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ve Jazz Masters - 03 / Chick Corea
칙 코리아(CHICK COREA)1941- : piano
칙 코리아(Chick Corea)만큼 다채로운 음악성을 지닌 재즈 뮤지션도 드물 것이다.
특히 허비 행콕(Herbie Hancock), 키스 자렛(Keith Jarrett), 조 자비눌(Joe Zawinul)과 함께 칙 코리아는 '60년대 이후 등장한 재즈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클래식을 바탕으로 아방가르드/프리 재즈를 적극 수용한 퓨전 재즈를 선보였고, 록, 팝, 월드 뮤직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 의미있는 실험들을 시도해왔다. 또한 '비루투오조(Virtuoso)'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정교한 건반 테크닉과 풍부한 음악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그야말로 빈틈없는 연주를 자랑한다.
1941년 미국 매사추세츠 첼시(chelsea)에서 태어난 칙 코리아는 4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아르만도 코리아(Armando Corea)'는 1930년대 스윙 재즈시대의 트럼페터였으며, 칙 코리아는 아버지의 이러한 음악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타고난 재능을 지닐 수 있었다.
또한 코리아 부자는 보스톤과 케이프 코드 등지의 재즈 클럽에서 함께 연주를 갖기도 했으며, 당시 칙 코리아의 연주를 들은 많은 관객들은 그를 신동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빌 에반스(Bill Evans),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버드 파웰(Bud Powell)등은 칙 코리아의 10대 시절 우상이었으며, 고교시절에는 조부모의 고향이기도한 남미의 라틴 음악 밴드를 조직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소양을 채득해갔다. 또한 트럼펫, 드럼, 바이브라폰 등 여러 악기에 심취할 정도로 그의 음악적 욕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칙 코리아는 본격적으로 클래식 교육을 받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콜롬비아 대학과 줄리아드 음대를 연이어 중퇴한 뒤, '61년 21세의 나이에 곧바로 프로뮤지션으로 데뷔한다.
데뷔 초기('62-'63)에는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와 윌리 보보(Willie Bobo)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3년간('64-'66년)은 트럼페터 블루 미첼(Blue Mitchell), 허비 맨(Herbie Mann), 스탄 게츠(Stan Getz) 등과 함께 했다. 그리고 마침내 '66년 애틀랜틱(Atlantic) 레코드사에서 데뷔작 [Tones for Joan' Bones]를 발표한다. 이 데뷔앨범은 허비 맨의 프로듀싱, 스티브 스왈로우(Steve Swallow, bass), 조 파렐(Joe Farrell flute/sax), 우디 쇼우(Woody Shaw, trumpet), 조 챔버스(Joe Chambers, drums) 등이 참여했으며, 데뷔작임에도 대단히 성숙된 연주력을 바탕으로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의 'This is New'와 세 곡의 자작 곡을 수록한(지금은 음반을 구하기 쉽지 않지만) 완성도 높은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68년에는 '블루 노트(Blue Note)'와 계약을 맺어, 잭 드조넷(Jack DeJohnette, drum),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 bass), 휴버트 로스(Hubert Laws, flute) 등의 라인업으로 [Chick Corea], 미로스라브 비투스(Miroslav Vitous, bass), 로이 헤인즈(Roy Haynes, drums)의 트리오로 녹음한 [Now He Sings, Now He Sobs], 두 장의 음반을 내놓았다.
그리고 잠시동안이지만 사라 본(Sarah Vaughan)과 함께할 기회를 가졌으며, '67년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소속되면서 '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퓨전'이라는 신 조류 형성에 동참하게된다.
이 기간동안('68-'70) 퓨전 재즈의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Filles de Kilimanjaro], [In a Silent Way], [Bitches Brew], [Miles Davis at the Fillmore] 앨범들에 참여하면서 칙 코리아는 커다란 명성을 얻었으며, 이 때부터 아방가르드적인 다채로운 실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서 칙 코리아는 데이브 홀랜드, 베리 앨출(Barry Altschul, drums), 앤소니 브랙스턴(Anthony Braxton, flute/sax)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프리 재즈' 스타일의 '서클(Circle)'이라는 그룹을 결성, 1년 간 [Early Circle]('70), [Circulus]('70), [Paris Concert(live)]('71), 3장의 앨범에 실험적이고 난해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성으로 유지해 갔다. (평자에 따라서는 '서클' 시절을 칙 코리아 음악성의 정점이라 평하기도 한다)
또한 '71년 서클을 떠난 칙 코리아는 그 해 가을 스탄 게츠와의 만남으로 스탠리 클락(Stanley Clarke, bass), 조 파렐, 프로라 프림(Flora Purim, vocal)과 함께 브라질의 삼바리듬이 가미된 음악을 구상했으나, 일년 뒤 스탠리 클락, 빌 코너스(Bill Connors, guitar), 레니 화이트(Lenny White, drum)와 함께 퓨전 역사에 길이 남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이후 RTF)'를 결성한다.
