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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침묵의 나라의 목소리’의 불만스러운 짜깁기

1992년 옐친 대통령 방한에 즈음하여 비소쯔끼의 음반이 몇 종 발매되었다.

현재 ‘끼워팔기’되고 있는 체 게바라와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듯 옐친과 비소쯔끼 사이의 관계도 별다른 것은 없다(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 게바라는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 같은 음악을 ‘국제적 제국주의에 물든 향락적 음악’이라고 간주하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게바라를 ‘쿠바의 혁명가’라고 ‘국적’까지 은근슬쩍 바꾸는 한국인들의 행태는 정말 끔찍하다).

오히려 비소쯔끼가 당과 국가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했을 무렵 옐친은 당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CD 커버에 멜로지야라는 러시아 알파벳이 적혀 있고 멜로지야로부터 면허(라이센스)를 받았다는 문구도 적혀있지만, 오리지널 음반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부클릿은 ‘최소한의’ 두께로 되어 있어서 가사 번역은커녕 바이오그래피도 없다. 게다가 곡 제목마저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된 것만 있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혹시나 ‘한국에만 존재하는 편집 음반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뿐이다. 멜로지야에서 발매한 음반이 맞다면 ‘거기나 여기나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음반사가 대기업 계열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나면, 음반 사업에서는 ‘삼성이나 현대가 똑같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Vladimir’라는 철자는 ‘Bladimir’로 오기되어 있고, ‘Vysotsky’의 한국어 발음은 ‘비소스츠키’로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이야 그렇다 치고 컨텐츠는 어떤가. 첫 번째 트랙을 영화 [백야] 주제가로 한 것은 자연스럽고, 이는 이 음반 이외의 모든 편집음반들의 공통적인 특징일 것이다. 현, 나팔, 피아노 중심의 편곡 사이로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울부짖는 비소쯔끼의 ‘가래 끓는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기는 하다. “내 노래의 멜로디는 음계의 단순합보다도 단순하다. 하지만 내가 진실의 어조를 잃는 그 순간부터 마이크는 채찍이 되어 내 얼굴에 흉터를 남긴다”는 그의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하게 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골든 베스트’라는 이름과는 달리 선별된 곡들이 비소쯔끼의 경력의 상이한 국면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세대가 좋아하던 초기의 군가(military song) 스타일에서 후기에는 비가(sad song) 스타일로 이동했다”는 평을 신뢰한다면 이 음반은 ‘기성 세대 취향의’ 초기 레코딩 중심으로 선곡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 예로 11번 트랙 “That’s Us That Makes The Earth Go Round”의 경우, 1986년에 발매된 [Siynov’ya Ukhodiat V Boi(Sons Are Leaving For Battle)]에 실린 레코딩은 어쿠스틱 기타의 스트러밍 위에 일렉트릭 기타 라인을 얹어 젊은 세대에도 흡인력을 가질 만하지만(본문의 음원을 참고하라), 이 앨범에 수록된 레코딩은 군악대 풍의 구닥다리 편곡을 취하고 있다.

물론 아쉬운 대로 비소쯔끼 노래의 하나의 단면을 감상할 수 있기는 하다. 경쾌하지만 비장한 두 박자의 리듬이 전개되는 “She’s Been To Paris”와 “Moscow Odessa”, 세 박자 리듬과 샹송 풍 멜로디가 흐르는 “Cold Weather” 등은 그저 애상적이지만은 않은 러시아의 정서를 전달하고, 워킹 베이스 위에 전개되는 “Black Gold”나 셔플 리듬을 사용한 “White Silence”는 그가 재즈의 수용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오래된 군가 풍의 “That’s Us That Makes The Earth Go Round”와 “Yak Fighter Plane”은 여전히 귀를 잡아당기지 않지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위 평점이 ‘비소쯔끼의 음악’에 대한 점수가 아니라 ‘음반’에 대한 것, 정확히 말하면 음반의 ‘제작’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족이지만 이 앨범의 비닐 LP는 같은 해 킹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는데, 음반 커버는 판이하다. 이것도 참 한국적 현상으로 보인다. 단, 비닐 LP에는 가사의 한국어 번역이 있다.) 20010828 | 신현준

   

자유를 향해 절규했던 음유시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영화 '백야' 의 주제곡 'Say You Say Me', 야생마 는 구 소련 소비에트연방의 마르크스, 레닌, 엥겔스, 스탈린 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고통과 분노를 시로 표현하고 노래했던 처절한 울부짖음었고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민가수로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의 1980년대 초반작품 입니다.

