 작곡한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을 완성시켜 작곡과를 졸업하고, 드보르작의 <오텔로> 서곡을 지휘해 지휘과를 이수했다. 또 파가니니의 작품을 연주해 바이올린과 수업을 각각 마쳤다. 그리고 그해 스무 살의 나이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데뷔했다. 
 

쿠벨릭은 1939년 브르노 국립극장(Národní divadlo Brno)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1942년, 체코 필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

체코의 명지휘자 바츨라프 탈리히(Vaclav Talich, 1883-1961)가 나치 정권에 저항해 해임된 뒤 공석이었던 자리를 그가 메운 것이다. 같은 해, 쿠벨릭은 체코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류드밀라(라라) 베르틀로바(Ludmila Bertlova, 1914-1961)와 결혼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이 성립되자 체코의 공산화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쿠벨릭은 고민에 빠졌다.

 

한 번 더 나치와 같은 정치적인 격랑에 휩쓸리기는 싫었다. 에든버러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Don Giovanni>를 지휘하고 있었던 쿠벨릭은 그대로 영국에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쿠벨릭은 영국, 멕시코, 남미에서 지휘하고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좋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쿠벨릭은 1949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미국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쿠벨릭은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원래 시카고 심포니는 음악 감독직을 푸르트뱅글러에게 제안했었다. 그러나 미국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가던 토스카니니, 루빈슈타인, 호로비츠 등의 반대로 푸르트뱅글러의 취임은 실현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치와 무솔리니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던 분위기 탓이다. 푸르트뱅글러는 자기 대신에 쿠벨릭을 추천했다. 이 때문에 쿠벨릭은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후에도 푸르트뱅글러의 안티였던 시카고 트리뷴의 여성 음악평론가 클로디아 캐시디 등에게 계속해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

 

쿠벨릭이 부임하기도 전인 1949년, 캐시디는 스코틀랜드에서 쿠벨릭의 지휘를 듣고 “피상적이고 레퍼토리가 한정돼 있다”고 악평을 퍼부었다. 쿠벨릭이 레퍼토리를 넓히면 난해한 현대음악을 많이 연주했다고 공격 당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이어서 흑인 아티스트를 초청했다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시카고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쿠벨릭은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에서 쿠벨릭은 적을 많이 만들었다.

1951년 한해에만 4명의 수석주자들을 해고하고 네 명의 단원을 강등시켰다.


시카고 심포니와 결별하며 바그너의 <파르지팔, Parsifal>을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린 쿠벨릭은 에두아르트 반 베이눔(Eduard van Beinum, 1901-1959)과 공동으로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미국 투어를 이끌었다.

 

1957년과 1958년 두 해동안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은 쿠벨릭은 야나체크(Leoš Janáček, 1854~1928)의 오페라 <예누파, Jenůfa>를 영국 초연했고, 상연하기 힘들기로 유명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 Les Troyens>을 무대에 올리며 기염을 토했다.

 

베르디의 <오텔로, Otello>,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도 대단한 호연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비첨(Thomas Beecham, 1879~1961)의 고약한 여론몰이식 공격에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은 쿠벨릭은 3년 만에 사임하고 만다.


1960년 쿠벨릭은 ‘구스타프 말러 메달’을 수상하며 말러 해석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수석지휘자로 재임한 바이에른  송교향악단에서의 활동은 쿠벨릭에게 가장 중요한 경력 중 하나다. 쿠벨릭의 임기 동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일본(1965)과 미국(1968)으로 대규모의 해외 연주여행을 했다. 또 도이치 그라모폰, CBS 등에서 여러 편의 빼어난 녹음 작업을 통해 이 오케스트라를 세계적인 수준의 명악단으로 격상시켰다.  

 

이 무렵 1963년 쿠벨릭은 호주 출신 소프라노 엘시 모리슨(Elsie Morison)과 재혼했다. 엘시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스메타나의 두번째 오페라 <팔려간 신부,  Prodaná nevěsta>에 주역을 맡았었다. 쿠벨릭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남긴 말러 교향곡 전집(DG) 중 교향곡 4번은 엘시의 마지막 녹음이었다.

 

1972년부터 쿠벨릭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겸임하게 됐다. 이 포스트는 메트의 매니저인 외란 겐텔레가 1971년 새롭게 마련해 쿠벨릭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겐텔레와 절친이었던 쿠벨릭이 메트에서 펼칠 다양한 오페라들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972년 겐텔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 쿠벨릭이 메트에 있어야 할 이유는 점차 희박해졌고, 결국 1974년 메트 음악감독 자리를 사임했다.

 

시카고 심포니도 그렇고, 뉴욕 메트로폴리탄도 그렇고, 쿠벨릭은 미국과는 그리 좋은 인연이 없는 듯하지만, 그가 남긴 음반들은 애호가들에게 재평가 받고 있다.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등 시카고 심포니 시절 쿠벨릭이 머큐리 레이블에서 녹음한 10장의 음반을 들어보면 거침없고 패기 넘치는 쿠벨릭 젊은 날의 초상을 엿볼 수 있다. 또 쿠벨릭은 보스턴 심포니와는 스메타나 <나의 조국, Má Vlast>(DG)이라는 걸출한 음반을 남겼다.