파워풀하고 복잡한 코드 진행의 '퓨전 락'을 선보인 RTF는 '77년까지 7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며,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와 함께 퓨전 락의 대표 주자로 거론됐으며, '75년 칙 코리아는 RTF 보컬리스트였던 게일 모런(Gayle Moran)과 결혼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RTF 재임기간에는 멤버들과 함께 또 다른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Chic Corea's RTF'라는 호칭으로 앨범들을 발표했는데, [Return to Forever]('72), [Light As a Feather]('72), [My Spanish Heart]('76)가 그러한 앨범들이다.
이 3장의 앨범들은 RTF보다는 더욱 부드럽고 편안한 '멜로디컬한 사운드'와 멤버들과의 '유연한 교감'이 빛을 발한, 대중적이면서 세션들의 연주력이 뒷받침된 탁월한 작품들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80년대 초반에는 다시 데뷔 초기로 돌아가 미로스라브 비투스, 로이 헤인즈 등과 함께 트리오 또는 퀄텟으로 '포스트 밥(Post Bob)' 스타일을 들려주었으며, '81년 [Three Quartets], [Trio Music], [Live in Montreux] 3장의 앨범이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칙 코리아의 또 다른 실험 그룹이 결성된다. '일렉트릭 밴드(Elektric Band)'라는 명명된 이 밴드는 20대 후반의 젊은 테크니션들, 존 패티투치(John Patitucci, bass), 프랭크 갬블(Frank Gambale, guitar), 에릭 마리엔탈(Eric Marienthal, sax), 데이브 웨클(Dave Weckl, drum)의 5인조 퀸텟으로 락적이고 평키한 '퓨전/재즈 락'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당시 이 밴드의 경이로운 테크닉은 재즈 팬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는 존 패티투치와 데이브 웨클의 트리오로 상반된 메인스트림 재즈 스타일의 '어쿠스틱 밴드(Accoustic Band)'라는 팀을 결성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코리아는 케니 가렛(Kenny Garrett), 월레이스 로니(Wallace Roney), 조슈아 레드맨(Joshua Redman)과 같은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퓨전 락'과 '포스트 밥' 스타일을 오가는 폭넓은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이전보다 실험적인 퓨전보다는 메인스트림과 클래식적인 감성에 깊은 애정을 담아낸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렇듯 코리아는 클래식, 락, 월드 뮤직 등을 아우른 자신만의 방대한 음악적 소양을 바탕으로 재즈 사에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했으며, 지금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되고있다.
글 출처 : 7080 휴게실
칙 코리아(Chick Corea)만큼 다채로운 음악성을 지닌 재즈 뮤지션도 드물 것이다.
특히 허비 행콕(Herbie Hancock), 키스 자렛(Keith Jarrett), 조 자비눌(Joe Zawinul)과 함께 칙 코리아는 '60년대 이후 등장한 재즈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클래식을 바탕으로 아방가르드/프리 재즈를 적극 수용한 퓨전 재즈를 선보였고, 록, 팝, 월드 뮤직 등을 부분적으로 수용, 의미있는 실험들을 시도해왔다. 또한 '비루투오조(Virtuoso)'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정교한 건반 테크닉과 풍부한 음악적 이론을 바탕으로 한 그야말로 빈틈없는 연주를 자랑한다.
1941년 미국 매사추세츠 첼시(chelsea)에서 태어난 칙 코리아는 4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아르만도 코리아(Armando Corea)'는 1930년대 스윙 재즈시대의 트럼페터였으며, 칙 코리아는 아버지의 이러한 음악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타고난 재능을 지닐 수 있었다.
또한 코리아 부자는 보스톤과 케이프 코드 등지의 재즈 클럽에서 함께 연주를 갖기도 했으며, 당시 칙 코리아의 연주를 들은 많은 관객들은 그를 신동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빌 에반스(Bill Evans),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 버드 파웰(Bud Powell)등은 칙 코리아의 10대 시절 우상이었으며, 고교시절에는 조부모의 고향이기도한 남미의 라틴 음악 밴드를 조직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소양을 채득해갔다. 또한 트럼펫, 드럼, 바이브라폰 등 여러 악기에 심취할 정도로 그의 음악적 욕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칙 코리아는 본격적으로 클래식 교육을 받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콜롬비아 대학과 줄리아드 음대를 연이어 중퇴한 뒤, '61년 21세의 나이에 곧바로 프로뮤지션으로 데뷔한다.
데뷔 초기('62-'63)에는 퍼커션 주자인 몽고 산타마리아(Mongo Santamaria)와 윌리 보보(Willie Bobo)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3년간('64-'66년)은 트럼페터 블루 미첼(Blue Mitchell), 허비 맨(Herbie Mann), 스탄 게츠(Stan Getz) 등과 함께 했다. 그리고 마침내 '66년 애틀랜틱(Atlantic) 레코드사에서 데뷔작 [Tones for Joan' Bones]를 발표한다. 이 데뷔앨범은 허비 맨의 프로듀싱, 스티브 스왈로우(Steve Swallow, bass), 조 파렐(Joe Farrell flute/sax), 우디 쇼우(Woody Shaw, trumpet), 조 챔버스(Joe Chambers, drums) 등이 참여했으며, 데뷔작임에도 대단히 성숙된 연주력을 바탕으로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의 'This is New'와 세 곡의 자작 곡을 수록한(지금은 음반을 구하기 쉽지 않지만) 완성도 높은 수작으로 알려져 있다.
