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피아프 서거 50주년 앞두고 발매되는 Gold Collection 앨범

‘프랑스 문화 아이콘이자 불멸의 샹송여왕’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가 서거한 지 이제 반세기가 다 되어갑니다.

“그 분이 나를 품에 안고 가만히 속삭일 때, 내게는 인생이 장미빛으로 보여요.”라는 “장미빛 인생”의 한 구절 가사처럼 에디트 피아프는 불꽃같은 사랑과 열정, 알코올과 약물에 찌들아 맞이한 비참한 죽음은 그 어떤 멜로드라마보다 더 비극적인 삶 자체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상으로 추앙 받고 있는 ‘작은 참새(little sparrow)’ 에디트 피아프는 그녀의 뒤를 잇는 거의 모든 남녀 ‘샹송 가수’들에게도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해왔습니다.

에디트 피아프의 위대한 힘은 뛰어난 기교라든가 목소리의 청아함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노래에서 느껴지는 꾸밈없는 정열에 의한 것입니다(1m 42cm키의 유난히 작은 체구임에도 그녀의 목소리가 발산하는 힘은 청중들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창법은 프랑스 고전 “샹송‘의 전형으로서 격정적이고 때로는 극적이며, 폭넓고 빠른 비브라토(떨림음)로 가사의 마지막 하나까지도 심금을 울리게 합니다. 그녀는 구슬프고 애절한 것을 좋아하여 마음의 고통, 비극, 가난, 거리의 힘겨운 인생을 노래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소재는 그녀의 실제 인생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았으며, 그녀 자신만의 독특한 곡을 위해 작곡가를 끊임없이 바꾸기도 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파리 길거리의 부랑 소녀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까지 그녀는 전설 같은 삶을 살다 갔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녀는 세 살 난 외동딸을 잃었고, 약물중독에 빠졌으며, 세 차례의 교통사고에서 목숨을 건졌고, 끝없는 염문을 뿌리기도 했는데, 연인 중 한 명은 그녀를 만나러 오던 길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가수생활 초창기에는 그녀에게 도움과 가르침을 주는 남성들을 선택했으나, 자신의 명성이 궤도에 오른 후반기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성들이 그들의 야망대로 작곡가나 가수가 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조력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싶으면 그들을 떠났습니다. 47세에 암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을 무렵, 피아프는 새로운 장르의 수많은 명곡을 녹음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Mon Legionnaire(나의 병사님)”,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 “L'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 “Milord(귀족)”, “Non, Je Ne Regrette Rien(후회하지 않아요)” 등의 곡을 통해 그녀의 수많은 팬들은 진정한 프랑스인의 혼을 가슴속 깊이 새길 수 있었습니다.

피아프는 1915년 12월 19일 파리의 한 빈민 지역인 메닐몽탕(Menilmontant)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에디트 지오반나 가씨옹(Edith Giovanna Gassion)’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태어난 곳은 벨르빌 가(Rue de Belleville) 구석의 한 가로등 아래이며, 당시 그녀의 어머니 옆에는 두 명의 경찰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들도 있는데, 그 근처에 있는 병원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그녀의 탄생이 초라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의 아버지 루이 가씨옹(Louis Gassion)은 유랑 곡예사였으며, 거리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모로코계 이탈리아인이었던 어머니 아니타 메이야르(Anita Maillard)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이따금씩 매춘을 하며 가수가 되기 위해 카페나 거리 한 구석에서 린 마르사(Line Marsa)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에디트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자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녀를 거의 외면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에디트를 친할머니에게 보내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친할머니는 노르망디 지방의 베르네(Bernay)라는 마을에서 작은 사창가의 장사를 도와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의 매춘 여성들은 틈이 날 때마다 어린 에디트를 돌봐주었습니다. 일화에 따르면, 5살 난 에디트가 급성 결막염으로 시력을 잃게 되자 그곳의 여성들은 영업을 중지한 채 교회에서 기도를 하며 하루를 보냈으며, 며칠이 지난 후에 에디트는 시력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1922년 아버지는 다시 에디트를 찾아왔고, 그녀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파리로 데려와서 함께 거리 공연에 나섰습니다.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첫 일들이라곤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모자를 돌리며 돈을 받을 때 재주껏 많이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1930년이 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녔으며, 당시 10대이던 에디트는 노래 실력을 쌓아가게 되면서 자신의 주특기로 삼았습니다. 에디트는 이복 여동생이자 무절제한 인생에 동반자가 되어준 시몬 베르투(Simone Berterut)와 한 조가 되어 거리, 광장, 카페 그리고 군부대 등에서 노래를 불러 팁을 받았으며, 이러한 생활 내내 지저분한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였습니다.

