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mann, Fantasie in C major, Op.17
작품 개요 및 배경
슈만은 1837년 베토벤 서거 10주년을 맞아 리스트로부터 베토벤 기념비 건립사업을 위한 작품을 위촉 받아 환상곡의 완성을 서둘렀고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했다. 이것은 리스트가 1837년에 출판한 <초절기교 연습곡> 첫 번째 버전을 클라라에게 헌정한 것에 대한 답례 성격이 강했다.

리스트는 파가니니로부터 받은 영감을 이들 연습곡에 투영시켰듯이, 1830년 파가니니의 연주를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은 슈만 또한 그의 악마적인 기운과 난해한 테크닉을 자신의 환상곡에 반영하고자 했다. 물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이 혁신적이며 악마적인 테크닉의 극한으로 파가니니를 오마주한 반면, 슈만은 보다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며 낭만주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이 작품의 서문에는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 역사가, 낭만주의의 이론적 지도자, 인도학(印度學) 연구의 개척자로서 예술비평과 철학적 사유를 하나로 융합한 문학 연구가로 큰 발자취를 남긴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이 쓴 수풀(Die Gebusche)에서 인용한 4행시가 적혀 있다.
“온갖 색깔의 대지의 꿈속에서 모든 음향이 소리를 내는 가운데 은밀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조용한 음이 들려온다.”
아마도 그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클라라, 조용한 소리의 진원지는 슈만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베토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의 마지막 노래에서 인용한 “내 사랑 그대에게 불러주는 이 노래들을 기억하오. 감미로운 류트 소리에 맞춰 이 노래를 그대를 위해서만 부르리.” 멜로디를 1악장 마지막에 등장시키기도 했고 C장조를 사용한 것 또한 베토벤이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1번, 미사, 피아노 소나타 등에서 자주 사용한 영웅적인 조성을 염두에 둔 결과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환상곡은 아직은 어린 나이의 클라라를 향한 슈만의 열정적인 사랑 고백이자 베토벤에 대한 경의의 표상이고 파가니니에 대한 존경과 리스트에 대한 우정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작품에는 주제 선율들의 의미와 단편들과의 관계, 시적인 상상력과 은유적인 연상, 작곡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반영과 극복 의지의 표명, 혁신적인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자부심과 동시에 동시대 음악가들에 대한 애정, 산문적인 스토리텔링과 운문적인 함축적 표현력, 사랑이 주는 환희와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 교수로 인한 갈등, 아직은 짧은 삶에 대한 회고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 담겨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슈만은 클라라에게 “지금껏 내가 작곡했던 곡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작품으로서 당신을 향한 깊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1869년 이 작품을 헌정 받은 리스트는 자신의 제자 안톤 스트렐레츠키(Anton Strelezki)에게 “시끄럽고 격렬한 것과는 전혀 반대로 지극히 몽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라고 가르친 바 있다. 이러한 언급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환상곡은, 비록 몇몇 부분에서는 최고도의 힘과 격정적인 직선성이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음향적인 효과를 앞세우기보다는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슈만의 환상과 꿈을 짚어내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

곡의 구성 및 특징

제1악장 Durchaus fantastisch und leidenschaftlich vorzutragen (매우 환상적이고 열정적으로)
  첫 악장에는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그 분위기가 닮아 있는 두 개의 주제가 등장한다.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불안한 상태를 보여주고 절망적이라기에는 너무 장대한 이들 주제는 어떻게 보면 첫 도입부에 등장하는 스케일로 은유된 클라라에 대한 슈만 자신의 복잡한 관념의 상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음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는 이 첫 악장은 템포와 레가토, 옥타브 도약, 다양한 정도의 스타카토의 사용, 지속적인 페달링 등등이 복잡하면서도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며 초월적이라고도 할 슈만만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제2악장 Mabig. Durchaus energisch (적당한 빠르기로 힘차게)
  두 번째 악장은 한결 명료해진 행진곡 풍의 리듬으로 시작한다. 그렇지만 결코 <다비드 동맹 무곡집> 풍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 알프레트 코르토는 이 두 번째 악장에서 안정된 템포를 유지하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말은 곧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기분을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 모습은 결코 광시곡 풍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되고 클라라를 향한 순수한 집념과 희망의 미소를 견지해야 하는 일종의 묵언수행적인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오랫동안 이 두 번째 악장은 그 오케스트라적인 효과와 대범한 크레셴도로 많은 사랑을 받아 오며 베토벤의 ‘하머클라비어 소나타’의 2악장과 같은 의미로 인식되곤 했지만, 이제는 슈만의 광기를 반영한 첫 악장과는 대조되는 슈만의 강인한 신념과 이성을 대변하는 독립적인 악장으로서 그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고 있다.

제3악장 Langsam getragen. Durchweg leise zu halten (느린 템포로 일정하게. 조용함을 유지하면서)
  마지막 악장은 일종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음악적 꽃다발과 같은 대목으로서 순결한 향취와 신비스러운 클라이맥스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보면 클라라를 향한 자기 구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여성 본능의 실현인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그리워하는 슈만의 파우스트적인 동경은 후일 이 작품에 대한 답례로 리스트가 작곡하여 슈만에게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B단조 마지막 코다의 그 고요하면서도 영롱한 여운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슈만과 클라라
클라라는 당시 뛰어난 실력의 피아노 연주자로 평생 슈만의 음악적 뮤즈로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둘은 클라라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0년에 부부가 된다.


이 ‘과도하지 않은’ 세 개의 악장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체로 이끌어 나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음악을 빠르고 느리게, 크고 작게, 열정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 등등의 극단적인 대립의 개념으로 이해하다 보면 작품의 분위기와 인상이 와해되며 음악적인 깊이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슈만은 작품 곳곳에 과도한 지시들을 심어 놓았다. 리타르단도와 같은 템포 변화가 빈번히 등장할 뿐만 아니라 2악장 코다에는 ‘한층 더 흥분하여’라는 표시를 써 놓았고, 메조 포르테와 포르티시시모로부터 피아니시모를 오가는 극단적인 음량 대비가 등장한다.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이 작품에 대해 “반드시 슈만이 작곡한 그대로 연주하라.”고 언급한 것처럼 슈만의 시적 상상력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악보의 음표와 표시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휴지부와 여운의 길이, 각 악장 사이의 쉼 간격, 페달링의 정도 등등 피아니스트의 주관적인 해석의 여지 또한 상당 부분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리듬과 부점, 슬러, 악센트, 관현악적인 색채감을 슈만이 의도한 대로 재현하려면 연주자는 단순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철학자 또는 시인의 입장이 되어야만 한다.

글 :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음악 전문지 <음악동아>, <객석>, <그라모폰 코리아>, <피아노 음악>과 여러 오디오 잡지에 리뷰와 평론을 쓰고 있으며, 공연, 방송, 저널 활동, 음반 리뷰, 음악 강좌 등 클래식음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 작곡가들>을 번역했다.

글 출처 : 네이버캐스트 - 오늘의 클래식 - 명곡 명연주 201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