쿠벨릭은 1973년 스위스 국적을 얻었고, 이후 1986년 지병이던 관절염과 통풍이 악화돼 지휘대에서 은퇴했다. 작곡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도 은퇴를 재촉했다. 쿠벨릭은 두 곡의 오페라 <베로니카, Veronica>와 <코르넬리아 파롤리, Cornelia Faroli>, 3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 3곡의 레퀴엠을 썼다.

 

세 번째 레퀴엠은 첫 부인이었던 류드밀라 베르틀로바의 죽음을 겪고 쓴 것이었다. 그러나 조국의 정치적인 상황이 운명적으로 쿠벨릭에게 손짓했다. 1989년, 체코에서 민주혁명이 일어나자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강한 요청으로 1990년 ‘프라하의 봄’ 음악제에서 42년만에 체코 필을 지휘해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연주했다. 

 

체코 필하모닉의 종신 명예지휘자라는 영예를 얻은 쿠벨릭은 1991년 그 해 가을 체코 필 지휘대에 다시 등장해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지휘했다. 이 무대 전 같은 해 쿠벨릭은 시카고 심포니의 100주년 갈라 콘서트에 숄티, 바렌보임과 함께 등장하여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쿠벨릭은 1996년 8월 11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 쿠벨릭의 지휘 세계는 강렬하고 다이내믹했다. 사려깊고 솔직하며, 명료하면서 애매하지 않은 해석이었다. 간혹 자연스러운 흐름을 표현하다가 리듬이 느슨해진다든지 과도해 보이는 루바토로 음악의 힘을 빼는 경우는 옥에 티였다. 

 

조국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를 빼어나게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의 해석에도 강했다. 옛 체코인 보헤미아를 무대로 하고 있는 베버 <마탄의 사수>라든지 체코에서 초연됐던 말러의 교향곡들은 빼어나다. 그의 레퍼토리는 신성로마제국의 광대한 영토와도 같았다. 특히 베토벤, 모차르트 등 독일 오스트리아 주류 음악의 해석에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첼리비다케와 달리 쿠벨릭은 음반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음반은 종종 콘서트홀에서 들려오는 것 이상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쿠벨릭은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를 기리는 '얀 쿠벨릭 협회'를 설립해 누나인 아니타와 더불어 SP 시대 체코인의 연주를 복각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쿠벨릭의 초기 HMV 레코딩 가운데는 체코 필을 지휘해 드보르자크, 스메타나, 야나체크를 녹음한 것이 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드보르자크, 브람스 곡들과 바르토크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베토벤과 브람스의 <협주곡>들을 녹음했다.

 

초기 데카에서는 말러 <교향곡 1번>, 브람스 교향곡 전집, 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 <9번>, <첼로 협주곡> 등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필하모닉과의 녹음도 있다. 시카고 심포니 음악감독 시절은 머큐리 리빙 프레즌스 시리즈의 뛰어난 녹음기술로 보존됐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과 <6번>,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브람스 <교향곡 1번>, 스메타나 <나의 조국>, 그 외 힌데미트, 바르토크, 야나체크, 쇤베르크, 블로흐의 작품들이 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말러 교향곡 전집(DG)은 쿠벨릭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쿠벨릭의 말러는 아름답지 않다. 말러 음악에서 그의 주목을 끈 부분은 서정적이거나 내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말러가 즐겨 쓰는 극적인 성격이었다. 쿠벨릭의 말러 해석은 표정이 풍부하고 예리해서 설득력을 가진다. 쿠벨릭은 데릭 쿡(Deryck Cooke) 버전의 말러 <교향곡 10번>을 녹음하지 않았다. 평소 작곡 중에 곡을 자주 바꾸는 말러의 태도를 보았을 때, 최종 버전은 상당히 달라져 있을 거란 이유에서였다.
 

쿠벨릭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DG)은 9개의 오케스트라를 따로따로 녹음해 화제가 됐다. 1번은 런던 심포니, 2번은 콘세르트허바우, 3번은 베를린 필 4번은  이스라엘 필, 5번은 보스턴 심포니, 6번은 파리 오케스트라 7번은 빈 필, 8번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9번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녹음했다.

 

슈만 교향곡 전집 두 종(베를린 필 DG,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Sony), 브람스 교향곡 전집 두 종(빈 필 Decca,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Orfeo), 드보르자크 교향곡 전집(베를린 필, DG), 모차르트 후기 6대 교향곡, 브루크너 교향곡 3번, 4번(Sony), 8번, 9번(Orfeo)이 있다.

 

스메타나 <나의 조국>은 줄잡아 6종 이상의 녹음을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시카고 심포니(1952, 머큐리), 빈 필(1958, Decca), 보스턴 심포니(1971, DG),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1984 실황, Orfeo), 체코 필(1990 실황, 수프라폰/덴온, 1991실황 NHK/알투스) 등이다.

 

오페라로는 베버 <마탄의 사수>, <오베론>, 베르디 <리골레토>, 바그너 <로엔그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파르지팔>, 그 외 서곡 전주곡집, 야나체크 <신포니에타>, <타라스 불바>, <글라골 미사> 등이 있으며, 아우디테 레이블 등에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실황녹음이 계속 발매되고 있다. 이들 실황녹음은 스튜디오 녹음을 상회하는 뜨거운 열기가 있어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글: 류태형 / 음악 칼럼니스트 -

 

자료출처 : 네이버 블로그 '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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