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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의 세계 - 쥬세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오작교 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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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tini.jpg 쥬세페 타르티니, Giuseppe Tartini(1692~1770)

타르티니는 18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흥미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인데, 현재는 연구가 가장 덜 된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전해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르티니의 삶이 매우 유별났기 때문에 전설과 같은 얘기가 많이 난무하고 있어서 그의 생애를 연구하는 데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타르티니는 비발디와 동시대를 살아간 젊은 이태리인들 가운데 가장 재능이 있고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크 시대와 고전주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성숙한 이태리 바로크 협주곡과 소나타의 형식을 강화시켰으며, 때로는 보다 가볍고 경쾌한 "갤런트" 양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  

타르티니는 이스트리아 반도의 파라노(Pirano)에서 1692년에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난 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유고슬라비아(현재는 슬로베니아)영토에 귀속되었다.

그는 부모의 소원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708년 파도바로 갔으나 부모의 기대와 달리 그는 1709년 파도바 대학의 법학부에 등록했을 뿐 아니라, 당시 뛰어난 검객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또 1710년에는 성직자의 신분을 숨기고 엘리자벳타 프레마조레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파도바 주교 코르나로 추기경의 노여움을 샀다.

결국에는 파도바를 떠나 아무도 모르게 아시지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 수도원에서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신부에게 음악을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파도바 교회당국의 용서를 받고 1715년에 파도바로 돌아와 아내와 다시 결합하게 된다. 

  그 얼마 뒤 그는 베니스의 한 콘서트에서 자신의 기교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고독한 자기 유배 생활을 해왔다는 점 때문에 유명해진 바이올린의 거장 프렌체스코 마리아 베라티니(1690-1768)가 연주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베라치니의 연주를 듣고 나서 연주자로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다시 아내를 홀로 남겨 놓고 '가출'을 감행한다. 

그는 마르케 지방으로 내려가서 오로지 바이올린 연주 연마와 바이올린 음향연구에 몰두하여,  1720년경 타르티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구축하였으며, 1721년 성 안토니오 대성당의 제1바이올리니스트 겸 음악 감독을 맡게 된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이런 지위를 맡게 된 것은 그가 누구나 인정하는 상당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며, 또 임용계약조건에는 외부의 연주도 언제든지 맡을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러한 조건은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도 맞아 떨어졌다.  

그 후 1723년에서 1726년까지는 파도바를 벗어나 멀리 프라하의 킨스키 백작 가문에서 활동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베네치아에서 주인집 여인과의 불륜의 관계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바람에 여인의 위협을 피해 멀리 도망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1727년인지 1728년에 타르티니는 파두아에 바이올린 학교를 세웠는데, 그 학교는 거의 전 유럽에서 학생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국제 학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타르티니의 목표는 단지 기교적인 측면에서 거장성을 키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가 좀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현악 연주에서의 표현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두 측면 모두 타르티니 자신의 소나타와 협주곡에 존재하지만, 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표현력 있는 작곡가로서 그가 발휘한 탁월한 재능이다.  

타르티니는 1765년 파두아의 성 안토니 오케스트라를 그만두었으며, 그후 부터는 자신의 연주, 교육, 작품을 통해서 바이올린의 기교와 레퍼토리를 만들어내는데 지속적으로 공헌했다.   

19세기 후반 이후 타르티니의 이름은 무엇보다도 단 하나의 작품,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와 연관되어 알려져 왔다. 그 작품은 그의 사후인 1798년 파리에서 출판되었는데 언젠가부터 "악마의 트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작품의 작곡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그것이 출판되기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1756년에 쓴 "바이올린 연주회의 기초 원리에 대한 연구"에서 타르티니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 작품의 일부를 사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소나타는 여전히 19세기에 출판된 것으로 연주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는 심지어 더불 스톱(현악기에서 동시에 여러음을 내는 주법)조차 제거해 버릴 정도로, 그 양식의 근본적인 측면을 왜곡한 것이었다. 대략 135곡 이르는 타르티니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모두 "악마의 트릴"과 같은 운명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그 작품들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협주곡과 소나타들에서, 특히 1740년 경부터 타르티니는 점점 더 자신의 상상력 풍부한 기술을 느린 악장에 쏟아부었다. 이제 느린 악장들이 점점 더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우리가 비발디나 로카텔리, 혹은 타르티니 자신의 제자인 피에트로 나르디니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의 주된 원리는 인간 목소리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가 몬테베르디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의 도입 부분을 타르티니의 자필 악보들에서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빈번하다.

타소와 같은 다른 시인들도 타르티니에게 음악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했다.

타르티니가 파두아에서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그의 음악적 양식은 베니스적인 것이었다.
비록 그가 그것을 늘 고수하지는 않았지만  알비노니와 비발디의 협주곡들에서 확립되었던 3악장 패턴을 선호하였다.

타르티니에게서 아주 서정적인 음악이 느린 악장들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쓴 칸타빌레 양식의 훌륭한 예들은 빠른 악장의 독주와 투티 부분에서도 모두 나타난다. 당시 통용되었던 사상의 흐름에 따라, 타르티니는 자연을 모든 진리의 원천으로 여겼다.

이것은, 종종 베니스 곤돌라 사공의 춤과 노래에 의존했던 그의 음악에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인간 노력의 결실인 "예술"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그의 이론적 저작에도 반영되어 있다.  

1740년 베르가모 연주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팔에 부상을 입고 난 후부터는 오로지 파도바에만 머무르다가 1770년 2월 26일에 숨을 거두었다.

1770년 북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던 찰스 버니는 7월 30일 파도바에 도착했는데, 타르티니가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그의 '음악기행'에 기록하고 있다. 또, 다음해인 1771년 이곳을 방문한 모차르트 부자(父子)도 타르티니를 생전에 만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타르티니는 바이올린을 거의 독습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른 대가였다.
또 당시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를 비롯한 뛰어난 음악이론가들과 유명한 수학자 오일러와도 교신을 한 것을 보면, 그는 연주 및 음악이론뿐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깊은 지식을 갖춘 지성인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가 1754년에 쓴 『진짜 화성 과학에 따른 음악론』(Trattato di Musica secondo la vera scienza dell’armonia) 에는 그가 발견한 '제3의 소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 저서는 음악보다는 오히려 수학이나 기하학, 물리학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타르티니의 음악은 비발디나 알비노니와 같은 베네치아의 음악전통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코렐리의 음악에서 보이는 완벽하게 구성된 고전적인 면과 나폴리 오페라에서 보이는 성악적인 면을 물려받은 듯한데, 그 속에는 음악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아펫토(affetto), 즉 '애정'이 담겨있다. 

<악마의 트릴>도 마찬가지이다.
이 곡은 단순히 난해한 기교나 보여주는 작품만은 아니다.
이 곡에는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파토스(pathos)가 풍부하게 스며있다.


이 곡은 타르티니가 아시지(Assisi)에서 수도원 생활을 하던 시기인 1713년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의 생애의 후반기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타르티니 예술작품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데, 타르티니의 다른 작품 속에는 「악마의 트릴」의 씨앗이 곳곳에 이미 뿌려져 있다.
다른 작품들은 마치 「악마의 트릴」을 탄생 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글 출처 : 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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