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Kurt Masur(Conductor) Gewandhaus Orchester Leipzig Total timing 77:23
작품의 배경 및 개요 1802년, 교향곡 2번을 작곡하던 베토벤은 주체할 수 없는 창작열에 휩싸여 이렇게 적었다. “이제부터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전보다 더 많은 힘이 솟는다. 매일 나는 내 목표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른 친구에게 쓴 편지엔 이런 글귀도 보인다. “나는 내가 쓴 음표들 속에서만 살고 있다. 한 작품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벌써 다른 작품이 시작된다. 나는 서너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진행하고 있다.” 베토벤의 의욕이 최고조에 이르던 바로 그 해에 그가 자살을 생각했다는 건 의외의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깊은 절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온 이는 더욱 강한 삶에의 의지를 보여주듯 자살의 유혹을 극복한 베토벤 역시 그러했다. 1801년 이후 더 이상 귀의 이상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귓병이 악화되자 절망하기 시작한 베토벤은 귓병을 고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 방법으로 베토벤은 슈미트 박사의 충고에 따라 빈의 시끌벅적한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여섯 달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았고,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그는 동생 칼과 요한에게 유서에 가까운 편지를 썼다. “내 곁에 서있는 사람은 멀리서 부는 플루트 소리를 듣는데,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니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가!” 하지만 그는 편지의 말미에 이런 구절을 적어 넣었다. “이런 일이 조금만 더 계속됐다면 아마 난 내 삶을 끝장냈을 거다. 나를 다시 불러온 것은 오로지 나의 예술이었다. 아, 나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불러내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 불리는 이 편지에는 음악가로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베토벤의 좌절감이 구구절절 담겨있다. 그러나 그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자각하고 몸부림칠수록 자신만의 음악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점점 더 강해질 뿐이었다. 바로 그 때 베토벤의 두 번째 교향곡이 탄생했다. 1801년에 착수되어 1802년 초가을에 완성된 교향곡 2번은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그에게 남긴 고전주의 교향곡 양식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흔히 교향곡 3번 [영웅]이야말로 베토벤의 혁명적인 개성이 나타난 최초의 교향곡으로 평가되곤 하지만 베토벤이 교향곡 제2번에서 전통적인 교향곡 양식을 정교하게 다듬어내지 않았다면 영웅 교향곡의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베토벤은 1803년 4월 5일 빈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이 교향곡을 처음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날 공연 프로그램에는 그의 피아노협주곡 제3번과 오라토리오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가 함께 연주됐고 그의 교향곡 1번 역시 포함되어있었다. 그날 공연 프로그램이 매우 힘든 곡들로 채워졌기에 리허설 역시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쉼 없이 진행되었다. 당시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그날 오후까지도 아직 사보가 끝나지 않은 트롬본 파트의 악보를 옮겨 적느라 진땀을 뺐다. 또 젊은 지휘자인 이그나츠 폰 자이프리트는 베토벤이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할 때 악보의 페이지를 넘겨주기 위해 고용됐는데, 악필로 유명한 베토벤 자필 악보의 음표들을 식별해내느라 애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의 교향곡 1번이 이미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 완성한 교향곡 2번을 교향곡 1번과 함께 연주하는 것은 베토벤에게 그리 유리한 일은 아니었다. 정교하고 세련된 교향곡 2번은 상대적으로 단순 발랄한 교향곡 1번처럼 쉽게 이해되는 작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음악평론가는 “교향곡 2번보다는 교향곡 1번의 유연한 발전 기법과 자연스러운 흐름이 더 돋보인다”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베토벤이 교향곡 2번에서 새롭고 놀라운 시도를 하려 했던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작품의 구성 전통적인 교향곡 1악장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느린 서주로 시작한다. 