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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01 - 04. Symphony No. 1 In g minor, Op. 13 ‘Winter Dreams’
Vilaimir Fedoseyev(Conductor)
Tchaikovsky Symphony Orchestra of Moscow Radio
1998년 Licensed from Relief Records
05. 1812 Ouverture: Festival Overture In E Flat Op.49

Alexander Gibson(Conductor)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1989년 Licensed from Phoenix Music Ltd, UK

Total Time 58:36
I. Symphony No. 1 In G Minor, Op. 13 ‘Winter Dreams’

작품의 배경 및 개요

이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첫 번째 교향곡이다.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를 대표하는 교향곡 작곡가임을 감안하면 공연장에서 접할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아 아쉬운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음악원 수업을 갓 마친 청년 차이코프스키가 특유의 열정과 감수성으로 빚어낸 이 작품은 상당히 매력적인 가작이다. 특히 이 작품은 순수 교향곡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교향시적인 성격을 띤 표제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끈다.

이 교향곡에는 ‘겨울날의 백일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아마도 러시아의 백야의 그 눈 덮인 광활한 대지 위로 떠오르는 환상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나아가 처음 두 악장에도 별도의 표제들이 붙어 있어서 음악 외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아울러 마지막 악장에 차용된 가요선율은 토속적인 색채를 한층 부각시킨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조국에 대한 애착과 동경, 그리고 환상을 노래한 청년 차이코프스키의 초상을 엿보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만만치 않은 산고를 거친 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차이코프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는 ‘형의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많은 노력과 고생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순탄치 않았던 작곡 과정

186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그 이듬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개원 준비 중이었던 모스크바 음악원의 책임자는 그의 스승인 안톤 루빈스타인의 동생,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었는데, 차이코프스키가 첫 교향곡에 도전한 데에는 아마도 니콜라이의 권유와 격려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봄,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 시절의 작품인 <서곡 F 장조>가 성공을 거두자 용기를 얻어 생애의 첫 대작인 <교향곡 1번>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는 밤낮 없이 스케치에 매달렸는데, 교수로서의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얼마 못 가서 체력이 바닥났다.

그런 상황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졸업 작품인 칸타타 <환희의 송가>가 혹평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다.

하지만 그는 불면증과 두통 그리고 환각에 시달리면서도 작업을 이어 나갔다. 대로는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엄습해 왔지만, 그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그는 작업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그가 안톤 루빈스타인에게 작품을 보이면 자문을 구했을 때, 스승의 반응은 냉담했다. 안톤은 제자에게 작품을 고쳐 쓰라고 말했고, 차이코프스키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가을과 겨울에 걸쳐 개정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스승의 반응은 중간 두 악장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시연에서는 스케르초 악장만이 단독으로 연주되었는데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두 달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느린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이 연주되었을 때는 청중이 상당한 호응을 보냈다. 이 때 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었는데, 아니 니콜라이의 호의와 격려가 없었다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고고에 대한 도전은 첫 단계에서 그냥 좌초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차이코프스키의 첫 교향곡은 1868년 2월 15일, 모스크바에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당연히 니콜라이에게 작품을 헌정했다. 그리고 그는 1874년에 이르러 작품에 추가적인 개정을 가했고, 이 최종 개정판은 1883년 12월 1일 모스크바에서 ‘막스 에르트만스되르퍼’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모로 미숙한 작품이지만, 본질적으로 성숙된 작품들보다 재료 면에서 풍부하고 낫다’고 설명했다.

작품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Daydreams Of A Winter Journey' Allegro Tranquillo g minor, 2/4 박자
첫 악장의 표제는 '겨울 여행의 꿈들'이다. 먼저 러시아풍의 제1주제가 플루트와 파곳에서 등장하여 활기찬 리듬을 타고 흐른다. 마치 트로이카(세 필의 말이 이끄는 러시아 썰매)가 경쾌한 방울소리를 울리며 눈밭을 가로지르며 달려 나가는 듯하다. 클라리넷으로 제시되는 제2주제는 한결 유려한 느낌으로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우수를 머금고 있다. 때론 상쾌하고 대론 긴박하며 때론 신비롭기가지 한 겨울날의 여행이 드리마틱하게 펼쳐진다.

제2악장 Land Of Gloom, Land Of Mist: Adagio Cantabile, Ma Non Tanto, Eb major, 4/4 박자
둘째 악장의 표제는 '황량한 땅, 안개의 땅'이다. 악음기를 끼운 현악기들의 은밀한 합주로 시작되는 아다지오 간타빌레의 느린 악장으로, 오보에에서 흘러나와 점차 현악기들로 번져 나가는 러시아풍 선율이 사뭇 애절하면서도 감미롭다. 마치 안개가 피어오르듯 몽환적인 느낌으로 가즉한 매혹적인 악장이며,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호른 연주도 인상적이다.

