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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위대한 음악가 Paul Mauriat

오작교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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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Mauriat


많은 사람들이 폴 모리아의 음악을 들려주면 익숙해하면서도 정작 그의 이름이 Paul Mauriat나 그에 일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저 "방송 시그널 뮤직이나, 화면조정 시간, 백화점 매장, 몇몇 CF 등에서 듣던 음악이네!" 할 뿐이다. 그러나. 그저 편하고 쉽게 들릴 수도 있는 그의 음악 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잠시 우체국직원이기도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Paul Mauriat는 1925년에 프랑스 남부에 마르세이유(Marseilles)에 있는 클래식 음악 가정에 태어났다. 아마츄어 음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Paul Mauria를 4살부터 Academy of Music in Marseilles(the Conservatory of Marseilles)에서 음악공부를 가르치는 데, 1935년 그가 10살 되던 해에 가족들이 Paris로 이주하게 되면서 파리음악원(the Conservatoire in Paris)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14살에 그는 수석졸업장과 함께 탄탄한 클래식 기초를 가지고 졸업한다.졸업 후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그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 것은 오히려 팝음악과 재즈가 되어갔다. 파리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17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악단을 조직해 몇 년 동안 유럽 지역을 공연하며 다녔다.

이후 그는 얼마 전 타계한 Franck Pourcel(프랑크 푸르셀)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 등을 거치며 계속 활동을 해오다가 한 음반 매니져의 제의로 샹송의 거장 Charles Aznavour의 앨범에 편곡과 지휘자로 참여하면서부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Paul Mauriat



30대 중반이 된 그는 1960년대 들어와 자신만의 독특하고 현대적인 비트감을 지니면서도 멜로디를 선명하게 해 주는 편곡스타일이 확립되어가며 자신의 앨범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가 작곡한 "Rendez-vous au Lavandou", "La longue marche" 등의 곡이 전국적 히트를 하게 되어 작곡가로도 활약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자국인보다는 미국이나 이탈리아 음악가들을 더 대접해 주는 분위기여서 폴 모리아는 1963년경 Del Roma라는 가명으로 다른 유명한 프랑스 음악가들인 Franck Pourcel(프랑크 푸르셀)과 Laymond LeFevre(레이몽 르페브르)와 함께 공동으로 "Chariot(샤리오)"라는 샹송을 발표한다.


이 곡은 Petula Clark이라는 가수에 의해 유럽 전역에 히트를 기록했고, 다음해 Norman Gimbel과 Arthur Altman에 의해 영어로 개사되어 "I will follow him"이라는 곡으로 재탄생되어 Little Peggy March에 의해 미국 챠트 1위를 기록하며 폴 모리아의 최초의 히트곡이 된다. 이 곡은 바로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Sister Act'에 삽입되어 다시 대히트를 했던 바로 그 곡이다.

1965년 드디어 폴 모리아는 Philips 레이블에 전속 계약을 하며 "Le Grand Orchestre de Paul Mauriat"라는 이름으로 40세가 되서야 완전한 솔로 아티스트로 독립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솔로 아티스트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다른 샹송 가수들의 작곡/편곡자로 활약하는데 이 시기엔 Mireille Mathieu의 뮤직 디렉터가 되어 "Mon credo", "Seuls au monde"등 그녀의 히트곡을 작곡해 준다.

1967년, 그는 `Eurovison Song Contest'(1967년에 열린 제 12회 대회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에서 자신은 매우 좋아했으나 4위에 그치고 만 룩셈부르크 대표의 Vicky Leandros라는 여가수의 "L'amour est bleu"라는 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편곡,연주하여 취입한다. 당시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이 짧고 간단한 노래가 바로 1968년 빌보드 챠트 1위를 5주 동안이나 지켰던 세계적인 연주곡이 되어버린 "Love is blue"였다.

그는 이 곡으로 말미암아 빌보드 챠트 1위를 한 유일무이한 프랑스 아티스트가 되었다. '68년 한해 동안 이 곡이 수록되어 세계적으로 발매된 라는 앨범은 200만장이나 팔렸고 이후 600만장 넘게까지 팔렸다.

다른 연주 아티스트에 비해 당시의 최신 곡들과 자신의 신곡들을 재빠르게 선곡,편곡,연주해내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21세기까지 그의 음악이 살아남을 수 있게했다. 1968년의 대성공 이후 그는 매년 최소한 1~2개의 앨범들을 선보이면서도 세계 투어를 활발히 진행했고, 매년 히트곡들을 내며 연주가로는 드물게 40여년 가까이 롱런을 해오고 있다.