그녀는 여기저기의 불량배들 모임에 나가고, 밤마다 문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사창가 포주나 거리의 불량배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거리 공연을 하면서 생계비 몇 푼을 버는 동안 그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2년 그녀는 루이 듀퐁(Louis Dupont)이라는 청년 배달부를 사랑하여 그의 딸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평생토록 반복되는 그녀의 습관처럼, 그와의 관계에 실증을 느껴 다른 남자를 만났으며 그와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자신의 엄마가 그랬듯이 에디트 역시 거리 공연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가 없어서 딸을 혼자 두는 일이 많았습니다. 결국 아버지인 듀퐁이 아이를 키우기로 했지만, 아이는 몇 달 지난 후 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에디트의 다음 남자친구는 포주였는데, 그녀가 매춘을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대신 팁의 일부를 가져갔습니다. 그와의 관계가 깨어진 후 에디트는 그가 쏜 총에 맞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던 에디트 가씨옹은 불행한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1935년 피갈의 한 거리 귀퉁이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카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플레(Louis Leplee)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함에 매료된 르플레는 어린 에디트를 자신의 품 안에 거둬들였으며 자신이 운영하는 카바레의 스타로 키워냈습니다.

그는 에디트에게 “라 몸므 피아프(La Mome Piaf: 파리의 속어로 ‘작은 참새[little sparrow]' 또는 ’어린 참새[kid sparrow]'라는 뜻)”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그녀의 레퍼토리에 살을 붙였습니다. 또한 무대에 서는 기본요령을 가르치고 훗날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순 검정색의 드레스를 입게 합니다.

르플레의 폭넓은 홍보활동 덕분에 피아프가 데뷔하던 날 밤,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를 비롯한 많은 유명인사들이 찾아옵니다.

그녀는 대성공을 거두고 1936년 1월 “les Momes de la Cloche(거리의 여자들)”와 “L'Etranger(이방인)”라는 곡으로 폴리도(Polydor) 레코드사와 첫 음반 작업에 들어갑니다.

두 번째 곡 “L'Etranger(이방인)”의 작사가 마르게리트 모노(Marguerite Monnot)는 그 후에도 피아프와 함께 평생 작업을 계속하며 곡을 쓰게 됩니다.

1936년 4월 르플레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경찰은 처음부터 피아프를 비롯해 그녀와 자주 어울리던 건달들을 의심하게 되며, 그로 인해 흥분한 언론은 그녀의 결백이 밝혀진 후에도 계속 위협을 가함으로써 가수로서 인생의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그 해 여름, 파리 밖 지방 순회공연에 나서기에 앞서 스캔들이 발생했고, 피아프는 과거의 인생행로와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한 도움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파리로 돌아와 작곡가 겸 사업가이자 외인부대 참전용사인 레이몽 아쏘(Raymond Asso)를 찾아갑니다. 그가 작곡한 “Mon Legionnaire(나의 병사님)”를 피아프가 거절한 적이 있었는데, 그 곳은 후에 피아프에게 큰 영향을 준 마리 뒤바(Marie Dubas)가 녹음하게 됩니다.

