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Gennady Rozhdestvensky(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Recording : 1987. All Saints, Toothin. London

Total Time 00:59:58

Symphony No.6 in b minor, Op.74. 'Pathetique'

작품 개설 및 배경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b단조 Op.74)에는 아시다시피 ‘비창(Pathetique)’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번호가 붙은 교향곡 중에서 표제를 지닌 것은 1번과 6번입니다. 1번 g단조에는 ‘겨울날의 환상(Winter Daydreams)’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지요. ‘겨울날의 몽상’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제6번에 붙어 있는 ‘비창’은 이 곡의 초연(1893년) 직후, 차이코프스키의 동생 모데스트가 지은 이름입니다. 모데스트는 차이코프스키의 매니저와도 같은 역할을 했지요. 우유부단하고 내향적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동생 모데스트에게 적잖이 의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형과 동생이 거꾸로 된 것이지요.

초연 직후에 차이코프스키가 모데스트에게 표제를 붙이고 싶다는 의향을 말하자, 모데스트는 ‘비극적’이라는 표제가 어떻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그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잠시 생각을 굴린 모데스트가 “그러면 ‘파테티체스키’(러시아말로 ‘비창’)는 어떠냐?”고 하자 “그래 모디, 좋구나!”라며 동의했다고 하지요. 이 유명한 에피소드는 모데스트가 쓴 차이코프스키 전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정확한 진위를 판명하기에는 좀 애매합니다.

1번과 6번 외에도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에 제목이 붙는 경우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컨대 2번 ‘소러시아’, 3번 ‘폴란드’가 그렇지요. 이 이름들은 공식적인 표제가 아니라 그저 ‘별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출판된 악보에 기록된 공식 표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2번의 경우에는 1악장과 4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민요 선율이 사용되고 있어서 ‘소러시아’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20세기 초반까지 소러시아로 통칭됐지요. 또 3번은 마지막 5악장에 폴란드의 춤곡인 폴로네즈가 등장해서 ‘폴란드’라는 별칭을 얻게 됐습니다.

6번 ‘비창’은 차이코프스키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해에 작곡됐지요. 그야말로 절망의 심연을 더듬는, 그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곡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레퀴엠’을 인용하고 있는 1악장은 물론이거니와, 느리고 우울하게 소멸하는 4악장도 절망의 극치를 보여주는 피날레입니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삶과 죽음, 그것이야말로 ‘비창’이 묘사하고 있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말하자면 차이코프스키의 비관적 인생론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교향곡입니다.

교향곡 4번과 5번에서도 차이코프스키의 비관이 드러나지만 6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한층 어둡게 표출됩니다. 예컨대 5번만 해도 차이코프스키의 어떤 동경과 그리움 같은 것이 음악 속에 담겨 있지요. 특히 3악장에서는 따뜻함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전해집니다. 마지막 4악장에서도 완벽한 절망으로 추락하지 못하고 절충적인 피날레를 선택하지요. 하지만 오늘 들을 6번의 마지막 악장은 완전한 비관주의를 드러냅니다.

그렇다고 이 곡이 차이코프스키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작곡했던 음악인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음악이라고 얘기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5번 교향곡에서도 언급했듯이 차이코프스키는 연주여행이 아주 잦았는데요, 1892년 말부터 다음 해 초에 걸쳐 서유럽 여행을 다녀온 직후, 모스크바 북서쪽의 도시 클린((Klin)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교향곡 6번을 스케치합니다. 그해 2월에 동생 아나톨리(모데스트와 쌍둥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운 곡을 쓰고 있단다. 이 곡은 틀림없이 내 최고의 작품이 될 거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4월 무렵에 교향곡 6번의 스케치를 끝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생애 마지막 날들을 지내던 클린 시에 있는 집. 지금은 차이코프스키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할 수가 없었지요. 마지막 피아노 작품인 <18개의 소품>, 또 최후의 가곡집인 <6개의 로망스>를 작곡하느라고 교향곡 6번에서 잠시 손을 놓습니다. 이어서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는데요, 이것이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여행이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 산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교향곡 4번을 연주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지요. 클린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8월에 다다라서였습니다.

그는 얼마 후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아들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페이지를 쓰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단다.”라면서 교향곡 6번을 마무리하기가 영 만만치 않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 조카 다비도프도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데요, 자식이 없었던 차이코프스키는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였다는 말도 있지만, 이 역시 진위가 불분명한 설입니다. 어쨌든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을 사랑하는 조카 다비도프에게 헌정하지요. 이 조카도 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13년 뒤에 자살로 생을 마칩니다.

