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Johann Christoph Friedrich Bach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Johann Christoph Friedrich Bach (1732 – 1795)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두 번째 아내인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와의 사이에 라이프찌히에서 태어났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아들로서 음악가가 된 4명의 아들 중 세 번째 아들이며 뷔케부르크의 바흐라고 불린다. 그는 아버지 J.S.바흐로 부터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또한,아버지 J.S.바흐의 사촌 요한 엘리아스 바흐에게도 배웠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수수하고 조용하게 일생을 보냈으며 바흐家의 인물 중에서 제일 오래 장수했다.
아버지 J.S.바흐가 사망한 직후인 1750년 초에 그는 뷔케부르크(베스트팔렌 지방)의 샤움부르크 리페 백작의 궁정에 들아가 죽을 때까지 봉직했다. 그는 그곳에서 1777년까지 빌헬름 백작을,1777년부터 1787년까지는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백작을 섬겼으며 그 후에는 빌헬미나 여섭정(女攝政)을 섬겼다.
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 양식의 음악에 몰두했으나,악사장 안젤로 콜로나(Angelo Colonna)와 작곡가 세리니(G. B. Serini)가 본국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글룩이나 하이든(같은 세대의 음악가),홀츠바우어 (Holzbauer)나 모짜르트 등 독일의 작품을 자신의 연주 곡목에 포함시켰다. 이 곳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음악 활동을 했고 작품도 다방면에 걸쳐 있다.
바로크 후기 양식에서 전기 고전주의 양식으로 전환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그의 작품은 인기가 좋았지만 시대를 앞서간 것은 아니었고 다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그쳤다. 후기 교향곡들 정도가 하이든 교향곡과 양식상 유사함을 보일 뿐이다.
모테트,오라토리오(시인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가 가사를 씀),피아노 소나타,실내 칸타타,실내악 등도 작곡했다.
1771년부터 1776년 사이에 이곳에 체류했던 문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그를 위하여 오라토리오 예수의 어린 시절(Kindheit Jesu,1773)과 라자로의 소생(Die Auferweckung des Lazarus,1773), 그리고 각종 칸타타의 텍스트를 썼다.
1778년 그는 런던에 있던 동생 요한 크리스찬을 방문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뷔케부르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며,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신포니아는 상실되어 버렸으나 최후의 작품인 B♭장조(1794)는 고전파 시대의 걸작으로서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이었다.
만년의 15년 동안에 작곡된 작품,특히 기악곡(소나타,실내악곡, 협주곡)에서 그는 전처럼 배다른 형인 칼 필립 엠마뉴엘이나 북부 독일 거장들의 영향을 나타내지 않게 되었으며,동생인 요한 크리스찬의 양식과 고전주의적인 균정(均整)에 접근하고 있다.
이렇게 왕실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별탈없이 잘 지내던 그에게도 불행의 시간이 찾아 온다. 1793년 보헤미아 음악가 노이 바우어가 궁정에 부임하면서 권력다툼이 시작 되었는 데,노이 바우어는 보헤미안 특유의 화려한 음색을 선보여서 귀족들의 관심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그 에게 밀려났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던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는 심한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는 데,설상가상으로 아버지처럼 따르던 칼 필립 엠마뉴엘 바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795년에 눈을 감았다.
그의 아들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Wilhelm Friedrich Ernst, 17591845)도 음악가가 되었는데,그를 끝으로 하여 요한 세바스찬의 남자 자손은 끊기게 된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는 평생을 한 곳에 머물렀지만 다채로운 음악세계를 보여 준 바흐家의 또 한명의 위대한 음악가였다.
글 출처: 네이버 블로그 빈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