피아프는 자신의 원래 이름 중의 일부(에디트)를 되살려 자신을 ‘에디트 피아프’라고 알립니다.

아쏘는 그녀에게 불필요한 외부인과의 접촉을 삼가도록 하며, 그녀가 받지 못한 기초교육을 보충해주기로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피아프로부터 길거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뒤, 아쏘는 “L'Etranger(이방인)”의 작곡가 마르게리트 모노와 팀을 이뤄 피아프의 독특한 경험을 살린 최초의 레퍼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1937년 1월 피아프가 녹음한 “Mon Legionnaire(나의 병사님)”가 빅 히트를 하면서 피아트는 아쏘-모노 팀과 계속해서 “Le Fanion de la Legion(외인부대 깃발)”, “C'est Lui Que Mon Coeur a Choisi(내가 선택한 사랑은 그대)”(1938년 말 대 히트작), “Le Petit Monsieur Triste(우울한 어린 신사)”, “Elle Frequentait la Rue Pigalle(그녀는 피갈 거리에 자주 들러요)”, “Je N'en Connais Pas la Fin(그 끝을 몰라요)” 등의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뒤 같은 해, 피아프는 ABC 극장(그녀는 이 무대에서 샤를르 트레네[Charles Trenet]를 소개합니다), 보비노(Bobino)극장(주역으로)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쇼는 모두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녀는 파리 음악계의 새로운 스타로 등장합니다.

1939년 가을 아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소집됩니다. 이듬해 초, 피아프는 자신의 대표 곡 중 하나인 “L'Accordeoniste(아코디언 연주자)”를 녹음하는데, 이는 작곡가 미셀 에미르가 전투에 참여하기 바로 전의 일입니다. 그녀는 훗날 나치의 점령기간 중 유태인 에미르의 프랑스 탈출을 도와줍니다.

아쏘가 없는 동안 그녀는 배우 겸 가수인 폴 뫼리스(Paul Meurisse)와 교제를 시작하는데, 그로부터 프랑스 상류사회의 교양과 문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자주 합동공연을 치렀고, 장 콕토(Jean Cocteau)의 단막극 <냉담한 미남(Le Bel Indifferent)>에도 함께 출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곧 시들해져 피아프와 시몬은 고급 사창가 맞은편의 아파트로 이사합니다. 이 무렵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여 사창가의 손님 중에도 게슈타포 장교들의 왕래가 늘어납니다. 이로 인해 피아프는 오랫동안 나치와 내통하였거나 그들에게 너무 협조적이고 집이나 공연장에서 여러 독일군 장교와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심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나치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유태인 피아니스트인 노르베르 글랑즈베르(Norbert Glanzberg)와 교제하였고, 1943년 마르게리트 모노와 함께 투쟁의 의미를 담은 곡 “Ou Sont-Ils Mes Petits Copains(내 동무들은 어디에)?”를 지었으며, 자신의 콘서트 곡목에서 이 노래를 삭제하라는 나치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일화에 따르면, 피아프는 한 집단수용소의 포로들과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 후 사진 속 프랑스인들의 얼굴이 유출되어 그 중 많은 사람을 탈출시키기 위한 문서 위조에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피아프는 저널리스트 앙리 콩테(Henri Contet)와 교제를 하게 되는데, 1941년 그녀가 두 번째로 출연한 영화 <몽마르트르 쉬르 세느: Montmarter sur Seine>의 영화촬영 중 스튜디오에서 조르쥬 라꽁브(Georges Lacombe) 감독으로부터 앙리 꽁떼를 소개받게 됩니다.

그를 설득하여 작사가로서 마르게리트 모노와 팀을 이루도록 합니다. 이는 아쏘와의 협력 이후 가장 큰 성과로서, 피아프는 “Coup de Grisou(갱내 가스 폭발)”, “Monsieut Saint-Pierre(생-피에르씨)”, “Le Brun et le Blond(갈색머리와 금발)”, “Histoire du Coeur(사랑이 역사)”, “Y'a Pas D'Printemps(거기에는 봄이 없었네)” 등을 비롯해 수많은 신곡을 얻게 됩니다. 꽁떼와의 사랑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이별 후에도 계속 그녀에게 곡을 써주었는데, 피아프의 대표곡 중 하나인 “Padam Padam”이 1951년에 발표됩니다.

