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이야기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첼로 협주곡에 비해 그리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다. 그것은 고루한 영국적인 분위기와 협주곡치고는 매우 긴 50여 분의 연주시간 그리고 다소 과장되게 작곡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곡상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정감으로 이루어진 노래와 안단테의 짙은 정서가 감상자를 훈훈한 마음으로 채워 줄 명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곡상을 잘 살려낸 이가 메뉴인(Yehudi Menuhin, 1961~1999, 미국)으로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매우 뛰어난 명곡임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 곡의 초연은 헌정자인 크라이슬러의 바이올린과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연주되어 대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녹음이 남아 있지 않아 너무도 아쉽지만 이것을 대신할 메뉴인과 작곡자의 탁월한 연주가 남아 있다.
신동 메뉴인은 일곱 살에 첫 번째 공개 연주회인 샌프란시스코 오케스트라와의 멘델스존 협주곡을 협연한 이래로, 1927년 파리에서 폴 파레(Paul Charles Paray, 프랑스) 지휘 라무뢰 관현악단과의 랄로 <스페인 교향곡>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연주, 같은 해 11월 카네기 홀에서 프리츠 부쉬 지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베토벤 협주곡 연주, 그리고 1929년 베를린에서 그 유명한 발터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3B 협주곡 연주회’를 통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이 시기 메뉴인은 녹음도 시작하게 되는데 1928년 첫 녹음을 시작으로 1929년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5번을 비롯해 1931년 로날드 지휘 런던 심포니와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7월, 여기 소개된 엘가 바이올린 협주곡 녹음을 남기게 된다.
당시 이 녹음에 대해 메뉴인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해 여름 녹음 이틀 전에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틀 만에 녹음한다는 것이 가능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엘가에게 먼저 연주를 한 번 해보자고 했다. 이렇게 리허설을 하게 되었는데 1악장 2주제에 들어가기 전 엘가가 말했다. “좋아 아무 걱정 없어, 녹음은 잘 될 거야”라고, 이것이 녹음 전에 연습한 것의 전부였다.’
이것이 바로 엘가 바이올린 협주곡의 전설적 연주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메뉴인의 나이 불과 16세 때 연주된 것으로, 10대 천재 소년의 놀랄 만한 기교와 뛰어난 감수성에 감탄하게 되는 환상적인 연주이다. 역사상 불세출의 천재로 기록되는 메뉴인이 나이가 들어서 들려준 통상의 연주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당시 세계가 왜 이 어린 소년 메뉴인에게 그토록 열광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엘가 자신이 지휘자로 참가하여 작곡자 자신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진하게 묻어나는 바이올린의 감동 어린 선율의 전개가 과연 16세의 소년이 연주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이다. 이에 우리는 음악적 천재의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연주는 1악장 알레그로부터 엘가의 묵직하고 저력이 넘치는 중후한 반주에 이어 등장하는 유연한 음색과 깊은 표현력의 도취적인 아름다움이 풍기는 포르타멘토(portamento)는 과연 천재적임을 실감케 한다. 완벽히 구사되는 기교와 곡에 대한 뜨거운 공감에서 흘러나오는 흐느끼는 듯한 전율적인 감성이 감동의 장을 펼치고 있다. 특히 2악장 안단테의 그윽한 아름다움이 헤아릴 길 없는 깊디깊은 음악적 감흥을 전해준다.
반주를 맡은 엘가의 지휘는 작곡자 자신의 해석을 가늠하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잃지 ㅇ낳은 유연한 품격과 여유로운 품위가 긴장감 속에 시종일관 유지도고 있어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이상적 연주가 되고 있다. 더불어 엘가 작곡의 모토인 ‘고귀하게(nobilmente)’란 특징 역시 잘 살아나고 있다.
초연자인 크라이슬러의 주를 들을 수 없는 아쉬움은 이 메뉴인의 천재적 연주로 만족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감동의 역사적 연주로 길이 을 것이다. 음질은 다소 떨어지지만 그 음악적 감동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다.
혹 지나간 시대의 떠들썩한 천재인 메뉴인의 피상적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정말로 깊은 감동을 주리라 확신하는 좀처럼 듣기 힘든 엘가 바이올린 협주곡의 이상적 재현이다. 누군가 말했다. “재능은 타고나지만 천재는 하늘이 내린 것이다.”라고.
참고로 메뉴인은 이 곡을 1966년과 69년 두 차례 아드리안 볼트(Adrian Boult, 1889~1983)와도 녹음을 남겼다.
자료출처 : 불후의 명곡(허재, 책과 음악)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