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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밥 창시의 거두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

오작교 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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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k_1.jpg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 1917. 10. 10. ~ 1982. 2. 17)

 

델로니어스 스피어 몽크)Thelonious Sphere Monk,).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티스트다.


모던 재즈의 기수로서, 비밥 창시의 거두로서의 위상 뿐만 아니라 재즈 피아노의 전형을 이룩했고, 스윙 시대의 댄스 뮤직으로서의 재즈를 실내악적인 감상용 음악으로 입지를 제고했다는 면에서 그의 존재는 더 확고하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와 더불어 지대한 공헌을 한 뮤지션으로 길이 각인되고 있다.


재즈사에는 수없이 명멸하는 뮤지션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기인이나 이인의 행적을 가졌던 뮤지션이 적지않다.

 

그렇다고 음악적으로 저급하거나 용렬하지 않은, 실제적인 실력과 조건을 구비한 확실한 컨셉과 음악적인 폴리시를 전제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군의 세를 과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뮤지션을 일컬어 ‘재즈 자이언트’라는 별호와 더불어 재즈사에 남긴 족적을 칭송하는,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라고 불러왔다.

 

서두가 너무 장황했는지 모르겠지만 필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이라는 점과 그가 끼친 재즈계의 엄청난 파장을 감안한다면 필설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물론 편견을 배제한 보편적이고 합당한 견해를 상술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델로니어스 스피어 몽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티스트다. 모던 재즈의 기수로서, 비밥 창시의 거두로서의 위상 뿐만 아니라 재즈 피아노의 전형을 이룩했고, 스윙 시대의 댄스 뮤직으로서의 재즈를 실내악적인 감상용 음악으로 입지를 제고했다는 면에서 그의 존재는 더 확고하다.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와 더불어 지대한 공헌을 한 뮤지션으로 길이 각인되고 있다.


재즈 피아노를 통하여 재즈의 역사는 발전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 재즈, 다시 말해 뉴올린즈 재즈 시기부터 피아노의 위치는 리듬 악기로서 중요하였고, 그 이전에도 흑인 교회에서는 가스펠 연주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피아노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중요성은 확실하게 다가온다.

 

발전적이고 전향적인 재즈 피아노계는 래그타임이나 스트라이드 피아노, 부기우기 스타일에서 듀크 엘링턴과 카운트 베이시에 이르면 모던 재즈 스타일이 성립된다. 특히 듀크 엘링턴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미 엘링턴에 대한 내용은 전편에 상술했지만, 결국 엘링턴을 이은 차세대를 델로니어스 몽크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에롤 가너나 앨 헤이그, 아트 테이텀의 간접적인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으나 엘링턴의 진수를 전수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엘링턴의 적자로서 그가 펼친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연주 스타일에서 그의 추종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그의 절제된 피아니즘과 미니멀리즘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연주 스타일로 기록되고 있다.

 

Thelonious_Sphere_Monk2.jpg 비범함과 독자적인 천재성이 대중성과의 단절 야기하기도

 

델로니어스 몽크는 1920년 10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록키마운트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가족들은 뉴욕으로 이주한다. 열한 살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나 듀크 엘링턴, 제임스 P, 존슨, 팻츠 윌러 등의 연주에 매료되면서 그는 피아노 교본을 거부하며 레슨을 중단한다.

 

당시 시청 직원으로 근무하던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복음 전도사의 오르간 반주를 잠시 맡았었다.

 

14세부터는 아폴로 극장에서 개최하는 아마추어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항상 우승하자 곧바로 이 콘테스트의 출전을 중단해버렸다. 이인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피터 스타이브샌트 하이 스쿨을 나온 것뿐이었지만 수학을 남달리 잘했다.

 

17세 때는 복음 전도단의 피아니스트로서 투어링을 하며 그 사이에 여러 지방의 잼 세션에서 실력을 연마하게 된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생활 형편이 어려웠으므로 다양한 일들을 체험한다. 이때의 경험은 그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며 삶의 진실을 터득하는 어떤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찌든 삶과 냉혹한 사회에서 오는 이질감과 괴리감을 그는 음악적인 컨셉에 용해하고 있었다.


