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수 2집 약속의 땅(1988)
1988 / 동아기획 2012 / 리듬온 레코드 사실 김두수의 네 번째 음반이 2002년에 발매되기 전까지 김두수는 그저 몇몇 사람만이 아는 뮤지션이었다. 그 이유는 그의 활동이 일반적인 대중매체를 이용한 활동이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그의 건강 때문에 지속적으로 이어올 수 없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볼 때 그 음악성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소위 ‘언더그라운드 포크 3인방’으로 불리는 나머지 뮤지션들인 이성원, 곽성삼 역시도 비슷한 경우에 해당하는 뮤지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두수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다시 거론되게 된 것은 그의 3집 음반 [보헤미안]이 발매되었던 1991년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집단은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청자들이 아니라, 해외의 프로그레시브록 마니아들이었다. 1980년대의 심야 FM 프로그램들은 수많은 유로피안 프로그레시브록 열혈 추종세력을 양산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러한 마니아층을 겨냥한 프로그레시브록 음반들이 수입되었고 또 라이선스 음반발매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어느 특정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 집단들이 늘 그렇듯이 이들은 정작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반들의 구매가 용이해지자, 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남들이 갖지 못하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갖기 위한 욕구의 또 다른 표출이랄까. 어쨌든 이들의 레이다에 걸린 음반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김두수의 3집 [보헤미안]이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진행과 악기의 편성, 또 냉소와 온화를 함께 간직한 목소리 등 그 비교의 대상이 없던 독특한 음악세계에, 순식간에 기존 프로그레시브록 마니아들은 매료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음반은 ‘희귀음반’이었다. 이 음반을 시작으로 김두수의 음악을 역추적해간 이들은 곧바로 이전의 음반들인 [시오리길 / 귀촉도](1986)와 [약속의 땅 / 철탑위에 앉은 새](1988) 역시도 발매와 함께 희귀음반이 되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팔리지 않아 재고가 되어버린 음반을 찾으려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하지만 발매될 당시 단 한 점의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던 김두수의 음반을 남겨둔 음반숍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당시는 LP시대가 막을 내리고 CD시대가 도래하는 시기였다. 음반숍에선 새로 발매되는 몇몇 음반들 외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기존 재고 LP들을 이러한 핑계로 반품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면 당연히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 시장 경제의 원칙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김두수의 음반들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랐고, 현재도 비슷한 시기에 발매된 음반들 가운데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희귀음반이라고 모두 고가에 거래되지는 않는다. 비싼 음반이라고 그것이 곧바로 음악성과 정비례한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CD로 재발매 되었지만 김두수의 LP들이 중고시장에서 고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희소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음반이라는 이야기에 대한 방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데뷔앨범에 대한 아쉬움은 없지 않다. 그 첫 번째는 재킷의 아트워크다. 1집 재킷은 김두수의 의사와 달리 제작사의 횡포로 앞면과 뒷면이 바뀌어 발매되었다. 원래 뒷면에 작게 들어간 우당 윤해남의 그림을 앞면으로 하고 앞면의 김두수 얼굴이 뒷면에 작게 들어가게 하려 의도했지만, 그 반대가 된 것이다. 때문에 음반에 담긴 독특한 음악성과 달리 당시 발매되던 천편일률적인 ‘가수’들의 음반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더욱이 작게 사용하려 했던 사진을 억지로 크게 늘인 나머지 작은 사진을 확대복사 했을 때처럼 픽셀이 뭉개져 더욱 구매의욕을 떨어뜨린다. 만일 김두수의 의도대로 음반이 발매되었다면 1집에서 3집까지를 한 번에 펼쳐놓고 봤을 때 유사하지만 조금씩 변화되는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더욱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일관된 ‘작품’으로서의 의미 역시도 부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녹음에 관련된 문제다. 