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과 환상곡
슈만의 성격에는 두 가지의 대조적인 면이 있다.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조울증이 그것으로 억울(抑鬱)과 조양(躁揚)의 교차이다.
울은 부드러운 몽상과 어두운 허무와 절망이고, 조는 파괴적인 충동과 발랄함의 고양이다. 이런 슈만은 소설가인 장 파울(Jean Paul, 1763~1825)의 『개구쟁이 시절(Die Flegeljabre)』에서 내성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을 지닌 쌍둥이 발트와 풀트를 대면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두 개의 필명을 만들게 된다.
‘플로레스탄(Florestan)’은 낭만주의 음악을 위한 용감한 기사의 열정적이며 적극적인 외향적 성격을 대변하며, ‘오이제비우스(Eusebius)’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명상적 시인의 내면세계의 면모이다.
이런 것은 출판시 <환상곡>이라 제목이 바뀐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에 의한 큰 소나타, 베토벤을 기념하기 위한 오보렌(obolen) Op.12>에서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곡의 3개 악장에는 각각 <폐허(Ruinen)>, <승전 기념품(Trophaen)>, <영광(Palmen)>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또한 2악장에는 <개선문(Triunphbogen 또는 Siegebogen)>, 3악장에는 <별의 관(冠)) (Slemkranz)>라고도 적고 있다. 여기서 오보렌은 오보루스(Obolus)의 복수로 그리스 화폐의 종류를 말하고 있어 기부를 의미한다. 이렇게 곡은 1836년 완성된다.
곡은 원래 클라라에게 헌정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곡을 작곡한 무렵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Friedrich Wieck)로부터 클라라와의 교제를 크게 방해받고 있던 그런 비극적인 시기였다. 또한 이 무렵 1835년 12월 베토벤 사후 10주년을 기념하여 본에 설립할 기념비 기금 마련이 진행되고 있어 여기에 일조할 생각으로 기념비 발기인인 리스트에게 헌정할 소나타를 쓰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곡은 클라라와 베토벤이란 인물이 깊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슈만 자신의 깊은 정신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슈만은 클라라에게 헌정할 요량으로 출판사에게 이런 뜻을 전한다. 하지만 출판사는 제목을 비롯한 슈만의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1838년까지 다시 수정을 가하고 제목도 단순하게 그냥 <환상곡> Op.17이라고 하여 1839년 출판. 리스트에게 헌정하게 되고 부제도 빠졌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부제는 빼는 대신 독일 낭만파 시인 슈레겔(Friedrich von Schlegel)의 다음과 같은 시를 싣게 된다.
“여러 가지 색깔의 대지의 꿈속에서 모든 음을 뚫고 하나의 조용한 음조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위해 울려 퍼진다.”
이런 시의 인용은 처음 곡을 헌정하려고 했던 클라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슈만 자신도 “당신은 내가 당신을 포기했던 1836년 불행한 여름을 생각한다면 이 곡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의 음조는 거의 당신이라고 믿고 있다.” 또 “1악장은 아마 내가 쓴 곡 중 가장 열정적인 것이며, 당신을 위한 비가(悲歌)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환상곡>은 음악 외적인 연상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슈만이 사랑하고 있던 클라라와의 사랑의 단절에서 오는 고뇌이다. 특히 첫 악장은 베토벤의 곡인 <아득한 여인이여(An die ferne Geliebte)> Op.98 제6곡과 깊은 관련이 있고, 종악장은 ‘몸이 아플 때 희열에 차 선율을 탐닉하여’라는 슈만의 주석이 있으며 베토벤의 9번 교향곡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 곡은 베토벤에 대한 경의 표시로 작곡되어 ‘피아노를 위한 대소나타, 베토벤을 추모하며’라고 적고 있다. 결국 처음에는 베토벤을 염두에 둔 소나타였지만 제목을 바꾸고 부제를 빼고 자유로운 구성의 환상풍을 통해 슈만은 그의 속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도 높은 경지로 담아 두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곡은 실제로는 대소나타이지만 <환상곡>이란 제목처럼 광대한 사색과 시적 상념들이 혼합된 슈만 정신세계의 면면이다. 결국 조양의 기질이 더 두드러진 작품이지만, 그 내면에는 우울한 어둠이 교차하며 나아가 궁극적인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