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구

김일구(金一球, 1940년 ~ )는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광주 호남국악원에 들어가 공대일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워 그 기초를 닦았으며, 1962년에 장월중선에게서 아쟁산조를 배운 뒤 1968년에 원옥화에게서 가야금을 배워 가야금 산조를 이수하였다.

1980년에 박봉술 명창으로부터 적벽가와 수궁가를 전수받아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전히 이수하였고 판소리, 아쟁, 가야금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1983년에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신라문화제 기악부문에서 특상과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국립 국악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 출처 : 다음 백과사전


김일구 선생을 가리켜 세상 사람들은 판소리, 가야금, 아쟁을 두고 삼재(三才)라 부르니, 옛날에 박기홍(朴基洪) 명창이 판소리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나 거문고 젓대 할 것 없이 어느 것이나 능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고 가선(歌仙)이라 일렀다더니 오늘날 김일구 명창이 그와 같고 보니 그에 버금이라 할 것이다.

김일구 명창은 1940년 8월 4일 풍류고장으로 이름이 높던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당시 서편제 ‘춘향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김동문 명창의 아들로 8살 때부터 춘향가, 흥부가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10대에 명창이란 말을 들었고, 18세 때에는 목포 국악원 사범자리를 담당할 만큼 유명해졌다. 또한 당시 판소리 명창이며 아쟁 산조를 짠 이로 유명한 故 장월중선(張月中仙) 선생이 목포 국악원에서 사범으로 있었다. 김일구는 장월중선에게 판소리를 배우는 한편 아쟁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선생이 아쟁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선생의 아쟁산조를 하나의 유파로 국악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김일구류 아쟁산조의 특징은 무엇일까? 언젠가 최종민 선생은 “김일구의 아쟁은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평한 바 있다. ‘줄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대소리만 못하고 대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의 소리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소리가 갖는 재치나 묘미를 쫓아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1965년 무렵에 선생이 부산에서 판소리 사범으로 있을때 원옥화(元玉化)선생에게 5년간 강태홍(姜太弘)제 가야금 산조 학습은 오늘날 그에게 삼재(三才)라는 영예스러운 호칭을 얻게 했다.

김일구 명창은 그의 탁월한 기량에 걸맞게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 장원(1983, 문공부장관상),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부 장원(1983, 대통령상), 신라문화제 기악 특장부 장원(1985, 대통령상)을 했다. 또한 KBS국악대상(1991), 정도 600년 서울 시민상(1994), 예총문화예술 대상(1994) 등을 수상했다. 1992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준보유자로 지정됐다. 특히 부인인 김영자 명창 역시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준보유자로 지정되어 명창으로서의 명예를 더하게 했다.

김일구 선생은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국악을 전공하고 있다. 큰아들 김경호는 현재 전북도립국악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둘째 김도현도 중앙대 국악과에 재학 중이다. 행여 부모의 후광에 가려 자식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도 한단다. 가족들 간의 칭찬보다는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판소리와 아쟁산조,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작창, 그리고 창극 연출에 이르기까지 전통예술의 전 분야에 두루 능한 김일구 선생, 그는 분명 우리 시대 최고의 명인임에 틀림없다. 60대에 속하면서도 청년 못지 않은 열정을 지니고 있는 김일구 선생의 활약은 21세기에도 우리 국악을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글 출처 : 다음 블로그 '국악여행' 깨비(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