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원장현

  1. 출생
    대금명인 원장현(元長賢)님은 1950년 12월 27일, 전남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368번지에서 부친 원광준님과 모친 신귀례님 사이에서 4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부친 원광준님은 일찍부터 국악을 좋아하여, 젊은 나이인 20세 이전에 당시 유명한 단소 연주자이면서 국악인인 추산(秋山) 전홍련을 담양으로 모셔와 향제풍류와 남도 삼현 가락을 대금과 단소 두루 수학했지만, 당시에는 음악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던 때라 음악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원장현님의 숙부인 원광호님은 신쾌동님과 한갑득님에게 거문고를 배워 훗날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 예능보유자가 되었습니다.

  2. 국악공부
    원장현님은 열 다섯살 무렵(1966년) 처음으로 화순 출신인 김용기님에게 대금을 배워 겨우 김을 넣을 정도의 소리를 낸 뒤, 타고 난 국악 재질을 바탕으로 곧바로 4년 가까이 서울여성국극단(단장 박미숙)에 입단하여 김청만님, 백인영님 등과 함께 국악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영화나 TV가 안방을 차지하면서 여성국극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흥행이 되지 않을 때라,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사이에 가끔 광주에서 오진석님에게 향제 풍류를, 서울에 올라가 김동진님에게 대금산조를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민속음악의 달인인 한일섭님을 만나 구음(口音)으로 대금 가락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즘처럼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는것이 아니라 공연이 없을 때 가끔 한번씩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횟수로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훗날, 원장현님은 대금공부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부친의 대금소리였다고 술회하면서, 부친께서 대금 공부를 계속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기도 했습니다.

    원장현님이 한일섭님을 만나 공부한 시기는 한일섭님이 당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이었다고 합니다. 한일섭님은 1968년부터 1973년 작고하실 때 까지 국립예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으므로 1973년 무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장현님은 당시의 한일섭님이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던 시기였지만, 비록 한일섭님이 대금을 불지 못한다 해도, 민속음악의 달인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가 공부를 했습니다. 한일섭님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가르쳐 주지 못해도, 소리 속을 훤히 알고 있어서 말로 설명을 하고, 원장현님은 그것을 대금소리로 받아 만들어 내면서 나름대로의 소리세계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도 잡을 수 없는 선생님의 추상적인 소리를 듣고 구체적인 소리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나의 가락을 수백, 수천번 대금으로 불어가면서, 원장현님은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소리의 세계를 만드셨던 겁니다.

    원장현님은 10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대금 공부를 시작하여 국극단에서 활동하면서 현장감이 생생한 공부를 해 왔고, 나중에는 민속음악의 귀재라 불리던 한일섭님으로부터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즉흥적 대금반주라던가, 수성가락 대금연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던 겁니다.

    한 때는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목숨과 소리를 바꿔야 할 정도로 심한 갈등과 고뇌를 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공부 과정을 마치고, 1970년에 약 4년여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에 정착했는데, 당시 대구지역은 대금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활동하기가 좀 나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영남국악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국악학원을 운영하면서 피나는 연습을 하여, 1978년 대구에서 처음으로 대금 산조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대구에서 10년 동안 학원운영과 음악생활을 하다가, 사정상 대구 생활을 접고 1981년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약 2년 동안 개인 활동과 더욱더 피나는 노력으로 음악세계를 넓혀가고 연주 활동도 했는데, 1983년 국립국악원 민속음악연주단의 아쟁 연주자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이 무렵 서용석, 박천택, 박종선, 김무길, 한세현 같은 분들과 같이 근무했는데 원장현님은 거문고, 대금, 태평소, 가야금 등 여러 악기의 연주가 능하여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국립국악원에 있는 동안 대금연주자로는 많은 활동을 못한 이유가, 어릴적 소꼴을 베다가 낫으로 왼쪽 식지를 다쳐 구부리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대금을 잡고 연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국립국악원에서 만든 음반을 보면 대금 보다는 거문고나 다른 악기를 연주한 것이 많습니다. 거문고는 어릴적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1984년에 한갑득 거문고 명인님을 통해 정식으로 공부를 마치고 정해진 과정을 이수하기도 하였습니다.

  3. 음악적 특징
    여러 사람들이 원장현님의 대금소리를 듣고 그 특징을 이야길 할 때 다음의 두 가지를 많이 언급합니다. 첫째는 자연을 닮은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요, 둘째는 남도의 정서가 듬뿍 배인 가장 남도가락적인 소리라는 겁니다.

    담양의 대나무 밭에서 태어나, 부친의 대금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대나무와 친숙한 자연적인 소리라는 말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평가일 겁니다. 또한 어린 나이에 대금에 입문하여 곧 바로 국극단에 몸을 담고 당대 기라성 같은 스승님들로부터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실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하였던 겁니다. 그리고 민속음악의 귀재요 달인이라는 한일섭님께 구음을 전해 듣고, 수백, 수천번씩 따라 부르며 대금가락으로 다듬어 만들어 낼 때 얼마큼 피나는 노력을 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의 공부였지만, 원장현님의 대금산조 가락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한일섭님과의 만남과 대금수업은 가장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일섭(1927~1973)님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13세 때 소년명창 칭호를 얻을 만큼 판소리에 능했고, 고법에도 남 다른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쟁산조와 태평소 시나위를 만들었고, 많은 창극을 작곡하였습니다. 원래 소리를 공부하여 명창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목을 다쳐 소리보다는 기악, 작곡, 고법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통 민속 음악에 통달했던 한일섭님은 자유자재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록 대금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박종기님의 대금산조를 많이 들어왔고, 또한 오랜 세월동안 한주환님과 함께 활동하면서 한주환님의 대금 산조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후 김 동진, 이생강님을 가르친 바도 있으며, 생애 마지막으로 자기의 음악을 원장현님에게 가르쳤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원장현님의 대금산조를 이야기 할 때 한일섭님의 음악적 영향과 원장현님 자신의 풍부한 음악적 경험과 피나는 노력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장현님을 즉흥연주의 대가요, 시나위 연주의 명수요, 기악연주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위와 같은 탄탄한 토대위에서 피눈물 나는 스스로의 노력의 결과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글 출처 : 다음카페 '원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