마치 하이든의 교향곡처럼 드라마틱한 느낌의 느린 서주에서 베토벤은 풍부한 화성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교향곡 제9번 1악장을 예고하듯 웅장한 음향을 선보인다. 느린 서주에 이어 활기가 느껴지는 제시부로 이어지면, 고양된 분위기를 담은 제1주제가 연주된다. 이 주제는 처음에는 여리게 제시되었다가 다시 전체 오케스트라에 의해 크게 연주된 후 갑자기 엉뚱한 C음이 날카롭게 강조되며 화성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1악장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대담한 표현과 약박을 강조하는 강한 악센트, 반음계적인 전개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그 스릴 넘치는 전개방식에서 베토벤의 능숙한 작곡기법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한때 베토벤을 가르쳤던 하이든도 이 교향곡 1악장의 대담한 전개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라르게토는 베토벤이 만들어낸 느린 악장들 가운데 매우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악이다. 이 음악은 하이든과 모차르트로부터 벗어나 더욱 낭만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느린 템포를 타고 흐르는 현악의 유장한 선율은 [브루크너 교향곡] 아다지오 악장의 장엄한 로맨티시즘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러나 온화함과 서정성이 흐르는 가운데서도 유머러스하고 변덕스러운 음악이 공존하고 있어 놀라움을 준다. 곡의 중반부터는 마치 농담을 건네는 듯한 익살스러움이 느껴진다. 스케르초는 베토벤이 교향곡에서 최초로 시도한 스케르초다. 전통적인 교향곡의 3악장은 프랑스 궁정에서 유행하던 보통 빠르기의 미뉴에트로 작곡되기 마련이지만, 베토벤은 이미 교향곡 1번 3악장에서 빠른 3박자의 스케르초 풍의 음악을 넣어 좀 더 재치 있고 활기찬 느낌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교향곡 2번에선 3악장에 아예 ‘스케르초’라는 말까지 써넣었다. 본래 ‘스케르초’라는 말에는 ‘농담’이란 뜻이 있으며 음악적 성격도 농담처럼 가볍고 재치가 있어서 지휘자들이 스케르초가 3박자의 음악임에도 지휘할 때는 한 마디를 한 박으로 지휘할 정도로 음악을 빠르게 진행시킨다. 빠른 스케르초와 대비되는 중간 ‘트리오’ 부분에서는 오보에의 음색과 부드러운 선율선이 돋보이지만 현악기가 갑작스럽게 F#음을 강조하며 충격을 주기도 한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같은 단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점점 크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줘서 흥미롭다. 음악으로 농담을 구사할 줄 알았던 베토벤의 특별한 재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4악장에서도 베토벤의 유머감각이 돋보인다. 오케스트라는 마치 건방진 어조로 끼어들듯 갑자기 연주를 시작하며 코믹한 느낌을 준다. 베토벤은 4악장에서 의외의 희극적인 도입으로 놀라게 할 뿐 아니라 그와 정반대되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음악을 선보이며 그 능수능란한 작곡기법을 마음껏 뽐낸다. 우아함과 장난기를 오가며 시시각각 변해가는 4악장의 변화무쌍한 전개는 세련된 ‘하이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1809년부터 1811년 사이 베토벤에게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저 전쟁이다. 1809년 5월 그가 교향곡 3번을 헌정하려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군대가 빈을 침공한 것이다. 이에 베토벤은 앓고 있던 귀를 포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더불어 전쟁 통에 건강도 좋지 못하였다. 또한 그를 도와주던 후원자들이 모두 빈에서 도피하여 경제적인 후원도 끊기게 된다. 창작에 있어서도 공백이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무렵 1809년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 1792~1851)라는 대지주의 딸을 사랑하게 되고 실제 구체적으로 결혼까지 고려하였으나 청혼을 거절당해 이 사랑도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나온 현악4중주 10번 Op.74의 <하프(Harp)>나 11번 Op.95 <세리오조(Serioso)>에서 나타나는 밝은 악상과 심각성의 대조는 이런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해 작곡된 유명한 피아노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Fur Elise)>는 이 테레제를 위한 곡이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베토벤의 불명의 연인 중 가장 유력한 후보와의 사랑이 이 시기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1811년 또 다른 불멸의 연인인 테레제 부룬스빅(Therese