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는 바로 그런 역사적 전통의 마지막쯤에 서 있는 음악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적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에타 음악원’ 정확히 말하자면 피에타 병원 부속 음악원에서의 활동이 바로 그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곳은 원래 미혼모의 자식들과 고아들을 위한 보호시설이었지요. 유럽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던 환락 도시였던 당시의 베네치아에서는 버려지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피에타 음악원은 그중에서도 여자아이들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음악교육을 받았고 약 40명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활동했습니다. 지휘자는 수녀였습니다. 비발디는 1703년에 그곳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됐고 훗날에 총책임자로 일했습니다. 그의 나이 60세였던 1738년에 해임되었으니 그곳에 머문 기간이 자그마치 35년이 넘습니다. 물론 때때로 너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워서 지탄을 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비발디의 거의 모든 음악이 피에타 음악원에 재임하던 시절에 작곡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에 대해 “똑같은 협주곡을 400곡 넘게 썼던 사람”이라며 극단적인 비판을 퍼붓습니다. 실제로 비발디가 쓴 협주곡은 500곡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빠르게 ― 느리게 ― 빠르게’로 진행되는 협주곡의 전형을 확립한 것, 아울러 대담한 즉흥 연주와 화려한 개인기를 펼치며 ‘비르투오조(virtuoso)'의 원형을 보여준 것 등은 비발디의 중요한 음악사적 업적으로 거론됩니다. 전자는 ’위대한 바흐‘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적어도 고전주의 시대까지 ’확고한 양식‘으로 이어졌습니다. 후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비발디는 파가니니와 리스트 등으로 이어진 비르투오조 계열 연주자들의 인명록에서 가장 앞쪽에 놓이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꼽히곤 하는 《사계》는 12곡으로 이뤄진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Op.8》에서 1번부터 4번까지를 일컫습니다. 출판 연도는 1725년인데 작곡과 초연 연도는 불분명합니다. 사계절을 노래하고 있는 '소네트’를 소재로 삼아 곡을 붙였습니다. 독주 바이올린의 전면에 나서고,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그 뒤를 받치는 협연이지요. 비록 악기 편성의 규모는 작지만 화성이 풍부하고 선율에도 생동감이 넘쳐서 전혀 ‘작은 음악’의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시의 내용을 음악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사실상 '표제음악'인 동시에, 사계절의 변화를 선율과 화성으로 묘사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음으로 그려낸 풍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No.1. in E major Op.8-1 RV 269 `La primavera(Spring)`


‘봄’의 1악장을 설명하는 소네트는 이렇습니다. “봄이 왔다. 작은 새들은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봄에게 인사한다. 시냇물은 산들바람과 상냥하게 얘기하며 흘러간다. 그러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작은 새들은 다시 아름다운 노래를 즐겁게 부른다.” 특히 솔로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새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2악장은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목장에서 나뭇잎들이 달콤하게 속삭이고, 양치기는 충실한 개를 곁에 둔 채 깊은 잠에 빠졌다”라는 소네트를 지니고 있지요. 이번에는 솔로 바이올린이 잠에 빠진 양치기를 묘사합니다. 비올라는 그 옆에서 ‘멍멍’ 하고 짓는 개를 형상화하고 있지요.

또 3악장은 봄날의 들판에서 벌어진 흥겨운 춤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네트입니다. “요정들과 양치기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봄에, 양치기가 부는 피리의 활기찬 음률에 맞춰 즐겁게 춤춘다.”

No.2. in g minor Op.8-2 RV 315 `L'estate(Summer)`


‘여름’의 1악장을 묘사하는 소네트는 이렇습니다.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계절, 사람과 가축의 무리가 활기를 잃고 나무와 풀들도 더위에 지쳤다. 뻐꾸기가 지저귀고 산비둘기와 검은 방울새가 노래한다.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그러다 갑자기 북풍이 산들바람을 덮치고, 양치기는 비를 두려워하며 불운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린다.” 솔로 바이올린이 뻐꾸기 울음소리를 모사하는 장면에 귀를 기울여 보기 바랍니다. 이어서 산비둘기, 검은 방울새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북풍이 몰아치는 장면은 전체 합주로 강하게 연주되고, 양치기의 눈물은 다시 솔로 바이올린의 애잔한 선율로 표현됩니다.