제3악장 Scherzo: Allegro Scherzando Giocoso c minor, 3/8 박자
셋째 악장은 앞선 악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환성적인 스케르초 악장이다. 세분된 바이올린 파트와 목관 사이를 오가는 주선율이 현의 피치카토와 어우러지며 경묘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을 자아내는 스케르초도 흥미롭고, 바이올린과 첼로가 표정 풍부한 선율을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춤곡 리듬에 실어 노래하는 트리오의 낭만적인 풍미가 특히 일품이다.

제4악장 Finale: Andante Lugubre - Allegro Moderato g minor, 4/4 박자
마지막 악장은 비장한 느낌을 주는 느린 도입부로 시작된다. 이 부분에서 현악기 선율은 1861년 카잔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대 불렸던 민중가요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이 선율은 주부에서 제2주제로 다시 등장하는데 그때는 다분히 선동적인 느낌이다.

주부는 두 개의 박진감 넘치는 주제를 바탕으로 하여 격정적으로 전개되는데, 특히 재현부 이후의 흐름이 무척 이채롭고 인상적이다. 즉 제2주제가 재현되다가 말고 다시 도입부의 악상으로 올아갔다가, 점진적인 고조를 통해서 더욱 거창하고 누부신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글 : 황장원 / 음악 칼럼니스트, 교양강좌 전문강사

II. 1812 Ouverture: Festival Overture In E Flat Op.49

1812년 9월, 나폴레옹 60만 대군이 모스크바 공격에 나섰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초토화 시켜버림에 결국 나폴레옹 군대는 강추위와 굶주림 속에 완패를 당하고 겨우 3만 명의 패잔병이 파리로 돌아가게 된다.

이 곡은 러시아 군대의 승리를 그린 묘사음악으로 프랑스 국가 “마르세예즈”와 러시아 선율 4개가 나온다.
이 곡이 초연될 당시 대편성의 관현악이 동원되었는데큰북 대신 포병대의 대포가 쏘아졌다는 얘기도 있다. 이 곡은 일종의 대규모적인 묘사음악이다.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추위와 기아로 인해 완전히 패퇴한다는 내용을 오케스트라로 묘사한 것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청년장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점점 두각을 내밀어, 어느덧 만군을 호령하는 장군의 지위에 올랐고, 드디어는 세계제패를 꿈꾸게 되었다.

그리하여 멀리 이탈리아와 이집트에 원정하여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모았고, 그해 5월에는 국민투표에 의해 세습황제로 즉위했다. 그렇게 하여 그의 전성기는 1812년까지 계속된다. 1812년 무적의 [대육군]을 자랑하는 나폴레옹군은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쳤다. 그 결과 동년 9월 14일에는 당당히 모스크바까지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들은 모든 가옥을 불태우고 식량마저 없애 버리는 등 초토전술로 맞섰기 때문에 나폴레옹군은 잠자리와 식량에 고통을 받고 불과 1개월 후인 10월 19일에는 총퇴각을 시작한다. 혹심한 추위와 집요한 게릴라의 반격으로, 그토록 기세를 떨치던 대군도 뿔뿔히 흩어지고 간신히 프랑스의 니멘강에 이르렀을 때에는 불과 2만밖에 남지 않았다.

나폴레옹군은 실로 58만을 잃고만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이 패전을 고비로 내리막길에 접어들어서 결국 몰락하고 만다.

이렇게 1812년이라는 해는 러시아 국민에게 있어서 기념할 만한 해가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여기에 프랑스 국가가 된(1893년 국가로 됨) 「마르세예즈」와 러시아의 4개의 주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 러시아의 주제가 번갈아 가면서 「마르세예즈」를 침묵시키므로써 러시아의 승리를 묘사하도록 되어 있으며, 굉장히 화사한 곡이어서 일반에게 인기가 높다.

이 곡이 작곡된 동기에 대해서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모스크바 음악학교 교장이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권유를 받고 작곡되었으며, 1882년 8월 8일 중앙 대사원의 재건을 축하하는 축전에서 공연되었다는 설이다. 큰북 부분도 포병이 실제로 대포를 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하나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권했다는 것은 같은데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린 산업예술박람회의 축전음악으로서 작곡되었다는설이다. 그런데 그 산업예술박람회가 1882년 중앙 대사원 헌당식과 함께 열렸던 것을 감안하면 두 가지 다 맞는 것 같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 대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불과 10여일 남짓한 동안 작곡하였다. 사실 이 곡은 부분적으로 시끄럽고,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근 100년 동안 관객을 끌어모으는 인기 레퍼토리가 되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작곡가 자신의 평가보다는 뛰어난 작품임이 확실하다.

글 출처 : 다음 블로그 'Mua Music Sal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