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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sh Cream / Cream

 미국 록과 영국 록은 1960년대부터 서서히 다른 길을 걷기 시 작했다. 사이키델릭(psychedelic, 몽환적이고 환각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인 록의 한 장르)에 영향 받은 미국 쪽이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데 몰두할 때 영국 그룹들은 록의 음악적 향상을 위해 끝없는 탐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틀스가 세워놓은 예술적 전통을 유지하는 한편 미국의 블루스를 혼합시켜 나갔고 그 속에서 ‘악기예술의 진수’를 캐내는 데 열중했다. 그 정상에 우뚝 선 그룹이 바로 역사상 최강의 트리오로 불렸던 ‘크림’이었다.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 ‘베이스 도사’ 잭 브루스, ‘드럼의 마왕’ 진저 베이커. 이 세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중들이 흥분할 이유는 충분했다. 우선 각 파트의 초일류 뮤지션들이 모였으니, 과연 어떤 사운드 스펙트럼을 들려줄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이에 대한 이 슈퍼 그룹의 대답은 바로 ‘헤비메탈의 원형’이었다. 여기에 블루스에 영향 받은 강렬한 연주와 실험적인 재즈 터치가 더해지면서 크림은 비틀스가 부럽지 않을 만큼 자신들을 모방하려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크림의 진가는 특히 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연주 실력을 뽐내면서도 정교하고 파워가 넘치는 현장(現場)의 록을 추구한 것이었다. 일반 그룹과는 격을 달리하는 이런 강점 덕분에 크림은 곧바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록계의 시선을 독식할 수 있었다. 우선 트로이카 체제로 이런 대규모의 압도적 사운드를 연출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가 여타 그룹들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사기 유닛’ 크림만의 비기(秘技)였다.

   그러나 크림의 데뷔는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1966년 6월, 제6회 재즈 블루스 페스티벌 무대에 선 크림은 장대비를 맞으며 세 곡을 연주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그저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 후(The Who)가 그들 바로 앞 순서에 등장해 퍼포먼스를 펼친 뒤라 크림의 사운드는 훨씬 초라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세 멤버는 즉흥적인 잼 형식의 연주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제야 관객들이 호응을 보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에릭 클랩튼은 당시 경험을 두고 “우리는 3인조 블루스 벤드도 4인조 팝 밴드보다 멋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해결책은 역시 잼 연주였다.”라며 술회한 바 있다.

   그렇다고 공연 실황이 아닌 음반으로 듣는다고 해서 그들의 가치가 삭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첫 번째 정규 음반 <Fresh Cream>이 발매되자 몽환적이면서도 힘이 실린 록 하모니의 <I Feel Free>, 블루스 록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곡이자 윌리 딕슨(Willie Dixon)의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Spoonful>, 진저 베이커의 파괴적인 드러밍으로 잘 알려진 <Toad>,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버전으로 유명한 명곡을 묵직한 하드 록으로 채색한 <Rollin’ And Tumblin’> 등을 접한 당시 록 대중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너도나도 크림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록의 예술성에 모든 것을 헌신했던 ‘70년대성(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한 록이 대세였던 60년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70년대 뮤지션들은 사회적 이슈와는 유리된 채 록의 음악성을 높이는 데만 전력투구했다)’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글 : 배순탁
평론가들은 이 팀을 '슈퍼 트리오'라고 추켜세운다.
본 DJ는 평소 평론가들의 과장법에 자주 딴죽을 거는 편이지만
이번엔 잠자코 있으련다.
세 사람 모두 이 앨범에서 정말 멋진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에릭 클랩튼은 계속 뻗어나갔는데
어째서 잭 브루스는 그러지 못했을까.
글 : 배철수
글 출처 : Legend(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 배철수. 배순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