이어지는 2악장의 소네트는 이렇게 이루어져 있지요. “번개, 격렬한 천둥소리, 그리고 파리 떼, 달려드는 파리 떼의 공격으로 양치기는 피로한 몸을 쉴 수가 없다.” 이번에는 솔로 바이올린이 쉴 수도 없는 양치기의 슬픈 모습을 묘사합니다. 반주로 등장하는 바이올린 합주는 자꾸만 달라붙는 파리 떼를 형상화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현악기들이 일제히 가세하면서 천둥 치는 장면을 그려내지요.

마지막 3악장은 아주 강렬한 느낌의 전체 합주로 천둥과 번개, 우박을 표시합니다. “아아. 양치기의 두려움은 얼마나 옳았던가. 하늘은 천둥을 울리고 번개를 치고, 우박을 내리게 하여 익은 곡식들을 떨어트린다.”

No.3 in F Major Op.8-3 RV 293 `L'autunno(Autumn)`


‘가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확의 계절입니다. 1악장은 이런 정경을 묘사하지요.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수확의 즐거움을 기뻐하고 축하한다. 박커스의 술 덕택에 사람들은 흥겨움에 빠진다. 그러다 모두 잠든다.” 흥겨운 춤과 노래가 펼쳐지는 악장입니다. 중간쯤에 솔로 바이올린이 술 취한 걸음걸이를 흥겹게 묘사하지요.

반면에 2악장에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사람들이 잠에 빠졌거나 휴실을 취하고 있는 장면을 미ㅛ사하는 까닭에 약간 몽환적이기도 하지요. “모두 춤을 멈추고 노래도 끝났다. 조용한 공기가 평화롭다. 달콤한 잠이 사람들을 휴식으로 이끈다.”

3악장에서 다시 활기가 넘칩니다. “새벽이 되자 사냥꾼들은 피리와 총을 들고, 개를 데리고 사냥을 떠난다. 짐승들은 무서워하면서 달아나고 그들은 쫓는다.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쫓긴 짐승들은 상처를 입고 떨고 있다. 도망칠 힘마저 다 떨어진 채 궁지에 몰려서 죽는다.”

No.4 in f minor Op.8-4 RV 297 `L'inverno(Winter)`


‘겨울’의 1악장은 정말 춥습니다. “차가운 눈 속에서 벌벌 떨며,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쉴 새 없이 달리지만 제자리걸음일 뿐, 너무 추어서 이가 덜덜 떨린다.”

하지만 2악장에서는 다시 안온한 분위기로 돌아오지요. “불 곁에서 조용하고 만족스러운 나날ㅇㄹ 보낸다. 집 밖에서는 비가 만물을 적신다.” 아주 인상적인 솔로 바이올린 선율이 펼쳐지는 악장입니다. 가수 이현우가 ‘헤어진 다음 날’이라는 노래에서 인용한 선율이기도 하지요.

마지막 3악장의 소네트는 이렇게 펼쳐집니다. “얼음 위를 걷는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천천히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다급하게 걷다가 미끄러져 넘어진다. 다시 일어나서, 얼음이 깨질 정도로 힘차게 달라다. 문 밖으로 나가 남풍과 북풍, 모든 바람들의 싸움에 귀 기울인다. 이것이 겨울이다. 이렇게 해서 겨울은 기쁨을 가져다준다.” 솔로 바이올린이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다가 힘차게 일어나서 달려가지요. ‘바람들의 싸움’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짧은 음형들을 아주 빠르고 격렬하게 연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악기가 등장해 마침표를 찍지요.

추천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