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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오작교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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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福音)을 의미하는 가스펠은 오랜 세월에 걸친 미국 남부 노예제의 억압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흑인들은 성서와 그 복음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데서 영적(靈的)인 상승과 구제를 꾀하고자 했다. 거기에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미래의 희망이 존재했던 것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카톨릭 이외의 비국교도인 특히 아이삭 와츠(Isaac Watts)라는 찬송가 작곡가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가스펠과 영가(靈歌)의 레퍼토리가 발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유명한 가스펠 송으로는 'Joshua fit the battle of Jericho' 'Go down, Moses' 그리고 나중 루이 암스트롱이 불러 인구에 회자된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등이 있다.

 
19세기 동안 대규모로 전개된 남부 노예흑인들의 '불법적인' 북부로의 이동과 겹치면서 가스펠은 미 전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미리 밝혀둘 것은 가스펠은 스피리추얼(Spirituals) 이른바 흑인영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교회에 머물던 가스펠이 외부 속세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내시빌 소재 피스크(Fisk)대학의 가스펠 그룹 주빌리 싱어스(Jubilee Singers)가 미 전역 그리고 세계 공연을 벌이면서부터였다.
 
물론 해방된 흑인노예들이 주축이었던 이 그룹은 지금도 널리 애창되는 'Swing low, sweet chariot'(에릭 클랩튼도 이 곡을 연주했다)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등을 불렀다. 비록 초기 악극형태인 민스트럴(Minstrel) 쇼에서 주빌리 싱어스의 음악을 들을 청중은 대부분 백인이었지만, 가스펠이 존재를 세계화하는데 그들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백인형의 상업적이고 '창백한' 가스펠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가스펠의 진정성은 흑인교회에 존재하는 열정적이고 재즈향기가 나는 창법에 있었다. 흑인인권이 상승되어가던 1930년대가 돼서야 사람들은 '오랜 영가를 화려한 보컬로 치장하고 침례교 목사의 증언 설교를 곁들이는' 전통적이고 진정한 가스펠을 듣게 되었다. 흑인교회에서 레코딩된 제이 엠 게이츠(J. M. Gates) 목사와 그 형제들의 노래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열정적 가스펠 톤을 알게 되었고 이어 애리조나 드레인즈(Arizona Drains)와 빌리 화이트 존슨(Billie White Johnson)과 같은 진짜 가스펠 가수들이 속속 레코딩되었다.
 
이 시기에 기억해야 할 인물은 '가스펠의 아버지'(Father Of Gospel Music)로 불리는 조지아주 출신의 토마스 에이 도시(Thomas A. Dorsey)다. 조지아 톰(Georgia Tom)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그는 블루스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가스펠의 영역에 천착, 대중적인 스타일의 복음성가를 1000곡 이상 써냈다. 가스펠이란 용어도 실제로 그에 의해 만들어지고 널리 전파되었다는 것이 정설. 그의 음악은 애초 홀대되었지만 곧 흑인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동시에 세속적인 음악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그가 작곡한 가스펠 송 'Peace in the valley' 'Take my hand, precious Lord' 등은 2세기 전 아이삭 와츠 이상으로 영향력을 떨쳤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가스펠이 보다 세속적인 블루스 형성에 거름 역할을 했지만 여전히 교회 분위기가 강해 블루스로 대표되는 어떤 흑인음악보다도 '보수적인' 성격을 보유하고있다는 점이다. 단지 흑인음악이라는 이유로 포괄적 각광을 받지 못하던 가스펠 송은 마침내 토마스 에이 도시가 발굴한 '가스펠 여왕'(Gospel Queen)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에 의해 장벽이 깨졌다. 그녀가 1953년 취입한 싱글 'Move up a little higher'는 무려 8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녀와 함께 'This train'와 같은 노래로 가스펠과 블루스를 혼합한 시스터 로제타 타프(Sister Rosetta Tharpe), 마리 나이트(Marie Knight), 브라더 존 셀러스(Brother John Sellers)도 가스펠 대중화에 공을 세웠다. 1940년대 이후 가스펠은 재즈 영역에서 논의되는 고상한 이미지를 넘어 '연예'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고 노래부르기도 하모니를 강조, 그룹코러스가 받쳐주는 가운데 고조된 부분에서 리드 싱어가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여기에는 패이머스 와드 싱어스(Famous Ward Singers)와 알버티나 워커스 캐러반(Albertina Walker's Caravan)과 같은 그룹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와 더불어 가스펠 대중화에 아폴로(Apollo) 킹(King) 그리고 스페셜티(Specialty)와 같은 군소 가스펠전문 레이블과 라디오도 한몫 했음은 물론이다. 하모니 중심의 가스펠은 대중음악 영역에 파고들어 1950년대의 아카펠라와 두왑(Doo wop)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소울 스터스(Soul Stirrs)에서 활동한 당대 최고 스타 샘 쿡(Sam Cooke)와 나중 드리프터스(Drifters)의 간판이었던 클라이드 맥패터(Clyde McPhatter) 등은 가스펠에서 팝으로 전향했다.
 
1960년대의 소울(Soul)은 가스펠에서 팝으로 갈아탄 가수들인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윌슨 피켓(Wilson Pickett), 솔로몬 버크(Solomon Burke) 등이 완전 주도했다. “제대로 노래하는 흑인가수들은 모조리 교회에서 가스펠을 부르던 가수들”이란 말이 이때 나왔다. 흑인 가스펠 음악의 상업적 혈통을 규정하는 말이 곧 소울인 셈이다.
 
'샤우트' 그리고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반복되는 블루스 성향의 구르는 듯한 '피아노(또는 교회 오르갠) 리프'는 가스펠 사운드의 특징을 이룬다. 때문에 가스펠은 '재즈리듬에 블루스정신'을 소유한 영가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패턴은 레이 찰스(Ray Charles),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메이비스 스테이플스(Mavis Staples)에서 곧잘 발견된다. 이 또한 소울이 가스펠 사정권에 들어있음을 말해주는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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