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77
Ginette Neveu (violin)
Issay Dobrowen (Conductor)
Philharmonia Orchestra

1946/08/16-18 Mono
No. 1 Studio, Abbey Road, London
작품의 배경 및 구성

브람스는 1877년 바덴바덴(Baden-baden)에서 브루흐가 대바이올리니스트인 사라사테에게 헌정한 바이올린 협주곡 2번 Op.44의 비공개 연주회를 접하게 된다. 물론 지휘는 브루흐, 바이올린은 사라사테였다. 브람스는 곡의 악장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3악장 알레그로(allegro)는 매우 흡족해 하였고 특히 헝가리 출신인 레매니나 요아힘의 바이올린 소리에 귀가 젖은 그에게 사라사테의 음은 상당한 매력을 전해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브루흐의 협주곡이 거장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한 것으로는 미흡함을 절감하게 되고 자신이 더 좋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다.

한편 이보다 앞서 1858년 브람스는 데트몰트(Detmold)에서 일할 당시 궁정악단의 악장인 바르게르(Karl Louis Bargheer)의 연주로 비오티의 바이올린 협주곡 22번 a단조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는 요아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긴다.
“베르게르는 정말 부지런하게 몇 번이나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네. 예를 들면 비오티 a단조 협주곡이 그러하네. 그리고 이 곡은 나에게 신성하고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네!”
또한 요아힘도 스스로 “세상에 뭐 이런 곡이 다 있었던가”하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브람스는 비오티의 협주곡에서 베토벤의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탈리아적인 환상과 정열을 접했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반영되고 있다. 특히 가이링거(Karl Geiringer)는 곡의 1악장 알레그로(allegro)를 ‘비오티 바이올린 협주곡 22번의 회상’이라고 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한 1878년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오티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협주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또한 요아힘도 나를 위해 이 곡을 선택한 것으로 압니다. 이 곡은 구성면에서 주목할 만한 걸작입니다. 작곡가는 음으로써 환상을 전하고 있는 듯합니다. 모든 면에서 대가다운 풍모가 보입니다. 가장 좋은 협주곡, 다시 말해 모차르트 협주곡과 비오티의 이 곡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들을 존경할 수 없겠지요….”
라고 하고 있으며 요아힘도 “하노버 시절에 나의 방에서 자주 브람스와 어울려 연주를 하였는데 우리들은 여러 번 이 곡을 연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 브람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얼굴을 붉히며 건반을 훑어 나갔다”라고 회고하였다.

이런 비오티 작품 이외에도 브람스가 젊은 시절 매료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는 요아힘이 작곡한 것도 있었다. 단악장의 협주곡(No.1) Op.3과 <헝가리풍의 협주곡>(No.2) Op.11 두 곡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곡들은 이미 1861년 작곡되어 브람스에게 헌정된 것인데, 특히 <헝가리풍의 협주곡>은 클라라에게 절찬을 하는 편지를 쓸 만큼 높이 평가하였고 그래서 이 곡이 가지는 집시풍의 분위기가 그의 협주곡 3악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곡의 착수는 브루흐의 2번 협주곡을 들은 직후가 아니라 1년 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페르차하에 머물렀던 1878년 7월경이었다. 원래는 4악장으로 쓰려하였다. 그런데 10월 교향곡 2번 지휘를 위해 브레스라우에서 요아힘에게 “나는 지금 아다지오와 스케르초로 고심하고 있네”하고 하였고 다시 이듬 해 1월에는 “중간의 두 개 악장을 빼 버리기로 했네 ―물론 그러한 방법이 좋았네― 그 대신 나약한 아다지오를 썼네”라고 알리고 있다. 그래서 결국 4악장에서 3악장으로 하였고 삭제된 2개의 악장은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으로 사용하려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진행 속에서 요아힘은 곡에 많은 조언을 하였고, 1악장 기교가 어려운 곳에는 ‘나만큼 큰 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곤란할 것이야’라는 충고를 하였다. 하지만 브람스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요아힘의 조언을 전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곡은 요아힘에게 헌정될 것이었고 그래서 요아힘은 그 스스로의 카덴짜(cadenza)를 준비하였다.

초연은 1879년 1월 1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브람스 지휘와 요아힘의 독주로 이루어졌고 연습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런던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많은 연주회가 이루어지며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브람스는 초판 악보를 사라사테에게 보내어 의견을 구했다. 하지만 사라사테는 바이올린이 돋보이지 않은 교향적인 작품 성격에 불만을 표시했고 친구에게는 “나는 브람스 협주곡 자체가 좋은 음악인 것은 인정하나, 자네는 오보가 아다지오로 전곡에서 유일한 선율을 청중에게 들려주고 있을 때 내가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들고 멍청하게 서서 듣고 있을 만큼 시시하다고 생각하나?”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대 바이올린의 또 다른 거장인 이자이(Eugene Ysaye)는 이 곡의 우수성을 인정 널리 연주했다고 한다.

요아힘의 손이 크지 않은 사람은 힘들다는 지적은 여러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후베르만은 14세에 브람스 앞에서 연주 사인이 들어 잇는 초상화를 선물 받았고, 시게티는 13세에, 메뉴인은 열세 번째 생일날 베를린에서 ‘3B 협주곡 연주회’에서 발터(Bruno Walter)와 협연하였다.