몽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할렘에 위치한 클럽 ‘민턴즈 플레이하우스’의 하우스 트리오로 드러머 케니 클락과 함께 고용된 이후다. 이 클럽은 이윽고 뮤지션이 모여 잼 세션을 하는 장소가 되었고 비밥 발상의 온상의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몽크 자신은 후에 ‘비밥의 고승(高僧, 주: 몽크가 승려라는 의미를 차용하여 주어진 명칭)이라고 불리어졌으며, 그는 기성곡의 코드 진행에 기초를 둔 연주에는 관심이 없었고, 당시부터 아주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컨셉션을 가지고 있었으나 소위 ‘바퍼’라고 하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하모니와 리듬에 관한 독자적인 감각과 텐션을 많이 사용한 유니크한 주법은 몽크,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또 그것 속으로 고립되게 된다.

 

1941년 5월에 레코딩한「민턴 하우스의 찰리 크리스천」이라는 앨범에는 모던 재즈의 여명이라고 해야 할 연주를 기록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음반이다. 이후 1942년에 럭키 밀린더 악단, 44년에는 콜맨 호킨스 그룹에서 연주하며 호킨스의 배려하에 정식적인 첫 레코딩을 체험한다. 이는 몽크로서는 터닝 포인트로서 일단 행운을 갖는 기회가 되었다.

 

1946년에는 이에 힘입어 디지 길레스피가 결성한 빅 밴드에 최초의 피아니스트가 된다. 이러한 몽크의 재능을 인정하고, 무명이지만 리더 레코딩의 기회를 부여한 레이블이 바로 블루 노트였다. 1947년 10월부터 1952년 5월까지 토탈 6회의 세션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대표작이라 해야 할「Round Midnight」을 시작으로「Ruby, My Dear」,「Well, You Needn’t」,「Off Minor」,「Misterioso」,「Epistrophy」,「Criss Cross」,「Eronel」,「Straight, No Chaser」등이 이미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사실이다.


그의 음악적인 특질을 강하게 인상 지운 이들의 연주는 미련이 남지만 일반 팬으로서는 상당히 듣기가 어렵고, 대개 그런 정도로 관심을 사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당시로서는 너무 앞서갔던 그의 천재성이 인정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형무소 생활 겪어


1947년에 넬리 스미스와 결혼한후, 실업 상태에 있던 몽크를 도운 것은 아내였다.

그녀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하며 세월을 보내던중, 1951년에는 동승했던 피아니스트 버드 파월의 차에서 헤로인이 발견되어 본의 아니게 사실 무근이지만 몽크는 60일의 형무소 생활을 치르게 되었다.

 

사실 버드 파월은 심한 마약 중독자였다. 물론 그와 몽크의 사이는 사제지간이자 격이 없는 친구로서의 정분을 나누고 있었다.

출소 후 설상가상으로 카바레 카드를 몰수당해 곤경에 빠지지만 그를 돕고 나선 것은 파노니카 케니스워터 남작 부인으로, 그녀의 분주한 노력으로 1957년에 카바레 카드를 재교부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남녀의 관계는 음악을 사랑하는 이외에 어떤 다른 사실이 존재하지 않은 진실된 우정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곤경 속에 클럽 출연은 할 수 없었으나, 1952년부터 54년까지는 프레스티지 레이블에 4회의 세션을 남기는 외에 소니 롤린즈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여러 레코딩에도 참여하여 이름을 남긴다. 이중에서 델로니어스 몽크 외에 롤린즈의 「Moving Out」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명한 크리스마스 세션에 의한 「Bags Groove」, 「Miles Davis And The Modern Jazz Giants」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중에서도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레코딩에는 많은 트러블이 있어, 트러블 세션으로 더 유명하다. 1954년 6월에는 프랑스 파리의 재즈 페스티벌에 초대되어 건너가 행사 후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Solo on Vogue」라는 우수한 첫 솔로 앨범을 ‘보그(Vogue)’ 레이블에 넘기기도 하였다.