데뷔앨범은 이미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스튜디오 작업에 ‘7프로’의 시간만이 사용된 음반이다. 1프로는 일반적으로 3시간 30분을 의미한다. 양질의 음원을 뽑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제작사 측에서는 그의 음악에 대중성이 없다는 핑계를 들어 전반적인 음반의 정서에서 벗어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끼워 넣었다. 물론 청자들로서는 김두수식으로 재해석한 이 버전이 색다른 디저트가 되었지만, 어쨌거나 음반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떨어트린다는 생각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아쉬움은 모두 김두수의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음악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제작되었던 음반에 있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음악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던 ‘동아기획’에서 발매된 두 번째 음반은 김두수에게 있어서 전작과 같은 제작상의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고, 그 결과 역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음반의 아트워크는 LP의 앞면 첫 번째 곡에 해당하는 ‘약속의 땅’, 혹은 뒷면 수록곡인 ‘내 영혼은 그저 길에 핀 꽃 이려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듯 메마른 황토흙을 뚫고 올라오는 하나의 식물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식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6현의 기타줄임을 알 수 있다. 길게 늘어진 뿌리에 반해 이제 막 땅 위로 올라온 듯 보이는 줄기 부분이 데뷔앨범의 불만을 딛고 새롭게 꽃을 맺으려는 김두수 자신의 의지와도 같이 보인다. 데뷔앨범과 두 번째 음반의 표면적인 차이점은 아트워크 외에도 수록된 동일한 곡을 비교해보면 더욱 명쾌하다. 데뷔앨범에는 원래의 제목을 사용하지 못하고 ‘작은 새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던 ‘철탑 위에 앉은 새’와 ‘꽃묘(시오리 길 II)’가 이에 해당하는 곡들이다. 두 곡 모두 데뷔앨범에 비해 두 번째 음반 수록 버전이 코러스가 강조되었고, 더욱 치밀한 편곡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비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라기보다 보다 오래 스튜디오를 사용하면서 후반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라고 보는 게 좋다. 특히 ‘철탑 위에 앉은 새’는 노래의 진행 순서를 도치시킴으로 상여가 지나가는 곡 본연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내고 있다. 이후 4집 음반에 ‘나비’라는 타이틀로 다시 수록되는 ‘나비야’는 재수록 버전에 비해 조금 더 빠른 스텝으로 진행되며 컨트리와 토속적인 정서를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이러한 그의 토속적인 정서는 단순히 동양의 5음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펜타토닉 스케일에 의존하지 않고 ‘약속의 땅’, ‘새우등’, 그리고 ‘청개구리 수희’와 같은 곡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디미니시 스케일로 표현된다. 토속적인 포크를 표현하는 여타 뮤지션들과 김두수의 음악이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이점 때문이다. LP의 뒷면에 자리하고 있는 ‘황혼 (Part I, II)’와 ‘신비주의자의 노래’는 앞서 김두수의 음악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프로그레시브록 마니아들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트랙들이다. 서리은의 아름다운 스캣이 코러스와 함께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며 이에 이어지는 바람소리와 장중한 오르간 연주가 등장하는 ‘황혼 (Part I)’은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록 밴드들의 심포닉한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낭송을 어쿠스틱 기타와 차가운 음색의 키보드로 서포트하는 ‘신비주의자의 노래’는 독일의 명상음악 계열 음악을 듣는 듯 내면에 침잠한다. 데뷔앨범의 적잖은 아쉬움은 컨트리에서 재즈, 프로그레시브록을 한국적 정서와 이상적으로 융합한 이 음반을 통해 대부분 해소되었고, 비로소 김두수는 노래하는 한 명의 가수가 아니라 총체적인 음악을 관장하는 뮤지션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하지만 음반의 발매 직후 이번에는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음반은 발매되었지만 그렇게 제대로 홍보되지 못한 두 번째 음반 역시도 글의 첫 부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희귀음반의 수순을 밟았다. 그리고 3년 뒤인 1991년 발매된 세 번째 음반에서 두 번째 음반의 아트워크에 등장한 한포기의 풀처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그의 음악이 그 길다란 뿌리에서 받아들인 자양분을 통해 장성한 나무의 모습으로 완벽한 완성을 이루게 된다. 글 : 송명하 (2012. 2. 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