1악장은 매우 긴 악장인데 멋들어진 서주 후 바이올린의 격렬한 보잉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긁어주는 쾌감을 전해 준다. 요아힘의 지적처럼 기교적으로 매우 어려우며 카덴짜는 요아힘을 비롯하여 크라이슬러, 아우어, 하이페츠, 부쉬 그리고 피아니스트인 부조니도 남기고 있다.

2악장 아다지오는 사라사테의 지적처럼 오보의 대단히 아름다고 서정적인 주제가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에르만은 그의 저서 [브람스]에서 ‘바이올린만이 갖는 독특한 색채의 아리아이며 비극의 프리마돈나가 온갖 정열을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듯이 아마 브람스가 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할 만큼 아련함이 대단하다.

3악장은 집시풍의 신명나는 관현악의 울림으로 장대한 대미를 장식한다.

곡의 구성은 별 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것으로 베토벤의 것과 유사한 D장조의 조성과 목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브람스적인 진지함과 이에 따르는 중후함의 멋은 타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이다.

현재의 악보는 당시와는 다른 것으로 브람스가 다시 요아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개작을 거듭하여 1879년 가을에야 짐록(Fritz Simrock, 1837~1901, 독일)출판사에서 출판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유명한 비평가인 한슬릭은 이 곡을 브람스와 요아힘의 ‘우정의 나무에 달린 잘 익은 과실’이라고 하였다.

고전적 낭만주의자 또는 신고전주의자인 브람스는 결코 세속적인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은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와의 사랑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일생은 고결함, 엄격함 그리고 냉철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짙은 우수와 고독 그러나 이율배반적인 애잔한 감미로움이 스며 나오는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런 그의 인생관의 반영이라 할 역작이다.

이런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를 생각할 때 우리는 1935년 비에니아프스키(Henyk Wieniawski, 폴란드) 콩쿠르에서 오이스트라흐를 제치고 우승한 느뵈(Ginette Neveu, 1919~1949, 프랑스)의 연주를 최고의 명반으로 꼽는다.

글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음악)

 

기라성같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의 많은 명연을 남겼는데 전설적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지네뜨 느뵈의 기념비적인 브람스 바이올린협주곡의 이 한장의 명반!
"직업적 고독 없이는 위대한 일이란 아무 것도 이룩되지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위대함은 아마도 눈부시게 빛나는 고독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이따금 소심해진다. 그러나 죽음은 사람들의 내부에 지니고 있는 생명과 이상에 따라 받아들여져야 하는 숭고한 것이다. 우리가 이 지구 상에 머물고 있는 이 슬픈 체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지않는 커다란 고난의 시기에 불과하다."
`지네뜨 느뵈'가 30세에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 남긴 말이랍니다. 마치 자신의 이승에서의 짧은 체류를 예감하고 미리 남긴 말처럼 보여집니다.




지네트 느뵈 (Ginette Neveu 1919~1949)
20세기 바이올린 역사에서 자네트 느뵈 (Ginette Neveu 1919~1949)는 가장 아깝게 요절한 천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19년 파리생인 그녀는 천부적 재능으로 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 불과 8개월만에 1등상을 받고 졸업했습니다. 그 이듬해 빈 콩쿠르에서 칼 플레시에게 인정을 받아 4년 동안 이 거장의 지도를 받고 1934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에서 27세의 오이스트라흐를 제치고 우승하였습니다.

오이스트라흐 보다 더 실력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그후 서유럽과 미국에서 뮌슈, 카라얀과 협연 및 오빠 쟝 느뵈의 피아노 반주에 의한 독주회로 격찬을 받았습니다.

1946년 런던에서 그녀의 베에토벤 협주곡을 듣고 엘리자베드 여왕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풍부한 감수성에 정신과 기교를 격렬한 정열로 응집시키는 연주는 늘 청중을 열광케 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음색과 비브라토, 명석한 음계 설정으로 프랑스적 우아함과 서정적 표현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1949년 1월 27일 3번째 미국 여행을 위해 그녀를 태운 비행기가 아조 레스 제도의 산에 충돌하여 그녀에 피아노 파트너인 오빠 쟝 느뷔와 함께 비극적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녀가 죽은 사고현장에서 파도에 밀려 그녀에 애기 스트라디바리 케이스만이 딩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크라이슬러나 티보 정도의 명인이 되었으며 20세기 후반의 바이올린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바이올린과 함께 불꽃처럼 살다가 30세란 짧은 생애를 비행기 폭발의 섬광과 함께 종지부를 찍은그녀의 시신은 파리 교외 쇼팽무덤 근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엔 그녀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음반 중 도브로벤, 주스킨트 / 필하모니아와 협연한 브라암스,시벨 리우스 협주곡이 훌륭합니다. 오빠 쟝 느뵈의 반주 아래 드뷔시 소나타, 라벨 찌가느 관현악 반주의 쇼송 <시곡>이 수록된 음반 (EMI 46~48)은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 정열의 연소가 담겨진 그녀의 대표적 녹음으로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