 

음악적 전성기를 구가했던 리버사이드 시절


1955년 말에는 리버사이드사와 장기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이 시기에 들어 음악적으로도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시에 그의 천재성이 널리 세간에 알려지기도 한 좋은 시절임에 틀림없다.

 

리버사이드 시기에는「Plays Duke Ellington」,「The Duke」에 이어서 특이한 구성으로 몽크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짜 맞춘「Brilliant Corners」, 엄격하기까지 한 표현미를 솔로로 묘사해낸「Thelonious Himself」, 대형 컴보에 의한 박력 넘치는「Monk’s Music」이라는 걸출한 작품군을 시작으로「Thelonious in Action」,「Misterioso」,「Thelonious Alone in San Francis-co」,「Thelonious Monk with John Coltrane」,「Mulligan Meets Monk」등의 수일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1957년 여름부터 12월에 걸쳐서 클럽「파이브 스팟」에 존 콜트레인을 포함하여 쿼텟으로 출연하여 스릴링한 두 사람의 연주는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왜일까? 두 자이언트의 연주 모습을 그려 보면 확연한 그 무엇이 뇌리를 꽉 메울 것이다. 이때 존 콜트레인 자신도 몽크와의 공연으로 보다 많은 시사를 받았으며, 그때의 성과를 그는 한층 심화시켰다고 콜트레인은 나중에 술회한 바 있다.

 

대가들의 서로의 교호 작용에 의해 무언의 교육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확실한 신념과 음악 세계는 어떤 언어도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눈빛으로 상대방을 읽어내듯이 음악적인 언어만이 그들을 소통시키고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뿐이다. 침소봉대하면, 도인의 경지는 도인만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마음을 누가 알랴만은 우리는 이들의 음반을 통해 그나마 피상적인 면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연주를 반복해서 들으면 그래도 음악적인 진실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짐작해본다. 몽크의 전성기는 막 시작되었다. 다음 호에 이어지는 몽크의 세계를 기다려 본다.

 

도가 높은 스님을 고승이라 한다.

물론 도라고 해서 세간에서 말하는 어떤 주술이나 신령스러운 이적을 남긴 그러한 행위를 도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개운치 않다.

환언하면 도란 모름지기 자아의 성찰을 의미하며, 자타가 둘이 아닌 경지를 체득함에 그 의미를 부여함이 마땅하다.

 

또 그러한 사유를 떠난 무아의 진공 상태를 도라고 한다면 너무 현학적인 면으로 보는 것 같아 더욱 난해해질 수 있다.

고승 몽크의 세계는 몽크다움을 아는 자만이 이입될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서론이 너무 장황한 것은 그의 음악이 너무나도 지고지순한 정신 세계의 중심에 우뚝하기에 이렇게 강렬한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는 바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주관적인 요소가 가득하지만, 보편적인 사고로 볼 때 당위를 알 수 있다. 지난 호에서 마지막 여운으로 남긴 존 콜트레인과의 해후는 재즈 연보에서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세계를 더욱 내실 있게 전개하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것이다.

 

찰리 라우즈를 영입하며 새로운 국면 맞아


1958년에는 ‘리틀 자이언트’라는 닉네임의 테너 색소포니스트 쟈니 그리핀을 영입하여 레귤러 쿼텟으로 활동하였는데, 쟈니 그리핀의 블로잉에 몽크는 새로운 컨셉을 추가하며 스타일의 변화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몽크는 1959년에 그리핀을 대신하여 찰리 라우즈를 밴드에 불러온다.


사실 찰리는 정적이며 빠른 연주를 즐기지 않으면서도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생각하는 뮤지션이었다. 몽크와는 너무나 호흡이 잘 맞았다. 결국 이 팀웍으로 호평을 받으며 몽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 여파를 가일층하여 1961년에는 유럽 투어링 콘서트를 실시하여 그 곳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몽크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레코딩을 남긴다.

