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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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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이 곧 대중음악

 

 

지난 1955년 척 베리의 음악 데모 테이프를 들은 체스 레코드사 레너드 체스 사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흑인이 이런 컨트리 송을 썼지?"

 

그럴 만도 한 것이 흑인이라면 의당 리듬 앤 블루스(R&B)를 했어야 하는데 척 베리가 건넨 곡은 미국 백인들의 전통음악인 컨트리 분위기가 물씬했기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나뉘어 있던 흑과 백이 모처럼 호흡을 교환한, 그 곡 <메이블린>(Maybellene)은 그해 발표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같은 시점에 등장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정반대의 경우였다. 미국 남부 미시시피출신의 백인인 그의 보컬은 경이로울 정도로 흑인냄새를 풍겼다. 공연에서 그의 노래 <하운드 독>(Hound dog)이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들은 백인들은 "아니, 저 친구는 뭔데 검둥이처럼 노래하는 거지?"하며 의아해 했다고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척 베리의 음악을 사람들은 로큰롤이라고 했다. 훗날 록으로 불린 이 로큰롤은 1960년대 비틀즈를 거치며 위력적인 대중음악으로 성장했다. 미국이나 영국 뿐 아니라 지구촌의 많은 젊은이들이 록에 열광했다. 20세기 후반 음악의 절대 문법은 바로 록이었다.

 

그럼 어떻게 록은 1950년대 중반이후부터 지금까지 전세계의 청춘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 약동하는 리듬과 템포가 젊은이들과 궁합이 맞기도 했겠지만 만약 록이 순전한 흑인의 전유물이라던가 또는 백인음악에 머물렀다면 흑백을 불문한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로큰롤은 흑과 백의 음악 스타일이 '퓨전'된 혼종이었다. 록은 이처럼 인종의 울타리를 초월하면서 온전한 대중음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주류가 록이었다면 20세기 전반을 휩쓴 음악인 재즈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재즈도 미국 흑인의 연주음악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미국 흑인의 창조적 소리와 유럽 백인음악이 결합된 '퓨전'음악이었다. 그래서 흑인이든 백인이든 가리지 않고 미국인 전체에 친화력을 발휘했다. 만약 그것이 한 인종의 사운드였다면 다수대중의 것이 못됐을지도 모른다.

 

흔히 1900년대를 대중음악시대, 미국음악시대라고 한다. 거기에는 재즈와 로큰롤이 있으며 그것이 각각 세기의 전반과 후반을 나누어 가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난 세기를 미국음악이 장악하게 된 비결이 명백히 도출된다. 인종의 성격이 강한 음악들이 서로 어울려 얻어낸 이를테면 퓨전의 결과물, 바로 탈(脫)인종성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국가의 차원에서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 두 문화유산의 잠재력을 확신하고 그것들을 전세계를 무대로 선전하고 수출했다.

 

대중음악은 퓨전 그 자체이다. 퓨전이 아니면 각국의 음악은 각국의 민속음악에 그칠 수 밖에 없다. 대중음악으로 진전되려면 민속적이든 독자적인 것이든 고유 요소들이 서로 벽을 허물고 선을 넘나드는 융합의 과정은 필연적이다. 퓨전이 되지 않은 것은 진정한 대중음악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평자도 있다.

 

퓨전의 미덕은 '광대한 흡수력'이다. 서로 다른 음악이 만나 또 하나의 새로운 음악이 빚어지게 되면 그 퓨전된 음악은 이전 두 음악을 듣던 계층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무관했던 사람들마저도 포섭할 수 있다. 시너지 효과인 셈이다.

 

요즘 우리 가요로 말해보자.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스페이스 A의 '섹시한 남자', G.O.D의 '애수'는 그냥 정의한다면 통상적인 팝 댄스 그리고 힙합이겠지만 거기에는 전통가요 즉 트로트의 숨결도 살짝 흐른다. '애수'의 멜로디는 트로트의 애상적 분위기가 깔려있으며 그것을 소화하는 리드보컬은 예의 트로트처럼 '꺾고 휘는' 창법을 구사하고 있다. 덕분에 이 곡들은 10대들 뿐 아니라 40대 중년들에게까지 폭넓게 어필하고 있다고 일선 가요담당기자들은 전한다.

 

팝 댄스든 힙합 댄스이든 그것에 트로트의 맛이 묻어난다면 그것도 다름 아닌 퓨전음악이다. 그러면 댄스의 팬 베이스인 틴에이저 층을 넘어 기성세대로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코요테, 샤크라,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등 최근 인기를 누리는 그룹들의 노래에서도 발견된다. 일찍이 1996년 영턱스의 '정'은 일각에서 '트로트 힙합'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특히 힙합은 만들기에 있어서 기존의 음악과 소리를 따는 '샘플링'이 원초적 방법론으로 자리잡은 상태이기 때문에 퓨전의 사례가 빈번하다. 지난해 두각을 나타낸 H.O.T의 '아이야'와 신화의 'T.O.P.'는 힙합의 구조에 샘플링을 동원해 클래식의 멜로디를 끌어들였다. 'T.O.P.'는 미들 템포의 래핑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선율이 이어지며 강렬한 힙합 리듬의 '아이야'는 모차르트 교향곡 27번 인트로 부분을 샘플링했으며 보컬 솔로에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사용되었다.

