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퀸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과 오해 (2)
한 뮤지션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음반해설지에 있는 내용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던 시절이 있었다. 음악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 클릭 몇 번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요즘에도, 종이에 인쇄된 글이 갖는 권위는 그다지 낮아지지 않았다. 음반해설지가 갖는 그러한 권위와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그 내용은 심혈을 기울여 써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적어도 퀸 관련 음반에 대해서만은) 음반해설지의 글을 쓴 분들은 비판받을 만한 잘못을 많이 저질러왔다. 음반해설지의 오류들은, 신뢰할만한 기본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빚어진 것들도 있지만, 한번의 사실 확인만 더 거쳤어도 충분히 피해갈 수 있었던 것들도 많다.
이것은 성의부족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국 대중음악 팬들이 퀸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오해의 상당부분은 이 음반해설지들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매된 퀸 관련 음반의 해설지를 정리하는 이번 글이 그러한 생각들을 바로잡는 데에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가장 광범위한 오류는, 퀸 결성 이전의 활동과 퀸 결성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설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결성과정과 퀸 이전 활동을 간략히 요약해보면, '1968년, 임페리얼 대학의 학생이었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와 팀 스타펠(Tim Staffell)은 밴드를 만들기로 결의하였고, 학교 게시판 광고를 보고 찾아온 젊은 의학도 로저 테일러(Roger Talyor)와 함께 스마일(Smile)이라는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레코드사의 지원 부족으로 1970년에 스마일은 해체를 결정하였다.
이전부터 스마일의 멤버들과 친했던 프레디 벌서라(Freddie Bulsara)는 로저, 브라이언과 함께 새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그의 이름을 머큐리(Mercury)로, 밴드의 이름을 퀸으로 바꾸었다. 세 명의 베이시스트가 퀸을 거쳐갔고, 1971년 2월, 존 디콘(John Deacon)은 퀸의 네 번째 멤버가 되었다.'가 될 것이다.
위와 같은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음반해설지들을 보면, 읽기가 불편할 정도로 많은 잘못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스마일이 레코딩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거나 프레디가 스마일의 멤버였다는 얘기는 예사이고, 로저가 전공공부가 싫어 드럼을 배웠다거나 존이 음악을 위해 학업을 포기했다는 식으로 그들이 밴드와 음악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왜곡하기까지 했다.
퀸의 결성시점(1970년 4월)이나 데뷔 시점(1970년 6월 혹은 7월), 존의 합류 시점(1971년 2월)도 자주 틀리는 항목이다. 친분관계로 만난 존을 신문광고로 만났다고 하거나, 퀸 멤버가 녹음한 곡을 몰래 출반했던 'Larry Lurex'를 프레디의 공식 활동으로 규정짓는 잘못들도 빼놓을 수 없다.
퀸 결성이전에 관한 내용이라면, 음반해설지는 읽지 않는 편이 낫다고 권하고 싶을 정도로 이러한 오류들은 여러 필자들의 글에서 발견된다. 기본자료가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야겠지만, 먼저 발매된 음반의 해설지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정황마저 포착되기 때문에, 필자들의 노력부족을 탓하고 싶은 심정은 어쩔 수 없다.
가족사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존의 결혼기념일이 바뀌거나, 프레디가 가족과 함께 인도나 영국으로 거주지를 옮긴 시점을 틀리게 서술하는가 하면, 프레디가 부모의 강요로 무리하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가볍다면 가볍다고 볼 수 있는 오류들이지만, 해설지에서 정보를 얻는 음반소비자를 생각한다면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세 명의 필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프레디가 인도로 건너간 시점을 정확히 2년씩 틀리게 서술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이러한 숫자의 오류는 가족사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연대기 등을 글에 포함시켰다 싶으면 여지없이 다수의 오류가 발견된다. 여러 차례의 검증을 거친 잘 정리된 자료가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고, 불성실한 교정 작업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모든 퀸 음반해설지를 통틀어 연도에 관한 오류만 20군데 이상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내가 퀸 음반해설지를 보는 분들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음반해설지에 있는 연도를 믿지 말라는 것 밖에 없을 것 같다.
숫자와 관련된 오류 중에서 연도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밴드의 위상과 인기도를 나타내는 주요지표인 차트 성적이나 음반 판매고로 옮겨간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퀸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The Game> 미국 1000만장 판매설'이 대표적인 오류이고, 영국차트 최고성적 4위였던 <New Of The World>를 3위까지 올라갔다고 하는 등 고마운(?) 실수들이 주로 발견된다.
프레디가 사망 직전 수척한 얼굴로 직접 기자회견을 하였다는 얘기는, 드라마틱해서인지 많은 퀸 팬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프레디 머큐리 사망 직후인 90년대 초반에 퀸 음반들의 재발매 붐이 일었었는데, 그 때 나온 음반들에 있는 글에는 오류가 그다지 없는 편이고 특히 1, 2집에서는 어떠한 오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데, 1997년 이후에 나온 같은 내용으로 된 두 개의 음반해설지는 오류의 총집결지가 되어버렸고, 그 글에 유일하게 기자회견을 직접 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러한 소문의 진원지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또, 'Bohemian rhapsody'의 해금과 함께 1989년에 재발매된 퀸의 4집 <A Night At The Opera>의 해설지에는, 판매고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는 영향력을 자랑하는 '존 디콘 특수전자악기 고안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Bohemian Rhapsody'에 관해 설명하면서, '존 디콘이 고안해 낸 특수한 전자 악기에 의해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느낄 정도의 대곡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존이 만든 악기 하나를 발명해내어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식의 인상을 주어 혼동을 일으킨다.
사실 퀸의 음악이 웅장한 것은 코러스와 기타를 마스터 테이프가 투명해지도록 오버더빙한 때문이지, 존의 작업만으로 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존이 '전자 악기'를 고안해내어 그 덕에 웅장한 규모의 사운드를 내었다는 자료는, 현재까지도 그 글에서밖에는 발견한 적이 없다. 존은 코러스에조차 참여하지 않았고, 기타 오케스트레이션은 브라이언의 몫이었다. 다만, 그 곡에서 브라이언이 트럼펫 같은 기타톤을 내기 위해 존이 만들어준 앰프를 사용했다고 발언한 적은 있는데, 그것이 와전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자료에 대한 이해부족에 기인한 잘못도 종종 발견된다. 실황음반 발매를 위해 편집되어 잘려나간 'Bohemian Rhapsody'의 중간 부분을 실제 공연에서도 생략한 것으로 착각하거나, 4집 앨범의 대성공으로 덩달아 잘 팔려나가는 음반으로 위상이 바뀐 1집 앨범을 '골드 레코드를 획득한 성공적인 데뷔작'으로 둔갑시키는 것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 외에도 확인을 거치지 않아 발생한 자잘한 오류들은 일일이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이 발견된다. 브라이언의 기타인 '레드 스페셜'에 관한 오류, 멤버들의 학력에 관한 오류, 퀸 로고에 관한 잘못된 설명 등 피할 수 있었던 많은 실수들이 나타나고 있다.
부끄럽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쓴 해설지에도 오류가 있고, 그래서 추정컨대 글 속의 오류들은 대개 자신이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재확인하는 수고를 피해갔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믿는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은 내리면 그만이지만, 음반해설지에 들어가는 글은 최소 10년 이상은 그대로 남아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