 

이때의 성공적인 투어링에 힘입어 몽크의 인기는 상승하고 상업적인 성공의 가능성을 보이게 된다. 이를 예의 주시하던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그를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게 되는데, 1962년의 일이었다. 물론 음악적인 면에서도 원숙기에 접어들었고, 이전보다 훨씬 밝고 유머러스한 면과 맛깔스러움이 증가되었다는 중요한 팩터가 작용하고 있었다. 이적 후 첫 작품인「Monk’s Dream」이나 후속작인「Solo Monk」는 특히 이러한 매력으로 점철된 쾌작으로 호평받는다.


1963년 5월에는 라우즈와 베이스에 버치 위렌, 드럼에 프랭키 던럽을 영입하여 저팬 투어링을 감행하여, 그렇지 않아도 일본 열도에 불고 있던 재즈 열풍에 일조를 한다. 1964년 동경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의 재즈 뮤지션들은 러쉬를 이루게 되었다.

 

케넌볼 애덜리 밴드, 아트 블레이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 소니 롤린즈 밴드,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 등 유례 없는 거물들의 투어링 콘서트로 일본 열도의 재즈 팬들은 조용히, 그것도 실제 속으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들의 세계를 받아 들여 그들이 오늘날 세계적인 재즈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때부터 일본 재즈의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몽크 쿼텟도 이 시기에 투어링 후 컬럼비아 레코드사의 일본 파트너인 CBS-Sony에 실황 음반을 레코딩하였다.

 

빅 밴드와 쿼텟으로 구성한 리사이틀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귀국 후에는 멤버의 교체 없이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였고, 이때 클라리네티스트 피위(Pee Wee) 러셀과 협연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연주를 남기기도 했다. 몽크의 포용력과 그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12월에는 이의 여세를 몰아 링컨 센터에서 빅 밴드와 쿼텟으로 구성한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켜「타임」지에서는 그해의 표지를 장식할 예정이었으나,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이를 간과하지 않은「타임」지는 다음해, 1964년 2월 28일호에 마침내 게재하였다. 정말 쾌거였다. 물론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이 케네디 암살 사건을 능가할 일은 아니고 다만 미국인의 정서를 감안하면 예술에 대한 그들의 안목이 이렇게 철저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는 몽크의 팬 클럽이 사기 충천하여 그를 다시금 일본 무대에 서게 했는데, 1966년 5월과 1970년 10월에 투어링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쳤다. 이 무렵 건강이 매우 나빠졌으나, 1971년 재개에 성공하여 9월부터 11월에 걸쳐서 ‘Giants of Jazz’ 밴드의 일원으로서 월드 투어링 콘서트에 참가하여 절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의 명망은 이미 범세계적인 뮤지션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런던 공연은 애틀랜틱사에서「Giants of Jazz」라는 타이틀로 앨범이 나왔고, 파리와 스위스에서 레코딩한 것도 발표하였는데 블랙 라이언사에서는「Something Blue」,「The Man I love」를 공연 전에 런던에서 레코딩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물론 세션에 참가한 뮤지션들의 면면도 엄청났다. 디지 길레스피(TP), 카이 윈딩(TB), 소니 스티트(SAX), 앨 맥키븐(B), 아트 블레이키(Ds) 등으로 당시 절정기에 있던 뮤지션들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Thelonius_Monk03.jpg

 

대망의 카네기 홀 연주에서는 아들이 드러머로 참여해


몽크는 유럽 투어링 이후 또다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집념은 상상을 넘어 1975년에 개최된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약 2년 만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청중들은 이런 그의 건강한 연주에 매료되며 감개 무량한 표정들이었다. 깊은 찬사를 받으며 그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몽크의 뇌리에는 새로운 콘서트를 위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모든 준비를 마친 몽크는 드디어 1976년 3월에 대망의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였는데, 친자식인 델로니어스 몽크 주니어가 드러머로 참여한 퀸텟의 연주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물론 성공적인 콘서트로 기록되지만 몽크는 새로운 작품에 전력을 투구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신작의 소문을 끝내 실현시키지 못하고 1982년 2월 5일 밤 뇌일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게 웬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몽크!! 그 위대한 뮤지션이 이렇게 끝난다는 말인가. 그를 사랑하던 모든 팬들의 여망을 이대로 접는 것인가. 만감이 교차하고 그의 소생을 간절히 바라던 가족과 뮤지션, 친지, 팬들의 기대를 멀리하고 2월 7일 뉴저지의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혼수 상태 그대로 불귀의 몸이 되었다. 애석하다는 표현으로는 도저히 양이 차지 않는 현실이었다.


