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과 바이올린 협주곡
1879년 정월 초하루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Gewandhausorch- ester Leipzig)에서는 브람스 바이오린 협주곡 D장조의 초연이 있었다. 지휘는 브람스 자신이었고 독주자는 곡의 헌정자인 요아힘이었다.
한편 이런 요아힘은 드보르작 현악 6중주 Op.48이나 현악 4중주 10번 Op.51을 연주하고는 그의 재능을 주목하였고 브람스 바이올린을 초연 한 해에 드보르작에게도 바이올린 협주곡을 의뢰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Op.53이다.
드보르작은 라이프치히에서 돌아온 1879년 7월에 작곡에 착수 2개월 만에 곡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베를린에 있는 요아힘에게 악보를 보내 의견을 구하게 된다.
그 후 1880년 요아힘의 충고와 의견을 받아들여 수정을 하여 ‘마음에서 울려 나오는 존경심으로 위대한 거장 요셉 요아힘에게’라는 헌서와 함께 곡을 헌정하게 된다. 그러나 1882년 요아힘은 다시 수정을 요구, 드보르작은 또 개작을 하였으나 끝내 요아힘은 연주하지 않았다.
이런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 원인을 요아힘에게 돌리기도 한다. 요아힘은 조언은 독주 바이올린의 최대한 효과를 거두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는데, 1악장의 경우 관현악에 의한 재현부가 아닌 독주 바이올린이 이를 담당한다. 그래서 독주자의 기량 발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으나 형식적 구조의 균형감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을 이런 구조적 관점에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결국 드보르작은 엄밀한 의미에서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적 형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독주 바이올린이 돋보이게끔 관현악과 잘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작곡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아힘은 이 협주곡이 가지는 시적이고도 민족적인 영감 탓에 명인의 기교와 역량을 보여줄 만한 화려함이 부족했던 것으로 여긴 것 같다. 그렇다하더라도 곡은 드보르작다운 영감 그리고 자유로운 환상과 풍부한 가락의 아름다움이 가득 찬 것으로, 특히 보헤미아만의 농후한 색채가 돋보이는 수작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헌정자인 요아힘은 이 곡을 초연하지 않았고, 1883년 10월 프라하에서 드보르작과 동향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온드리체크(Frantisek Ondricek, 1857~1922)와 앵거(Moric Anger, 1884~1905)가 지휘하는 국립 극장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참고로 드보르작은 <로망스(Romance)> Op.11을 이미 온드리체크에게 헌정한 바 있다.
곡은 전 3악장으로 이루어졌으며 1악장은 랩소디풍의 형식으로 당당하게 시작된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로이터(Florizel von Reuter)는 “브루흐의 협주곡 1번처럼 도입부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멘델스존과 바이올린 협주곡의 영향도 보인다. 1악장과 아타카(attacca)로 연결되는 2악장은 슬라브적인 기분의 아름다운 느린 악장이다. 그리고 3악장은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악장인데, 1년 전에 작곡한 <슬라브 무곡>에서 보여준 민속무곡인 푸리안트(furiant)와 둠카(dumka)가 잘 나타나 있다.
영국 작곡가인 스탠포드는 “드보르작은 자연의 아들이며 생각하기 위해 머무르지 않고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고 오선지에 옮겼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을 반증이나 하듯이 바이올린 협주곡의 풍부한 선율은 거의 영감에 의해 작곡된 느낌을 강하게 전한다.
그러나 단순한 정서주의에 빠지지 않고 감동적인 박력을 유지하는 것은 보헤미아의 민속성이 깊이 침투해 있는 때문이며, 또한 단순한 민요나 춤곡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이유에서이다. 다만 전체적인 조형의 통일감이 다소 부족하고, 독창적인 어법 등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