75년 12월에는 첫 내한공연이 있었고 그 후 5차례나 한국에서 공연을 가졌다. 지금까지 800여회 가까운 콘서트를 해오던 그가 1990년 이후로는 해외투어를 중단하고 앨범활동만을 하다가 자신의 오케스트라 결성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6년 다시 투어를 재개했다. 1997년 그는 프랑스 문화부로부터 `예술문화 훈장'을 받았다.


100여개로 추산되는 정규앨범외의 각 나라에서 버젼이 다른 특별앨범을 발표했고, 무수한 컴필레이션 앨범들과 1100여곡이 넘는 레파토리를 자랑하며 "Penelope", "Nocturne", "Minuetto", "La reine de Saba", "El bimbo"등의 곡들을 세계적으로 연주하며 평생을 다닌 그는 1994년 데뷔시절부터 함께해온 필립스 레이블을 떠나 자신의 팬이 가장 많다는 일본의 Pony Canyon에 전속계약을 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그는 1998년 일본공연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나 은퇴를 선언했고 현재 그의 오케스트라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약해온 Gilles Gambus가 이어받아 지휘하고 있다.

폴 모리아는 2006년 11월 3일 새벽 프랑스 남부 페르비뇽의 한 병원에서 향년 81세의 일기로 사망을 하여서 전 세계의 그의 팬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폴 모리아는 솔로 아티스트는 아니다.
그의 수족과 같이 그가 구상한대로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협연자들이 있었다. '70년대까지는 그는 `Le Grande Orchestre de Paul Mauriat'라는 명칭으로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활동했다.

국제무대에 앨범을 발표하거나 활동할 때는 `Paul Mauriat & His Orchestra'였다. 주로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그의 앨범자켓엔 마치 솔로 아티스트인 것 처럼 그냥 간단히 `Paul Mauriat'라고만 써있게 되었지만, 그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없었다면 폴 모리아의 천재적인 편곡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모든 앨범과 공연의 레파토리들을 거의 폴 모리아가 편곡 및 지휘를 해 왔지만, 그가 직접 연주한 곡은 사실 많진 않다.

그나마 초기 시대엔 앨범이나 공연에서 그가 직접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80년대 넘어서서부터는 편곡과 지휘에 전념했다. 사실, 자신이 연주나 보컬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편곡과 지휘만으로 앨범을 발표하는 아티스트 중 폴 모리아가 가장 인기있지 않을까 싶다.

팝계의 David Foster나 Quincy Jones도 자신이 직접 연주,노래하기 보다는 객원 연주자와 가수들을 활용해 앨범을 제작한 바도 있지만, 폴 모리아처럼 다른 아티스트의 히트곡을 편곡만 해서 이름을 내며 인정받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초기에 발매되던 그의 앨범은 주로 `폴 모리 악단'또는 `폴 모리 그랜드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것이 많았다. 여기서 우리 나라에서의 그의 명칭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폴 모리아'를 `폴 모리'로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떤 이름이 맞는가? 영어 발음으로는 `폴 모리아'이고 불어 발음으로는 `폴 모리'? 난 불어를 잘 모르지만 불어단어의 마지막 자음은 발음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은 아는데, `Mauriat'에서 `t'는 분명 발음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그러나, 어떻게 `폴 모리'라는 발음이 나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남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바꾸어 대충 불러도 되는 걸까.

어쨌든 국내에 처음에 폴 모리아의 명칭조차 이토록 제대로 소개가 안 되었기에 아직도 그의 정체성에 대해 올바른 평가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그의 음악이 오케스트라인지 악단인지 부터 확실히 해 두어야 겠다.

사실 오케스트라를 우리 말로 번역하면 `교향악단'이나 `관현악단'이기에 악단이라고 부르는 것도 일리가 전혀 없진 않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의 악단은 주로 밴드(band)를 의미하거나 연상시킨다. 그의 음악은 때로는 프랑스 샹송적인 우아함이 있고, 영화음악 오케스트라같을 때도 있고, 퓨전 재즈 팀같을 때도 있고, 스윙 빅밴드 같기도 하고, 일본 가라오케 같기도 하고, 라틴음악 밴드 같기도 하고, 클래식 오케스트라 같기도 하고 팝 오케스트라 같기도 하다. 물론, 그의 음악이 다른 이지 리스닝 아티스트들의 음악보다 기타, 베이스, 드럼, 신디사이져 등의 현대악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보통의 오케스트라가 잘 하지 않는 쟝르를 연주하긴 해도 그의 편성은 이름 그대로 오케스트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랜드 오케스트라'란 무슨 의미인가?