초연은 같은 해 10월 28일,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음악협회의 연주회에서 차이코프스키가 직접 지휘해 이뤄집니다. 그리고 9일 뒤에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의문의 죽음을 맞지요. 애초에 발표된 사인은 콜레라였습니다.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셨다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이 죽음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콜레라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것은 사실이지요. 러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몇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어딘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1978년에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둘러싼 다른 사연이 제기돼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킵니다. 클린 시의 차이코프스키 박물관에서 일하던 소련의 음악학자 오를로바가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은 비소 중독에 따른 자살이라고 발표했던 것이지요. 사연인즉슨 이렇습니다. 동성애자였던 차이코프스키가 한 귀족의 손자와 연인 관계로 지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귀족이 차이코프스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투서를 썼다는 것이지요. 그 투서를 전달받은 사람이 다름 아닌 차이코프스키의 법률학교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법률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동창들을 소집해 비밀법정을 열었고, 그 결정에 따라 차이코프스키가 자살하도록 압박했다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그것을 엄청난 불명예로 여겼던 당시의 상황에 비춰 보자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오늘날에는 콜레라 설보다 오히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인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하나의 설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교향곡 6번 ‘비창’은 그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차이코프스키의 실제 죽음과 결부되면서 ‘마지막 비극’이라는 신화성을 한층 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가 실제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이 곡을 작곡했을 리는 없었겠지요.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교향곡 6번에 차이코프스키가 느꼈을 절망이 짙게 드리워진 것은 분명합니다.


1893년 차이코프스키의 장례식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과 장례 행렬.


곡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Adagio - Allegro non troppo. b단조, 4/4박자. 소나타 형식

1악장 서주의 아다지오 선율, 콘트라베이스가 저음으로 연주하는 침울한 멜로디부터 그렇습니다. 뒤따라 파곳이 흐느끼듯이 연주되다가 현악기가 이어받습니다. 이 서주를 그대로 이어받아 리드미컬한 첫 번째 주제가 펼쳐집니다. 점점 고조되면서 불안감을 증폭시키지요. 잠시 후 템포가 확연히 느려지면서 현악기들이 애절하게 연주하는 두 번째 주제가 제시됩니다. 클라리넷, 파곳이 그것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다가 1악장 중간 지점인 발전부에 들어서면 갑자기 음량이 고조되면서 리듬이 강력해지지요.

금관이 격렬하게 포효하면서 콘트라스트를 고조시킵니다. 이렇듯이 6번 ‘비창’에는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의 극단적인 대비가 등장합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들으면서 오디오의 볼륨을 조절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종결부에 들어서면 현악기들이 피치카토를 둥둥 울리는 가운데, 관악기들의 부드럽고 쓸쓸한 선율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제2악장 Allegro con grazia. D장조, 5/4박자, 세도막형식.

2악장은 5분의 4박자로 이뤄진 비틀거리는 춤입니다. 러시아 민요에 빈번히 등장하는 리듬입니다. 아름다운 노래의 느낌이 물씬한 선율이 엇박자의 춤처럼 전개됩니다. 교향곡 5번의 3악장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차이코프스키의 매력이자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발레의 분위기를 풍기는 악장입니다. 하지만 이 춤은 뭔가 불안한 느낌을 내포한 채 흘러갑니다. 특히 종결부가 그렇습니다.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으로 끝납니다.

제3악장 Allegro molto vivace. G장조, 4/4박자. 스케로초와 행진곡을 합친 두 도막 형식

3악장은 조잘대며 시작합니다. 약간 장난을 치는 듯한 스케르초 풍의 악장인데, 2악장과 마찬가지로 춤곡의 분위기가 두드러집니다. 3악장의 주제는 차이코프스키가 사랑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타란텔라 무곡을 차용하고 있는 까닭에 ‘타란텔라 주제’라고도 불립니다. 종결부에서는 행진곡 풍으로 달려가다가 팀파니와 관악기가 어울려 명확하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비창’의 4개 악장 중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종지부를 지닌 악장입니다.

제4악장 Finale- Adagio lamentoso. b단조 3/4박자. 세도막 형식

이 곡은 전체적으로 느린 1악장, 빠른 2악장과 3악장, 그리고 다시 느린 4악장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교향곡의 4악장은 빠른 템포로 펼쳐지는 법이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완전히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비창’의 4악장은 아주 느릿하게 문을 열면서 앞의 두 악장과 확연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앞서 언급했던 차이코프스키의 비관적 운명론이 집약돼 있는 악장입니다. 두 개의 주제 선율은 모두 밑으로 하강하면서 비통한 분위기를 펼칩니다. 슬프게 울고 있는 것 같은 첫 번째 주제가 여리게 흘러나오다가 관현악 총주로 한차례 치솟아 오릅니다. 그랬다가 다시 꺼질 듯이 가라앉습니다. 호른의 뒤를 따라 현악기들이 여리게 연주하는 두 번째 주제도 흐느끼는 듯한 클라이맥스를 구축했다가 역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우울함을 뛰어넘어 낙담과 절망, 체념을 느끼게 하는 악장입니다. 힘없이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그렇습니다.

