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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산조
산조란 장구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독주 형태로 연주하는 음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4∼6개의 악장을 구분하여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하며, 특히 대금산조는 대금으로 연주하는 산조를 말한다.
대금에는 정악을 연주할 수 있는 정악대금과 시나위나 남도 무악에 주로 쓰이는 산조대금 2가지가 있다. 정악대금은 음의 변화가 없어 합주에 사용되며 산조대금은 시나위나 남도무악 등 다양한 가락을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산조대금은 정악대금과 음높이, 잡는 방법, 크기 등이 다르다.

오랜 세월동안 전승되어 온 대금산조는 듣기 좋게 편곡되고 연주도 기교가 있어 긴장과 흥겨움을 주며, 가락에 리듬과 장단을 더하기 위한 장식법(바로붙임·엇붙임·완자걸이·잉어걸이), 농음(꺾고·평으로내고·흘러내리고·밀어 올리고·질러내고), 틀(형식), 즉흥성 등의 특징이 있다. 산조의 장단은 대개 진양·중몰이·자진몰이가 큰 기둥이며 중몰이와 자진몰이 사이에 중중몰이가 들어간다. 장단은 리듬과 한배를 가지며 악장(부분)의 이름이 되기도 한다. 가락의 붙임새에는 바로붙임·엇붙임·완자걸이·잉어걸이 등이 있는데 이는 가락 즉 장식적 방법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대금산조는 20세기 초 박종기(朴鍾基)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후 대금산조는 박종기가 만든 '소리더늠대금산조'와 강백천(姜白千)이 만든 '시나위더늠대금산조'로 크게 나누어졌는데 소리더늠대금산조는 판소리가락에 치중하여 기악화한 것이고 시나위더늠대금산조는 대금시나위가락에 변화를 주어 만든 것이다.

박종기의 소리더늠대금산조는 한주환(韓周煥)·한범수(韓範洙)를 거쳐 이생강(李生剛)·서용석(徐龍錫) 등에 전하여 각기 독특한 유파를 형성하고 있다. 강백천의 시나위더늠대금산조는 김동진(金東鎭)·김동표(金東表)를 거쳐 문동옥(文東玉)에게 전해지고 있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기·예능보유자에 강백천(姜白千, 1982 해제)·김동표(金東表)·이생강(李生剛)이 있다.

글 출처 : Daum 백과사전
이생강, 그의 삶과 음악
이생강은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생강(生剛)은 일본식 이름 山本生剛에서 온 것으로 그의 아버지가 굳세게 살아가라 하여 지어 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이수덕은 단소나 피리, 호적 같은 관악기를 잘 다루는 편이었지만 음악가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고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이었기 때문에 이생강은 어려서부터 악기를 매만졌고 급기야 집안 형세가 나빠졌을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악기를 가지고 살길을 찾아 전국을 전전할 정도로 악기를 생활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바로 그것이 이생강을 음악가로 성장하게 한 큰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생강은 일찍부터 악기에 재능을 보였다. 다섯 살 때의 일이다. 동경 시내의 그의 이웃집에는 유명한 사꾸하찌(尺八)선생 한 분이 살았는데, 우연히 그 집에 놀러간 어린 생강이 사꾸하찌를 잡고 소리를 내니 그 선생님은 “생강이는 악기에 매우 소질이 있다”고 하면서 그에게 사꾸하찌로 오이와께라는 곡을 가르쳐 주었다.

8·15해방이 되자 이수덕은 가족을 이끌고 동경에서 부산으로 옮겨오게 된다. 혼란한 해방 공간에 더러 사업에도 손을 대 보았으나 이내 망하게 된 이수덕은 급기야 생계수단으로 자식들을 데리고 떠돌이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장사라는 것이 거리에 판을 벌리고 이생강이 피리나 단소를 불며 사람을 모으면 나중에 아버지가 명태나 직접 만든 피리 등의 악기를 파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생강은 언제나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유행가도 불고 민요도 불면서 음악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악기를 좋아하고 또 힘이 좋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거리의 악사노릇을 하지만 짜증나거나 지치는 일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아는 곡은 다 악기로 불면서 그것이 생활이려니 하고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길거리 장사를 하면서 이 고장 저 고장을 다닐 때 이생강과 그의 가족들은 포항에 꽤 오래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거기서 통영 출신의 오광대 음악 반주자 문일이라는 분을 만나게 된다. 문일선생은 관악기를 두루 잘 했던 잽이였기 때문에 이생강은 그에게서 피리와 호적으로 민요도 배우고 시나위 가락도 배웠다. 문일선생은 이생강의 기억에 남는 최초의 민속악 선생인데 그때 그곳에는 동해안무속의 김석출도 자주 나타나곤 했다 한다.

