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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제1 ~ 4번(사계) / 정경화. violin

오작교 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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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 Wha Chung, violin

 

 

3백 년을 이어온 베네치아의 풍경화

비발디 : 사계


베네치아,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치 않는 도시이다.
「뉴욕 타임스」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것을 선정하면서 ‘최고의 시대’로 ‘15세기의 베네치아’를 꼽았을 정도로, 베네치아 공화국만큼 예술을 꽃피우고 화려하고 부유한 문명을 자랑하면서도 명예와 이상, 질서와 책임으로 넘쳤던 시대는 없었다. 그 ‘좋았던 곳’의 알맹이는 없어졌을지 몰라도, 인류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문명 시대의 족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영미 시인이 베네치아를 가리켜 “혼자서는 절대로 여기에 오지 마라. 너무 힘들다.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라도 여자가 그 품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라고 했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베네치아의 중심은 산 마르코 광장이다. 3백 년 전의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광장의 화려함은 역시 대단하다. 그러나 광장을 나와 곤돌라 선착장에서 해안을 따라 걸어가 보는 정취는 비교할 데가 없을 만큼 낭만적이다. 즉 스키아보니 해안가를 다라서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동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해가 질 즈음에 뒤를 돌아보라. 석양의 황금빛을 반사하는 석조 건물들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다. 특히 황혼녘 바닷가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면, 그 핑크빛의 유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불빛은 절묘하다 못해 심장이 저릴 정도이다. 베네치아에 더 머무르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야 할 경우, “언제나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하는 아쉬운 슬픔에 가슴이 떨렸던 것은 단 한번도 예외가 없었다.

스카아보니 길을 따라가면 외쪽으로 두칼레 궁정, 탄식의 다리, 다니엘리 호텔 등 유서 깊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여행객들의 다리를 아프게 하는 세 번째 아치형 다리를 지나면, 바다를 정면으로 접하고 있는 백색의 큰 성당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라 피에타’ 성당이다. 정면의 벽에는 고수머리를 늘어뜨린 낯익은 얼굴, 비발디의 두상(頭狀) 측면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비발디 신부가 고아들을 모아서 연주를 하고 작곡을 했던 곳이다.

라 피에타에 들어가면 지금은 예배당만 남아 있지만 당시 이곳은 단순히 교회의 기능만 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산 마르코 대성당의 부속 기관으로서, 베네치아에 많았던 고아와 사생아들의 구제원이었다. 라 피에타 옆에는 ‘로칸다 비발디 호텔’이라는 자그마한 호텔이 있다. 구제원의 건물 일부로 쓰던 부분을 사들여서 전면적으로 내부를 개조하여 최근에 호텔로 문을 연 것이다.

비록 호텔이지만 비발디가 평생을 살았던 장소이니만큼, 비발디 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가 봄직한 곳이다.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 디카프리오를 닮은 잘생긴 청년이 말쑥한 연회색 양복차림으로 인사한다. 나도 모르게 그가 혹시나 비발디랑 닮은 데는 없는지 살피게 된다. 어쨌든 호텔의 장식이나 문장마다 모두 비발디의 초상화를 담고 있다. 비발디는 이곳에서 모든 영광과 굴욕을 다 겪었던 것이다.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anldi)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산 마르코 성당 소속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서 자연스럽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재주가 뛰어났고 개성도 강렬한 아이였다. 그렇게 가톨릭 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자연스럽게 열다섯 살에 삭발을 하고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으며, 스물다섯 살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람들은 눈부시게 밝고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가진 비발디를 ‘빨간 머리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은 젊은 나이에 라 피에타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고아와 사생아들을 모아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조직했다. 그의 지 도로 원생들의 실력은 날로 발전했다. 비발디는 이곳과의 인연을 거의 만년(晩年)까지 30년 이상이나 지속하면서 음악 활동을 하게 된다. 매주 일요일마다 시민들을 위한 공개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그것이 유명해져 큰 일기를 끌었고, 그 소문이 전 유럽에 알려졌다. 어쩌면 요즘의 빈소년합창단이나 파리나무십자가합창단 같은 인기를 누렸던 것 같다.

원생 아이들의 발표를 위해 비발디는 계속 새로운 곡을 작곡해야 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작곡가 비발디의 이름을 크게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베네치아에 방문하면 여행객들은, 고아 콘서트를 보고 비발디의 음악을 듣는 것이 필수 관광코스에 들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비발디는 당시 음악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을 누린 최초의 작곡가였다.

그러나 유명해진 만큼 시기와 질투도 따랐다. 그는 끊임없이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화제의 왕자이기도 했다. 사실 비발디는 평생 규칙이나 구속을 참지 못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으며, 사제치고는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사고뭉치였다. 어쨌든 그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탐닉하고 돈을 좋아했다든지, 어떤 매조 소프라노 가수와 내연의 관계였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비교적 공인된 소문에 속했다.