한편, 1944년 피아프는 이브 몽땅(Yves Montand)이라는 매력적인 젊은 가수와 새로운 표제를 갖습니다. 그녀의 철저한 지도하에 몽땅은 일 년 만에 프랑스 대중 음악계 최고의 스타가 됩니다.

그의 인기가 자신에 필적하는 피아프는 그와의 관계를 청산합니다.

그녀의 다음 번 제자는 9명으로 구성된 보컬 그룹 ‘레 꽁빠뇽 그 라 샹송(Les Compagnons de la Chanson: 샹송 친구들)’으로, 그들은 그 후 몇 년 간 피아프와 함께 순회공연 및 음반 녹음을 합니다(멤버 중한 명은 그녀의 새 애인이 됩니다). 그 후 파떼(Pathe) 레코드사와 음반 작업을 하며, 그녀는 1946년 “Les Trois Cloches(세 개의 종)”로 빅 히트를 기록합니다.

그 곡은 후에 브라운즈(Browns)에 의해 “The Three Bells”라는 영어 가사로 번역되어 또한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같은 해 1946년, 그녀의 자작곡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가 또 다시 빅 히트를 하면서 외국의 팬들에게도 그녀의 명성이 각인되고 이 곡은 피아프의 가장 유명한 대표곡으로써 감동적인 명곡 중의 명곡이 됩니다.

사실 마리안느 미셸이라는 여성 가수가 피아프에게 곡을 부탁해서 받은 이 곡은 1945년 11월 에뜨왈 광장과 가까운 곳의 마리안느 미셸 자신이 경영하는 카바레에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하여 피아프 자신도 1946년에 녹음하게 되는데, “구분이 나를 품에 안고 가만히 속삭일 때, 내게는 인생이 장미빛으로 보여요.”라는 가사를 가진 이 애절한 그리움이 담긴 이 불후의 명곡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영어 가사는 1948년 맥 데이비드가 작사하여 같은 해 영화 (The Dicky Bird Song To The Victor)에 삽입되었고, 1954년도 영화 <아름다운 사브리나(Sabrina)> 속에서는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불렀습니다.

1947년 말 피아프는 처음으로 미국 순회공연에 나서지만 초기에는 성공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밝고 야한 듯 화려한 파리인의 모습을 상상했던 미국의 청중들은 그녀의 소박한 무대 연기와 우울한 노래 스타일에 실망합니다. 그녀가 미국을 떠나기 직전 뉴욕의 한 저명한 비평가가 그녀의 소를 극찬하는 논평을 싣습니다.

그는 미국 팬들에게 그녀를 성급히 외면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그러한 홍보 덕분인지 뉴욕의 베르사이유 카페(Cafe Versaillis)의 공연약속이 잡히고, 그 성공으로 인해 피아프는 5개월 이상 머무르게 됩니다.

그 때 피아프는 과거 일 년 정도 알고 지내던 프랑스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세르당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을 시작하며, 그 후 얼마 안 되어 세르당은 중량급 세계 타이틀을 획득하여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 됩니다.

불행히도 1949년 10월 비극이 벌어집니다.

세르당은 뉴욕에 거주하는 피아프를 보러 오기로 합니다. 그가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에 그녀는 세르당에게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설득합니다.

그가 탄 비행기는 아조레스 섬에 추락하고 그는 사망했습니다. 죄책감과 슬픔으로 만신창이가 된 피아프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르핀 주사마저 시도하게 됩니다.