구 소련시절 지식인들 사이에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저항가수로 많은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었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악의제국이란 비난을 듣던 시기인 1980년대 초반 어느 여름날 42살이 되던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의 유명한 음주벽 때문이라고 전해 지기도 하죠. 1980년대말 소련 정부는 그의 시와 노래가사의 출판을 허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는 1938년 1월 25일 모스크바 도심의 한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트로츠키와 부하린에 맞선 스탈린의 광기어린 숙청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였다.
유년기 때부터 자작시를 만들고 암송하는 등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보이던 비소츠키는 양친의 권유에 못 이겨 건축기사 양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중도에 학업을 중단한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기하학과 건축학과 친해질 수 없었다. 나는 배우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1956년 6월 비소츠키는 모스크바 예술 극단의 지부인 네미로비츠 단첸코 스튜디오의 배우학교에 입학하여 4년 동안의 배우 수업을 받는다. 1960년 4학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나 대부분 단역에 그쳤다.

그러나 이런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에 훗날 소비에트 대중 예술사를 완전히 뒤바꿔놓을 만한 조그만 사건이 잉태되고 있었다.
비소츠키가 친구들 앞에서 작곡한 첫 번째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레프코차리안이란 친구가 그의 음성을 카셋트에 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소츠키의 위대한 서정시는 소련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1961년 그는 푸쉬킨극단에 잠깐 몸담았으나 극단은 그를 정식배우로 고용하지 않았다. 그후 몇 편의 영화와 단역배우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세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스튜디오에서 비소츠키의 노래에 감동한 어느 배우가 방송국 엔지니어들을 동원해 그의 노래를 녹음한 것이다. 완벽한 기술적 프로세스를 거친 그의 노래가 드디어 모스크바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고뇌의 길을 걷던 한 무명가수에게 영광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후 25년간 비소츠키는 소련 대중예술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한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오로지 민중들의 것이었다.
당국의 눈에 그의 예술은 화약고처럼 위험스런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들의 진정한 우상이자 영웅이었던 그였지만 소비에트 독재정권의 완벽한 계략과 비소츠키 기피증은 그를 점점 우울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1980년 7월 25일 그는 영광과 명예, 핍박과 고난이 점철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다. 그는 가장 비이념적이고 가장 반스탈린적인 작가였다. 그는 민중들의 암울하고 비참한 일상 생활을 숨김없이 폭록하고 절규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일생을 통해 보편적인 진실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가수, 시인, 연극배우이기 전에 민중의 고통을 함께 체험해온 진실된 러시아의 아들이었다.
그의 시와 노래가 서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절충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소츠키의 독특한 창작 과정과 예술적 신념을 짐작하게 해준다. 실제로 그가 불렀던 모든 노래의 가사들은 그 자신이 일생을 통해 놀라운 창조력으로 제작한 시구들이었다.
그의 반항적인 목소리는 저항적인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적 도구이기도 했다. "저는 그들이 은폐하고 싶어 하는 사실을 폭로하고 싶었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비소츠키는 음악가이기 전에 러시아의 저항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모든 것들에 의문을 던진다.
그것이 단지 진부한 수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가 한 모든 말과 그가 쓴 모든 시, 그리고 그가 부른 모든 노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단순한 음유시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또한 뮤직홀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의 시와 노래 속에 가장 비밀스런 복잡성을 가장 분명한 단순성과 혼합하여 자신의 극적인 의도를 여러 가지 뉘앙스로 표출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수 비소츠키로서 공연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음악성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의 음악은 소비에트의 음악이기 이전에 러시아 민중의 노래였다.
둘째, 그의 음악은 진정한 포크음악이다.
셋째, 그의 음악은 그 스스로 여러 번 말했듯이 음악화된 시낭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