심지어는 고아들과 문란한 성관계를 일삼는다든지, 괴기한 행동을 한다든지 하는 등의 스캔들까지 그를 따라 다녔다. 그것이 좁은 베네치아에서 그의 체면에 손상을 입힌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퍼뜨린 추문들은 도리어 비발디를 유럽의 유명인사로 만든 측면도 있다. 비발디가 작곡한 작품의 수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다. 일례로 요즘은 잊혀져서 잘 공연되지 않는 오페라만도 무려 90곡이 넘는다. 물론 이것과 관련하여 그가 교회 수입에 만족하지 못해, 오페라를 통한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었다는 이야기도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 비발디만큼 다양한 장르의 곡들과 여러 악기에 대한 탐구로 음악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작곡가는 없었다.

그는 특히 협주곡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즉 그때까지 주류를 이루던 합주협주곡 양식을 탈피하여 독주 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독주협주곡 양식을 확립시켰다. 그는 또한 바이올린의 명수였는데, 특히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오보에의 특성을 세밀하게 파악하여 이 네 악기를 위한 협주곡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비발디의 최대 공적은 역시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으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일 것이다.

베네치아 고아장이나 거리를 걸어가면 젊은이들이 비발디 시대의 복장과 가발을 쓴 채 전단을 나누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길에서 연주를 하며 시선을 끄는 광경을 언제나 볼 수 있다. 이런 음악회들은 비록 관광객들을 겨냥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 번쯤 가볼 만하다. 그런 콘서트는 주로 베네치아 곳곳에 많은 오래된 성당에서 열리는데, 옛날 의상뿐 아니라 고악기(古樂器)를 사용하는 젊은 음악가들의 연주는 진지하고 꽤 들을 만하다.

베네치아의 크고 작은 연주회들은 대부분이 비발디의 곡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위대한 조상이자 선배인 비발디는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인 관광 상품으로 남아 비발디가 없는 베네치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비발디가 불과 1913년까지만 해도 일반 팬들에게는 거의 잊혀졌던 음악가였다. 즉 비발디가 베네치아를 떠나서 유럽을 전전하다가 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을 때, 이미 그의 음악보다도 스캔들에 지친 베네치아 사람들의 취향은 새로운 작곡가들에게도 옮겨갔다. 그리하여 객지에서 불행하고 외롭게 죽어간 비발디의 인기는 사후에 급속도로 식어버렸다.
유럽을 달구었던 열기만큼이나 그에 대한 냉기도 금세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그의 음악에 대한 복원과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2차대전 이후에야 그의 음악들은 엄청난 속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발디 부활의 선두에 선 것이 바로 <사계>일 것이다. <사계>는 이탈리아의 실내악단이 이 무지치(I Musici)의 녹음(필립스)에 의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래, 마치 다이너마이트에 연결된 뇌관을 건드린 듯이 불붙어 <사계>의 연주와 녹음에 붐을 일으켰다.

<사계>는 비발디가 작곡한 일련의 협주곡들 가운데 일부이다. 즉 바이올린 협주곡집인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Op.8에 들어 있는 열두 개의 협주곡들 중에서 처음 네 곡, 즉 제1번에서 제4번까지에는 각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부제가 붙어 있어, 이 네 개를 묶어 <사계>라고 일컫는다.

<사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의 하나가 각 곡의 앞에 이탈리아어로 쓰인 서투른 14행시(소네트)로 된 설명이다. 아마도 비발디가 직접 써넣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 소네트에는 당시 베네치아의 각 계절에 따른 풍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곡은 절대음악의 형식을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베네치아를 그린 풍경화를 대하듯이 묘사적이다.

특히 제1곡 ‘봄’은 가장 유명한 곡으로, 비발디가 거의 잊혀졌던 시대에도 이 곡만은 여전히 연주되었다. <사계>는 주제가 전체를 관통하면서 곡에 따라 조금씩 분위기가 바뀐다. ‘봄’은 새들이 지저귀고 냇물이 흐르고 들판과 목장에는 화창한 평화가 시작됨이 느껴진다. ‘여름’은 무덥지만, 번개와 뇌성이 함께하며, ‘가을’은 수확에 대한 농민들의 감사와 즐거운 축제를 그리고 있다. ‘겨울’은 차가운 비가 내리지만, 따뜻한 난롯가에 모여 앉아 누리는 휴식의 평온함을 묘사하고 있다.

<사계>만큼 많은 음반이 나와 있는 곡도 흔치 않다. 유명한 ‘이 무지치’의 연주부터 매끈하기 그지없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연주까지 다양한 형태와 해석들을 담은 음반을 접할 수 있다.

가장 큰 돌풍을 일으킨 것이 바로 비발디처럼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인 이탈리아 출신의 파비오 비온디(Fabio Biondi)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의 음반이다. 이 악단은 전원이 17세기의 고악기들을 사용하여 비발디 시대에 근접한 음색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 음반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파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이 해석이다. 그들은 강약을 특히 심하게 대비시키고, 리듬을 더 자극적으로 변화시키면서도, 마치 수면을 차고 날아오르는 듯한 가벼운 터치를 보여 그간의 <사계> 연주와는 완전히 차별화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석조 건물들이 비발디 때와 변함없이 3백 년 동안 서 있다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이탈리아의 젊은이들은 너무나 현대화된 청년들인 것이다.

글 출처 :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 시공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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