1950년 초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연인 세르당에게 바치는 노래로 마르게리트 모노와 함께 지은 “L'Hymne a l'Amour(사랑의 찬가)”를 녹음합니다. 이 곡은 그녀의 가장 유명하면서도 감동적인 대표곡 중 하나가 됩니다.

1951년 피아프는 젊은 가수 겸 작곡가 샤를르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와 만납니다. 그는 그녀의 새로운 제자로서 훗날 프랑스 음악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피아프의 다른 연이니들과는 달리 아즈나부르와 피아프는 언제나 정신적인 사랑을 지켜갔으며, 그럼에도 그들의 우정은 깊고 진실되게 이어져나갔습니다.

아즈나부르는 피아프를 위해 비서, 운전수 등 모든 역할을 소화해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공연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자신의 순회공연에 참가시켰으며, “Plus Bleu Que Tes Yeux(너의 눈빛보다 더 푸른)”와 “Jezebel(제제벨)” 등의 히트작을 비롯하여 그의 초창기 노래 몇 곡을 함께 녹음했습니다). (같이 탔던) 자동차 안에서 심한 사고를 당한 뒤, 두 사람의 우정을 짧게 끝나버릴 뻔하기도 했습니다. 피아프는 한쪽 팔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통증 완화를 위해 의사가 처방해준 모르핀이 곧 약물의존으로 변해 알코올 중독으로 번져갔습니다.

1952년 그녀는 쟈크 필(Jacques Pills)과 연애 후 결혼하게 됩니다. 필은 자신의 피아노 연주자 질베르 베코(Gilbert Becaud)와 함께 피아프의 히트작 “Je T'ai Dans la Peau(내 안의 그대)”를 썼습니다.

베코는 곧 다른 이들처럼 피아프의 조력으로 대중가수의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한편 필은 곧 피아프의 약물중독 문제가 심각함을 알게 되며, 그녀를 세 차례에 걸쳐 약물중독 치료시설에 입원시킵니다. 그럼에도 피아프는 음반 작업과 공연을 계속해나가며 대성공을 거둡니다. 당시 그녀는 카네기홀과 피리의 전설적인 올림피아(Olympia) 극장에 서기도 했습니다.

1955년 피아프와 필은 이혼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진전섬망(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헛소리와 망상이 일어나는 증세) 발작으로 입원하게 됩니다.

건강에 대한 심한 우려에도 음악해석이 뛰어난 피아프는 50년대 중반 절정기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해외순회공연은 성공을 거듭하였으며, 그녀에 대한 프랑스 대중의 열성은 숭배에 가까웠습니다.

1956~1958년에 걸쳐 피아프는 인기 신곡들을 발표합니다. 그 중에는 “La Foule(군중)”, “Les Amants D'un Jour(하룻밤의 연인)”, “L'homme a la MOto(오토바이를 탄 남자)” 그리고 대 히트작인 “Mon Manege a Moi(나의 회전목마)”가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다시 한 번 재활원 생활을 마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재활치료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마약과 알코올 남용으로 인해 건강은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1958년 말, 또 다른 신예 작곡가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와 만납니다. 그는 피아프의 새로운 연인이자 스타 육성 프로젝트 대상이 됩니다. 다시금 마르게리트 모노의 조력으로 무스타키는 “Milord(귀족)”라는 곡을 씁니다. 이 곡은 1959년 초 전 유럽 차트를 석권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피아프의 영국 내 첫 인기곡이 됩니다.

그 후 같은 해 피아프와 무스타키는 또 한 번 교통사고를 당하였으며, 그녀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뉴욕의 윌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공연하던 중 그녀는 무대 위에서 쓰러져 각혈하여 급성 위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긴급 수송됩니다. 그 후에도 순회공연에 집착하다 스톡홀름의 무대에서 다시 쓰러집니다. 그리고는 다시 수술을 받기 위해 파리로 옮겨집니다.

피아프는 곧 음반 작업실로 돌아와 전설적인 프랑스 작곡가 샤를르 뒤몽(Charles Dumont)이 쓴 곡을 녹음하려 했습니다.

