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
            / Edith Piaf 

Le ciel bleu sur nous peut s'effrondrer 
Et la terre peut bien s'ecrouler. 
Peu m'importe si tu m'aimes. 
Je me fous du monde entier. 
Tant que l'amour inondera mes matins, 
Tant que mon corps fremira sous tes mains, 
Peu m'importent les grands problemes, 
Mon amour, puisque tu m'aimes 

J'irais jusqu'au bout du monde. 
Je me ferais teindre en blonde 
Si tu me le demandais 
J'irais decrocher la lune. 
J'irais voler la fortune 
Si tu me le demandais 
Je renierais ma patrie. 
Je renierais mes amis 
Si tu me le demandais 
On peut bien rire de moi, 
Je ferais n'importe quoi 
Si tu me le demandais 

Si un jour, la vie t'arrache a moi, 
Si tu meurs, que tu sois loin de moi, 
Peu m'importe, si tu m'aimes 
Car moi, je mourrai aussi 
Nous aurons pour nous l'eternite 
Dans le bleu de toute l'immensite. 
Dans le ciel, plus de problemes. 
Mon amour, crois-tu qu'on s'aime? 

Dieu reunit ceux qui s'aiment ! 



  방송에서 물러난 지도 어느새 10개월.

   내 나이를 생각하면 더 일찍 물러났어야 했습니다. 커튼이 서서히 내려지는 “My Way”의 노랫말처럼 미련이나 후회보다는 나 스스로에게는 솔직히 분에 넘치는 세월이었습니다.

   전국의 20여개 도시 체육관을 돌면서 열광하는 1만 명 이상의 청취자와 만났던 경험은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낍니다. 체육관 입장권 배부처였던 여수의 어느 전파사는 폭탄 맞은 것처럼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춘천의 체육관 공개방송 때에는 소방대가 출동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강릉과 청주에서는 1만 명 이상이 입장하고도 미처 체육관에 들어오지 못한 청취자들의 항의로 방송녹음이 지연되었던 일도 있습니다.

   방송은 교양이 우선되어야 하고 공익이 앞서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방송은 철저하게 청취율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인사동 시절에 임국희 아나운서와 함께 했던 “한밤의 음악편지”는 내게 방송 최초의 청취율 승리를 안겨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가 청취율 1위에 올랐을 때 시민회관 무대에는 “이종환 쇼”라는 해괴한 프로그램이 올려졌고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에는 500만 서울 시민을 잠 못 들게 한…….운운하며…….

   1980년부터 맡아온 “이종환의 디스크 쇼”가 FM을 통해서 방송되고 있을 때 1986년에는 참으로 버겁기 짝이 없는 “여성시대”라는 프로그램도 맡겨졌습니다. 아침에는 AM에서 저녁에는 FM에서,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AM과 FM을 오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종환의 디스크 쇼”가 청취율에서 앞서 있었고 “여성시대”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불과 방송 6개월 만에 청취율 1위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파격이었습니다.

   회사가 연말에 실시하는 시상식에서 두 번의 대상을 받았고 서너 차례 특별 보너스란 것을 개인적으로 받은 기억은 있지만, 나는 동료 PD들과 별 차이가 없는 대우의 월급으로 그만 두는 날까지 일관했습니다.

   다른 출연자들이 대우 문제로 회사와 불편한 관계에 들어가면 나는 언제나 그 친구들을 나무라는 편에 섰기 때문에 다른 출연자들이 불편해 했다면 때늦은 사과를 하겠습니다.

   “택시 운전하는 아저씨들을 생각해봐라. 그래도 넌 많이 받는 거야.”

   방송을 그만두던 무렵에 족보가 있다는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았습니다. 이제 클 만큼 커버린 이 녀석은 낯선 사람이 얼씬거려도 짖을 줄 모릅니다.

   “야 이 개새끼야, 밥값은 해야잖아.”

   그러고 보니 나도 밥값을 못하고 있는 실업자였는데 말입니다.

   엊그제는 문득 에디트 피아프가 1962년 가을에 마지막 콘서트 무대에 섰고 그 이듬해 1963년 가을에 눈을 감았던 기억이 문득 떠오르면서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긴 시간 방황하는 것은 쓰레기다.”

   후회나 회한, 공과 과를 평가받거나 즐길 겨를도 없이 황급히 떠난 그녀의 선택, 그녀의 끝맺음은 너무나 훌륭했고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내게 미련은 없지만 사람들은 내게서 미련을 본다 할 것이고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나에게서 유령 같은 초라함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그만 두고 일 년 만에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것을 실현시킨 1962년 피아프는 그야말로 유령 같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이나 고통 받아온 중증의 관절염에 위궤양 수술과 담낭 제거수술, 기관지 폐렴으로 두 번, 폐수종으로 한 번 그리고 알코올 중독 치료를 네 번이나 받았으니 그 몰골이야 유령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세 번이나 당했던 교통사고의 후유증도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의사의 간곡한 명령을 무시한 채 “사랑이 무슨 도움이 되나요”를 부르면서 마지막 무대에 오른 에디트 피아프는 그대 나이 마흔일곱, 그런 그녀의 마지막 남편 테오 사라보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결코 길지 않은 생애를 오직 노래와 사랑으로 살다간 에디트 피아프, 그녀에게 주어진 모처럼의 충만한 사랑마저 하늘은 모질었습니다.

   1946년에 만나서 1948년에 결혼한 모로코 출신의 권투선수 Marcel Cerdan,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그는 1949년 10월 미국에서 공연 중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출발한 비행기를 탔다가 추락사합니다.

   그의 사망소식에 충격을 받은 피아프는 한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시는 Marguerrte Monnot에게 넘겨졌고 이 한 맺힌 절규의 노래는 그 이듬해 피아프의 울부짖음으로 초연되어 사람들이 가슴을 적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찬가”로 알려진 “Hymne A L’amour”입니다.


Hymne A L'amour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하여도 또 땅이 꺼져 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살아해 주시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을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친구도 버릴 용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웃는다 하여도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해내겠습니다.

  에디트 피아프가 죽었을 때 시인 장 콕토는 통곡하며 애도사를 준비했습니다. 그 애도사는 끝내 발표되지 못한 채 장 콕토도 심장마지로 그녀의 뒤를 따랐습니다. 피아프의유해가 묘지를 향했을 때 200만 명의 파리시민이 애도했습니다. 지금도 베르 라 셰즈 묘지에는 한 움큼의 낙엽이나 장미꽃이 놓여져 있다고 합니다.

글 출처 : 팝송은 죽었다(이종환, 리즈앤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