 

이 곡들에 대해 일선 음악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는 스타들이 클래식을 부분적 소재로 해서 노래부르니까 우리도 할 얘기가 있고 학생들도 좋아한다. 아주 신선한 기획으로 생각되었고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고 말한다. 교사들은 또 신해철이 가장 최신 트렌드인 테크노에 국악의 장단을 믹스한 곡 '無所有-I've got nothing'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들 중에 더러는 학생들과 너무 멀어진 클래식과 국악을 설명하기 위해 이 곡들을 수업소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퓨전은 특히 우리처럼 고유의 민속음악이 대중화된 나라가 아니라 외국 특히 미국의 음악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나라일수록 필수적이다. 외국의 것을 그대로 해서는 곤란하고 우리의 피가 적절히 스며들어야 한다. 그것을 정확히 예시한 가수들이 우리 음악계의 거목인 김민기, 신중현, 조용필 그리고 서태지다.

 

'아침이슬'의 김민기는 미국의 모던 포크를 들은 대로 부르지 않고 우리의 창작적 포크송으로 퓨전해냈다. 분명 그것은 외국에서 건너온 포크이지만 그렇다고 밥 딜런의 것과는 달랐다. 신중현도 유사한 방법론으로 서구의 록을 우리 것으로 전화(轉化)시켰다. 그의 기념비적인 곡 '미인'은 라-솔-미-레-도의 우리 5음계 연주로 시작되며 기타연주는 마치 가야금으로 들린다. '한국 록'이었다.

 

조용필은 '위대한 퓨전 아티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에 따르면 그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서술 가능한 모든 장르의 문법을 집대성한 단 한 명의 음악가"였다. 그는 영향받은 외국의 블루스, 소울, 록에 우리 전통음악의 창법을 화학적으로 결합한 '창 밖의 여자',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의 노래로 국내의 서구 팝 주도권을 분쇄했다.

 

서태지 역시 '랩의 한국화'라는 퓨전으로 1990년대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난 알아요'는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하는 부분의 한국적 선율을 붙여 랩의 이질성을 둔화시키면서 랩의 대중화라는 위업을 이룩했다. 그는 '하여가'로 메탈 랩에 농악의 유일한 선율 악기인 태평소를 접목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어떤 묻혀있는, 소외된 음악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려면 대세의 음악과 만나야 한다는 진리는 지난해 새 유행을 형성한 라틴 팝이 다시 한번 증명했다. '타임'지 선정 1999년 화제의 인물 리키 마틴의 음악은 라틴의 살사와 미국 팝이 퓨전된 것이며 얼마 전 그래미상 8개 부문을 수상한 산타나는 예나 지금이나 라틴 음악과 미국의 록을 결합한 이른바 '라틴 록'의 황제로 통한다.

 

벌써 1000만장의 판매고를 돌파한 그의 앨범 <슈퍼내추럴>(Supernatural)은 장르의 퓨전은 물론 신세대 가수들을 초빙하여 근래 보기 드문 '세대통합'(제네레이션 퓨전?)도 일궈냈다.

 

음악분야에서 퓨전과 자주 혼용되는 용어로 크로스오버(crossover)가 있다. 어떤 사람은 크로스오버를 단지 대상을 넓히기 위해 상업적으로 결합하는 것, 퓨전을 아티스트의 자유로운 예술적 실험의 차원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구분하지만 차이는 거의 없다. 예술적 크로스오버 음악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만 용어상으로 크로스오버는 선을 넘고 벽을 깨는 것을 말하고 퓨전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융합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는 있다.

 

퓨전이든 크로스오버든 전제가 있다. 인종, 계급, 장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합치되는 것이라야 한다. 인종의 경우는 로큰롤처럼 흑인과 백인의 음악이 만나는 것이고, 클래식과 팝의 결합은 계급적 측면의 어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장르는 요즘 들어 빈번해졌듯 국악과 랩 등 이질적 스타일이 만나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통상적 분류로는 세 번째가 바로 퓨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퓨전이라는 말도 60년대 말 재즈와 록이 융합된 스타일, 이른바 '재즈 록'이 나왔을 때부터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불세출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는 1970년 <비치스 브루>(Bitches Brew)앨범으로 그때까지 재즈분야에선 없던 일렉트릭 기타와 피아노에 의한 록 리듬을 도입하며 이 흐름을 주도했다. 그와 함께 연주하던 존 맥러플린, 조 자위눌, 웨인 쇼터, 칙 코리아 등도 독자적 실험 그룹을 이끌며 이른바 '퓨전재즈'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1+1=2+α'가 퓨전이라는 등식에는 또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하는 사실이 내포되어있다. 아주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퓨전 시도들이 근래 수두룩하다. 이것들이 압도적 전파세례를 통해 그럴 듯한 퓨전으로 홍보된다. 유행이 되다보니 대상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천착 없이 일단 합치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식은 오히려 두 음악개체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만다.

 

퓨전은 '순수와 순수가 만나 또 다른 순수를 교배하는 과정'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것이며 인위적일 경우 엄청난 피와 땀이 요구된다. 솔직히 대가들 아니면 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너무 많아 탈이라고 할만큼 퓨전현상이 흔해졌다면 그것은 형식상의 결합으로 관심을 일으키려는 약삭빠른 기획자나 사이비 뮤지션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이들 때문에 대중음악의 기본인 퓨전의 미학이 훼손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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