글 출처 : 다음 블로그 '라라와 복래'

Overture 'The Storm' Op.76

[20세기 오페라 - 러시아 오페라]

19세기 말에 전위로서 위치하는 러시아 악파는 반성의 한시기에 있었습니다. 민간 전승의 서사적 동화는 여전히 이용되고 있었으나 아렌스키(1861-1906)의 라파엘(1894)이나 박학한 세르게이 타네예프(1856-1915)의 매우 아름다운 오레스테아(1895)와 함께 다른 테마도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또 그레차니노프(1864-1956)의 사랑스런 도브리니아 니키티치(1903)등에서는 그것은 좀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레비코프(Vladimir Ivanovich Rebikov,폭풍 속에서[1894]) 니콜라이 체레프닌에서는 프랑스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한편 루프 Ruf'(1887)나 아차 Atya(1900)를 쓴 이폴리토프 이바노프(1859 - 1935), 세르게이 니키포로비치 바실렌코(Sergei Nikiforovich Vasilenko), 코로스첸코(Koroschenko), 루이센코(Luisenko), 바실리 파블로비치 솔로비요프 세도이(Vasilii Pavlovich Solov'ev Sedoi) 및 그루지아인 자하리 페트로비치 팔리아시빌리(Zakharii Petrovich Paliashvili), 압살론과 에테리[1919]) 등에게 있어서는 지방의 특색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영향이 강한 것은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칼린니코프(Vasilii Sergeevich Kalinnikov), 보리스 황제[1897])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으로는 알레코(1892)와 그것에 이어지는 대담한 드라마 인색한 기사(1899-1904),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906)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류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다양한 국제색의 풍부한 재능을 펼친 것이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에프이지요. 스트라빈스키는 밤 꾀꼬리(1914 파리)에서 부분적으로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원용하고 있으며, 마음에 드는 소극(笑劇) 마브라(1922)에서는 글린카와 다르고미슈스키를 이어놓고 있습니다. 그 뒤 1951년에 과거의 모든 어법의 깊은맛이 있는 파스티쪼 난봉꾼의 행각을 베네치아에서 영어로 초연하였습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는 노름꾼을 쓴 뒤 러시아를 떠나 시카고에서 카를로 고치(Carlo Gozzi)원작의 풍자적인 희극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1921)을 프랑스어로 상연했습니다. 그리고 1927년에 극적으로 불의 천사를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후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에서 상연되었습니다. 소비에트로 돌아온 뒤로는 시메온 코트코(1939)에서 민중의 인간성을 찬양하고 수도원에서의 약혼(1940-41)에서는 유머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1941-52)에서는 서정시적 재능을 나타냈습니다.

40년 동안 매우 풍부한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갖춘 변함없는 자연스런 선율의 자질에 충실했던 프로코피에프는 푸치니와 야나첵, 슈트라우스와 아울러 20세기의 위대한 고전파의 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그 탄생 때부터 자기 나라의 참다운 음악가들을 빼앗기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은 순종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시대 착오적인 글리에르(1875-1956)에게만 기댈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 내야 하는데 이윽고 그 세대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라는 압도적인 천재에 지배받게 됩니다.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에 고골리의 코에서 착상을 얻어 유럽 전체의 수준에서도 지금까지 없었을 만큼의 대담하고 풍자적인 작품을 써냈습니다. 후에 스탈린이 서정적인 강도에 찬 걸작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1934)을 비난하자 자작을 손보지 않을 수 없게된(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1959]) 그는 유머러스한 오페레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노름꾼의 완성을 포기하게 되지요. 정부의 방침은 누구로부터 재능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으며, 신체제에 의해서 착상을 얻은 최고의 작품은 민주화의 엄한 명령이전에 씌어진 의 폴리나 괴블(1925)로 이어집니다. 이 작품은 그 후 1938년에 <데상브리스트>라고 제목을 고쳤는데 이러한 예는 과거에도 위그노 교도에서 토스카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있었던 일입니다.

판첸코(Panchenko)나 트리오딘(Triodin), 글라트코프스키(Gladkovskii), 프루사크(Prussak) 등이 잠깐 사이에 쇠퇴해 버린 소박한 미학에 따르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착상의 테마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시쇼프(Shishov), 포토츠키(Pototskii), 크레인(Krein), 바실렌코(Vasilenko) 등의 오페라인데, 특히 레프 콘스탄티노비치 크니페르(Lev Konstantinovich Knipper,1898-1974)의 <북풍>(1930)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반 이바노비치 제르진스키(Ivan lvanovich Dzerzhinskii)의 매우 딱딱한 (고요한 돈 강)(1935), 시슈코(Shishko)의 <포템킨>(1937), 젤로빈스키(Dzelobinskii)의 <어머니>(1939), 참을성 있고 한결같은 티혼 흐레니코프(1913- )의 폭풍속으로(1939)조차도 엄격한 아카데미즘 때문에 무해무덕하고 무덤덤한 작품이 되고 있었습니다.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의 코라 브뢰뇽(1938)이 이 감상적인 민간전승을 더욱 강하게 주장한 뒤에 전쟁 중에는 기악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최고의 음악가들은 대본에 과해진 규범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어느 정도 어법이 자유화되자 새로운 세대는 조심스럽게나마 해방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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