“Non, Je Ne Regrette Rien(후회하지 않아요)”은 그녀 일생의 명곡 중 하나로 1960년 해외에서 빅 히트가 되었으며,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마이웨이(My Way)"에 견줄만한 곡이 됩니다.

“Mon Dieu(나의 신이여)”, “Les Flons-Flons du Bal(시끄러운 댄스 뮤직)”, “Les Mots D'Amour(사랑의 언어)” 등 피아프는 뒤몽이 써주는 새로운 신곡들로 인기를 이어나갑니다.

1961년 그녀는 올림피아 극장에서 장기 공연을 하며, 그 후 같은 해 그리스의 유명가수 테오 사라포(Theo Sarapo, 본명: 테오파니스 람부카스)를 만납니다. 그리고 피아프의 새로운 프로젝트이자 마침내 두 번째 남편이 됩니다. 사라포의 나이는 피아프의 반밖에 되지 않았으며, 피아프의 불안한 건강으로 인해 프랑스의 언론은 그가 피아프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1962년 “A Quoi Ca Sert l'Amour(사랑이 무슨 소용인가요)”라는 이중주곡을 녹음하였으며, 피아프의 그 해 올림피아 마지막 공연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무대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한 몸임에도 피아프의 성량은 퇴색할 줄 몰랐습니다.


1963년 피아프와 사라포는 보비노 극장의 무대에서 함께 노래했으며,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곡인 “L'Homme de Berlin(베를린의 남자)”을 녹음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프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암에 걸렸습니다.

사라포와 그녀의 동생 시몬 베르투는 피아프를 프랑스 리베에라의 플라스카시에에 있는 그녀의 별장으로 데려와 간호하였습니다. 그녀는 의식을 회복했다 잃기를 몇 달 동안이나 반복하다가 1963년 10월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피아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날, 프랑스의 전설적인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장 콕토(Jean Cocteau)는 “그녀는 위대했다. 피아프와 같은 여성은 이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불과 4시간 후에 심장 발작을 일으켜 그녀의 뒤를 따르듯 같은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비밀리에 피리로 옮겨졌기 때문에 팬들은 그녀가 고향에서 사망한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전국을 슬픔으로 몰아넣었고, 수만 명의 팬들은 파리의 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장례 운구를 보느라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사망 후에도 프랑스 대중음악에 우뚝 솟은 그녀의 입지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페르 라세즈(Pere-Lachaise) 묘지에 위치한 그녀의 무덤은 지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묘소 중 하나이며, 그녀가 부른 노래들은 프랑스는 물론 다른 나라의 수많은 고전 팝 음악가들에 의해 계속 불려지고 있습니다.


본 앨범은 미국의 시사 주간지 「Newsweek」가 <20세기 100년의 스타들> 특집에서 피아트를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한 바 있듯이, 프랑스의 문화 아이콘이자 불명의 샹송여와 에디트 피아프의 서거 50주년을 앞두고 발매되는 Gold Collection음반입니다. 자신의 노래만큼이나 불꽃과도 같은 사랑과 열정, 그리고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떠난 에디트 피아프의 불후의 명곡들을 ‘Love', 'Passion', 'Memory'의 3개 주제별로 선곡하여 66곡을 수록한 3CD디지팩 패키지의 빅 히트 베스트 컬렉션입니다.

“빠담빠담”, “장미빛 인생”, “사랑의 찬가”, “제제벨”, “너의 눈빛보다 더 푸른”, “파리의 하늘 아래”, “고엽”, “세 개의 종”, “나의 회전목마” 등 최고의 빅 히트 곡들로부터 “거리의 여자들”, “나의 병사님”, “쎄지그의 왈츠”, “나의 반주” 등 1935~1936년에 레코딩한 최초의 곡들까지 베스트곡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으며, 전곡 모두 리마스터링되어 양질의 음질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 출처 : Album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