영어나 불어 사전을 찾아보면 그랜드(그랑드)오케스트라는 말 그대로 `대편성 오케스트라, 풀(full) 오케스트라'를 의미한다. 즉, 현악,관악, 타악, 건반 등 모든 종류의 악기를 다 써서 편성된 오케스트라이다. 사실,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에게 `그랜드'라는 수식어는 좀 안 어울리는 듯 하다. '90년대 들어 와서는 인원 수가 좀 늘긴 했지만, '80년대까지 그의 오케스트라는 대개 10명 정도의 바이올린, 2명의 비올라, 2명의 첼로, 4명의 트럼펫, 3명의 트롬본, 1명의 목관(플륫) 주자, 모리아 자신을 제외한 2~3명의 건반, 드럼 1명, 베이스 1명, 퍼커션 2명, 기타 2명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보컬이 몇명 포함되기도 하지만, 총인원이 30여명 정도로 대편성 오케스트라 치고는 적은 규모이다.

그러나, 베를린 필과 같이 현악파트만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의 전인원보다 많은 것에 비교하면 안된다. 그리고, `그랜드'라는 말에는 또다른 뉘앙스가 있다. 바로 `위대하다', `우아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랜드 오케스트라는 말에서의 `그랜드'는 단지 형용사로 대편성 을 일컫는 말뿐 아니라 그의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도 쓰일 수 있다. 한 마디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처럼 `폴 모리아와 위대한 오케스트라' 혹은 `폴 모리아와 우아한 오케스트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65년에 그의 오케스트라가 결성된 후 많은 단원들이 오고 갔으나, 주요 단원들을 몇 명 소개할까 한다.

가장 활약이 컸던 단원들은 분명 Gerard Gambus(제랄드 감부스), Gilles Gambus(질르 감부스)일 것이다. 이들은 친형제로 폴 모리아의 고향인 마르세이유 출신으로 폴 모리아보다 20여년이나 어린 음악후배들이다. 이들은 피아노와 키보드를 맡아 뛰어난 연주를 보여주며 지휘하느라 충분히 연주를 할 수 없는 폴 모리아의 연주를 정확히 재현해 주었다.

형인 Gerard는 베이스와 드럼에도 능하다고 하며 꽤 초창기부터 폴 모리아의 단원이 되었다. 특히 "This melody", "Could it be magic" 등 '76년의 몇몇 곡들에서는 Gerard의 피아노가 매우 뛰어난 활약을 한다. 폴 모리아는 그를 거의 자신의 후임으로 점찍은 것처럼 점점 더 큰 역할을 맡기고 특히,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그와 함께 많은 곡을 공동 작곡하며 그를 적극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80년대 초 폴의 오케스트라를 떠나 솔로 아티스트로의 활동을 시작한다.

동생 Gilles는 형보다 몇 년 늦게 입단했으며 형이 오케스트라를 떠난 뒤로는 명실공히 팀의 메인 피아니스트로서 중책을 맡게 된다. 그는 '98년 폴 모리아가 은퇴한 이래로 폴 모리아 그랜드 오케스트라의 새 지휘자이다.

Gambus 형제들 중의 또 다른 한 명인 Gilbert Gambus(질베르 감부스)도 라틴 퍼커션 주자로 잠시 오케스트라 단원 활동을 하기도 했다.

팀파니, 마림바, 실로폰등의 클래식 타악기와 약간의 라틴 퍼커션을 담당하는 Didier Sutton도 거의 30년 가까이 오케스트라를 지켜오며 폴 모리아와 함께 늙어 온 베테랑이다. 폴 모리아는 단원들의 자작곡들도 종종 자신의 고유 레파토리에 넣어 발표하곤 했는데, 단연 Gerard 의 곡이 많다.

폴 모리아와 함께 작곡한 곡 외에 Gerard 의 단독 작곡으로는 "Morning hunt('82)", "First to fly('81)" 등이 있다.

다른 건반 주자 단원들의 곡도 연주한 바 있는데 '90년 당시 단원이었던 Robert Persi의 "Licha('90)", '73년 당시 단원 Jean Bernard의 "Prelude a l'amour('73)", '90년대 후반의 단원인 Bernard Arcadio의 "March flower('97)" 등의 곡이다.

폴 모리아의 오케스트라는 밴드가 아니다. 그냥 악단이 아니다. 매우 독특한 오케스트라이며, contemporary orchestra이다. 이제 폴 모리아의 팬들만이라도 그의 명칭의 명예를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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