'68년에는 '블루 노트(Blue Note)'와 계약을 맺어, 잭 드조넷(Jack DeJohnette, drum), 데이브 홀랜드(Dave Holland, bass), 휴버트 로스(Hubert Laws, flute) 등의 라인업으로 [Chick Corea], 미로스라브 비투스(Miroslav Vitous, bass), 로이 헤인즈(Roy Haynes, drums)의 트리오로 녹음한 [Now He Sings, Now He Sobs], 두 장의 음반을 내놓았다.
그리고 잠시동안이지만 사라 본(Sarah Vaughan)과 함께할 기회를 가졌으며, '67년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소속되면서 '6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퓨전'이라는 신 조류 형성에 동참하게된다.
이 기간동안('68-'70) 퓨전 재즈의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Filles de Kilimanjaro], [In a Silent Way], [Bitches Brew], [Miles Davis at the Fillmore] 앨범들에 참여하면서 칙 코리아는 커다란 명성을 얻었으며, 이 때부터 아방가르드적인 다채로운 실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70년대 들어서 칙 코리아는 데이브 홀랜드, 베리 앨출(Barry Altschul, drums), 앤소니 브랙스턴(Anthony Braxton, flute/sax) 등과 함께 '아방가르드/프리 재즈' 스타일의 '서클(Circle)'이라는 그룹을 결성, 1년 간 [Early Circle]('70), [Circulus]('70), [Paris Concert(live)]('71), 3장의 앨범에 실험적이고 난해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성으로 유지해 갔다. (평자에 따라서는 '서클' 시절을 칙 코리아 음악성의 정점이라 평하기도 한다)
또한 '71년 서클을 떠난 칙 코리아는 그 해 가을 스탄 게츠와의 만남으로 스탠리 클락(Stanley Clarke, bass), 조 파렐, 프로라 프림(Flora Purim, vocal)과 함께 브라질의 삼바리듬이 가미된 음악을 구상했으나, 일년 뒤 스탠리 클락, 빌 코너스(Bill Connors, guitar), 레니 화이트(Lenny White, drum)와 함께 퓨전 역사에 길이 남을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이후 RTF)'를 결성한다.
파워풀하고 복잡한 코드 진행의 '퓨전 락'을 선보인 RTF는 '77년까지 7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며,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Mahavishnu Orchestra)와 함께 퓨전 락의 대표 주자로 거론됐으며, '75년 칙 코리아는 RTF 보컬리스트였던 게일 모런(Gayle Moran)과 결혼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RTF 재임기간에는 멤버들과 함께 또 다른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Chic Corea's RTF'라는 호칭으로 앨범들을 발표했는데, [Return to Forever]('72), [Light As a Feather]('72), [My Spanish Heart]('76)가 그러한 앨범들이다.
이 3장의 앨범들은 RTF보다는 더욱 부드럽고 편안한 '멜로디컬한 사운드'와 멤버들과의 '유연한 교감'이 빛을 발한, 대중적이면서 세션들의 연주력이 뒷받침된 탁월한 작품들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80년대 초반에는 다시 데뷔 초기로 돌아가 미로스라브 비투스, 로이 헤인즈 등과 함께 트리오 또는 퀄텟으로 '포스트 밥(Post Bob)' 스타일을 들려주었으며, '81년 [Three Quartets], [Trio Music], [Live in Montreux] 3장의 앨범이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칙 코리아의 또 다른 실험 그룹이 결성된다. '일렉트릭 밴드(Elektric Band)'라는 명명된 이 밴드는 20대 후반의 젊은 테크니션들, 존 패티투치(John Patitucci, bass), 프랭크 갬블(Frank Gambale, guitar), 에릭 마리엔탈(Eric Marienthal, sax), 데이브 웨클(Dave Weckl, drum)의 5인조 퀸텟으로 락적이고 평키한 '퓨전/재즈 락'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당시 이 밴드의 경이로운 테크닉은 재즈 팬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는 존 패티투치와 데이브 웨클의 트리오로 상반된 메인스트림 재즈 스타일의 '어쿠스틱 밴드(Accoustic Band)'라는 팀을 결성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서도 코리아는 케니 가렛(Kenny Garrett), 월레이스 로니(Wallace Roney), 조슈아 레드맨(Joshua Redman)과 같은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퓨전 락'과 '포스트 밥' 스타일을 오가는 폭넓은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이전보다 실험적인 퓨전보다는 메인스트림과 클래식적인 감성에 깊은 애정을 담아낸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렇듯 코리아는 클래식, 락, 월드 뮤직 등을 아우른 자신만의 방대한 음악적 소양을 바탕으로 재즈 사에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했으며, 지금도 그러한 작업은 계속되고있다.
글 출처 : 7080 휴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