향년 61세로, 몽크는 일찍이 듀크 엘링턴을 존경하였고 전통의 기반 위에 존재하며 실로 독창적인 표현 방법으로 비교할 수 없는 개성이 풍부한 세계를 열고, 만들었다. 그의 영향이 혁신파 뮤지션들에게까지 미쳤던 점도 주목해야 할 업적이며 평가다. 진정으로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아티스트로 남는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그의 추종 세력들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일일이 예거하기가 어렵지만 살아 숨쉬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재즈 뮤지션은 모두라고 지칭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진정한 피아니스트


그가 남긴 수많은 재즈 앨범과 영상 기록이 있지만 전술한 음반 위에 모자빅 레코드사에서 발표한「The Complete Blue Note Recordings of Thelonious Monk」와 리버사이드 레코드에서 출반한「Complete Riverside Recordings」가 특히 주목할 작품으로 몽크의 전모를 여과 없이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전집이다.

 

또 1986년에 출시된 「Music in Monk Time」이나 1988년 발간된 몽크의 일대기를 영상화한「Straight No Chaser」에서는 1956년부터 68년까지의 그의 실체를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들지만「American Composer」나「Monk in Europe」에서 그의 생생한 연주를 접할 수 있다. 이렇게 뮤지션의 삶의 궤적을 그나마 영상 매체를 통하여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여기서 몽크에 대한 평가랄까, 아니면 그의 주변에 있던 뮤지션들의 느낌들이 이러하다. 몽크는 과연 피아니스트로서 테크니션인가 아닌가 라는 논의가 있기도 했고, 테크닉을 의식하지 않은 진정한 재즈맨이라고 하는 평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혹자는 난해한 곡 해석에 오히려 머리가 복잡하다는 애교스러운 투정을 하는 뮤지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평가로는 몽크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유니크한 터치와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테크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자연스러운 멜로딕 라인을 이끌어 가는 오른손과 대담한 코드 위크를 구사하는 왼손, 그리고 좌우의 밸런스감 충만한 근사한 연주야말로 출중한 테크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꼭 속주를 하며 다양한 코드를 사용해야만 테크닉을 멋있게 구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간결한 코드 진행과 여백의 맛도 훌륭한 음악임에 틀림없다.


소프라노 색소포니스트 스티브 레이시가 이렇게 술회했다.

 

‘만약 재즈에서 테크닉이 감각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몽크는 어느 누구보다도 테크니션이라고 해야 하며, 멜로디를 낭비하지 않는 것이 테크니션이라 한다면 바로 몽크가 테크니션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듀크 엘링턴과 세실 테일러를 제외하면 누구보다 다채로운 컬러와 사운드, 리듬을 피아노에서 뽑아내는 기교를 갖고 있다. 진정으로 놀라운 테크닉의 소유자다. 그가 테크닉이 없다고 논의하는 처사가 바로 바보짓이다’.

 

스타일리스트 세실 테일러 역시 몽크의 추종자로 그를 극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제 그는 갔지만 그의 음악은 재즈사에 찬연히 빛날 것이다. 델로니어스 스피어 몽크. 그는 진정한 고승이었다.

 

 최영수 / 재즈 평론가  

 

 

Thelonius_Monk06.jpg

 

 

 

수록할 Album 



01.  Blue Monk

02. Brilliant corners

03. The Gerry Mulligan Sessions

04. A Duke Ellington Songbook

05. Quartet and Octet In Europe

 

06. Live At The Five Spot Vol. 1

07. Live At The Five Spot Vol. 2

08. Epistrophy

09. Monks Dream

10. Almost S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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