Brunsvik, 1775~1849)으로부터 그녀의 초상화를 받고 그녀와의 실연의 상처를 달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한편 평소 그가 존경하던 괴테를 1812년 여류 시인 브렌타노의 소개로 보헤미아의 온천지 테플리츠(Teplitz)에서 만났던 것도 이 무렵이었고, 당시는 베토벤의 귀가 더욱 들리지 않게 되어 메트로놈(Metronome)의 발명자 멜첼이 만들어 준 보청기도 소용이 없어 필기장을 쓰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렇게 베토벤에겐 전쟁과 실연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이 한차례 지나가고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런 것을 반영이나 하듯이 1813년 탄생한 곡이 교향곡 7번인 것이다. 이런 그래서 로맹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은 “이 곡에서는 다른 작품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솔직하고 자유로운 힘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초인적인 정력의 터무니없는 낭비, 그렇다. 낭비의 즐거움이다. 철철 넘쳐나는 대하의 즐거움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흔히들 베토벤 교향곡들을 말할 때 짝수 번호는 경쾌하고 우아하며 홀수 번호는 웅장하고 호탕한 것이라 하는데, 7번 교향곡은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또한 이 곡은 성격면에서 5번과 6번 교향곡의 경우처럼 8번 교향곡과 짝을 이룬다. 음악평론가 베커(Paul Bekker, 1882~1937, 독일)는 “7번은 높은 봉우리로의 등반을 나타내고 8번은 가까스로 정복한 정상에서의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란 말로 쌍둥이면서 그 성격이 전혀 다른 7번과 8번의 특징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곡상은 철저히 베토벤의 디오니소스(dionysos)적인 일변을 드러낸 것으로 운명을 박차고 나가는 인간의 강렬하고 의지에 넘치는 힘의 분출을 나타낸다. 특히 어느 교향곡보다도 생기에 넘치는 율동이 전편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약한 나르시시즘을 거부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그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것이다. 거기에는 즐거움과 분격(憤激)의 열광, 급작스러운 대비, 엄청나고 거창한 용솟음 그리고 거인적인 폭발이 있다. 괴테로 하여금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그래서 바그너는 이 곡을 ‘무도(舞蹈)의 성화(聖化)’로, 리스트는 ‘리듬(rhythm)의 신격화(apotheosis)’라는 말로 작품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공개 초연은 1813년 빈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상의 용사를 위한 자선 음악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때 <전쟁 교향곡>으로 불렸던 <웰링턴의 승리> Op.91과 8번 교향곡도 같이 연주되었는데, 연주회는 대성공으로 2악장이 앙코르로 연주되었다. 제1악장은 역동적인 곡상으로 최고의 함축성을 지닌 리듬에 의해 독점적으로 지배된다. 2악장 알레그레토(allegretto)는 교향곡 3번의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과 같은 풍으로 가슴 저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비감과 애수를 띤 엄숙한 주제가 일품이다. 마치 실연과 전쟁의 상처를 연상시키듯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내면적인 서정미와 정신적인 감동이 있다. 이런 것은 베토벤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며 흔히 ‘영원한 알레그레토’라고도 한다. 그리고 3, 4악장은 질주하는 듯한 강렬함이 아주 인상적인데, 특히 4악장이 말 그대로 격렬한 리듬의 향연을 구가한다. 이런 것에 베토벤 스스로도 “나는 인류를 우해 좋은 술을 빚는 술ㄹ의 신 바쿠스(bacchus, dionysos)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음악에 취하게 해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초연 당시 클라라 슈만(Alara Schumann, 1819~1896, 독일)의 아버지인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는 이 작품이 술에 취했을 때 작곡하였던 것이 아니가 하였다 한다. 또한 이런 것을 반영이나 하듯 전 4악장 중에서 선율을 노래하는 느린 악장이 없는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교향곡은 전 서양 음악을 통틀어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로 음악이 한낱 유희일 수 없다는 그의 이상과 지론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위대한 작품이다. 나폴레옹이 대륙을 정복하려던 바로 그해 베토벤은 이 음악을 통해 예술적 위대함을 의연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