1948년에는 전주역 앞에서 피리가판을 벌리고 피리를 불면서 악기와 명태를 팔았는데 어느 날엔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이생강이 부는 피리소리를 듣고는 자기의 대금을 꺼내어 한 곡조 부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그 후 이생강의 스승이 된 유명한 대금의 명이니 한주환이었다.

그 당시 한주환이 불었던 것은 대금 산조가락이었고 그 후에 이생강은 한주환에게서 대금 산조 자진모리 부분을 처음으로 배우게 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6.25 사변 후에는 이생강이 한주환으로부터 대금산조 한 바탕을 다 배우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6.25사변 중에는 주로 부산에서 살았는데 이생강의 나이는 10대 초반이었지만 악기를 오랫동안 불어왔고 체격도 좋아서인지 많은 민속음악인들을 만나 어울리고 함께 무용반주를 하는 등 음악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한주환 선생을 재회한 것도 부산이었고 방태진씨나 오진석씨를 만난 것도 부산이었는데 영광 출신의 오진석에게는 대풍류와 시나위를 배우기도 하였다. 이 부산 시절에 최창노라는 분에게 향제 풍류를 배움으로서 그의 음악의 폭은 한층 더 넓어지게 되었다.

1950년대의 이생강은 나이도 어렸지만 그의 음악도 기술의 음악이었고 남과 같이 음악을 하면서 소리를 좀 더 잘 내는 하나의 기능인에 불과한 쟁이의 음악이었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도 무용반주를 하거나 거리에서 사람을 모으고 물건을 파는 데는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쪽지방에서는 꽤 알아주는 잽이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생강의 운명은 한 지방의 잽이로 주저앉을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1960년에 들어서면서 이생강의 무대는 서울로 옮겨지게 되었고 그의 음악도 일대 변신을 하게 되었다. 지영희씨 집에 기거하며 음악을 배우기도 하고 박성옥씨를 따라 다니며 뮤용반주로 돈을 벌기도 하였다.

또 한일섭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 특히 한일섭의 지침이 오늘날 이생강을 창조적인 음악가로 성장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의 이생강은 20대의 건장한 청년으로 피리, 대금, 단소, 소금, 퉁소, 호적 등 모든 관악기를 잘 다루는 능력 있는 악사였다.

그래서 아쟁을 주로 하는 한일섭과는 함께 연주활동을 할 정도로 기량을 갖추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그냥 소리를 잘 내는 잽이로서의 음악일 뿐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일섭을 만나 함께 연주를 하고 한일섭에게 이것저것 배우면서 이생강은 음악의 속을 알게 되고 그가 이생강을 가르칠 때에는 입으로 소리를 내며 가르치는데 그 입으로 내는 소리가 훨씬 풍부한 표현력을 가졌고 그의 설명이 이생강의 음악세계를 넓고 깊게 열어 주는 것이었다.

특히 대금산조의 가락을 판소리의 소리가ㅇ락으로 설명하며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할 때면 이생강의 음악성이 전율을 일으키며 그의 음악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통째 받아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우조길에서 계면조로 또 계면조에서 평조로 가는 길을 터득하게 되고 높은 음역에서 낮은 음역으로 가는 연결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음악에 대하여 개안(開眼)을 하게 된 것이다.

한일섭을 만나 음악에 개안한 이생강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울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전과는 훨씬 달라졌다. 전에는 같은 소리를 내어도 멋을 모르고 내던 소리이지만 이제는 소리마다의 의미와 기능을 분명히 알고 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대금의 소리가 악기에서 나가는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나가는 감정의 소리가 된 것이다.

생래적으로 타고난 천부의 재능과 전 생활을 악기를 불면서 살아온 기술과 대가들과 함께한 연주 경험들이 모두 합류하면서 새로 눈 뜬 그의 내면에서 새 음악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민속음악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이생강도 음악을 하는 자리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연주를 하곤 했다. 방송도 하고 무용반주도 했다. 65년에는 임춘앵씨의 단체를 2년간이나 따라 다니기도 했다.

생활이 음악이고 음악이 생활수단인지라 끊임없이 연주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의 연주는 좋은 평을 받게 되고 그의 이름도 점점 유명하게 되어갔다. 그는 연주도 잘했지만 그의 음악을 음반이나 테이프로 만들어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무슨 악상이던지 생각만 하면 즉흥연주로 직접 연주(작곡이나 마찬가지)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음반을 낼 수 있었다.

무용반주용의 음악도 만들고 감상용의 음악도 만들었다. 민요ㅣ가락을 악기로 연주하기도 하고 산조나 시나위 가락을 불기도 하였다. 때로는 유행가 가락을 멋진 대금곡으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하였다. 정말 그의 활동범위는 무엇에도 구애됨이 없이 할 수 있는 음악행위 모두에 이를 정도로 열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생강은 음악활동을 광범하게 했던만큼 함께 음악을 했던 사람들도 매우 광범위하다. 한때는 김광식(대금), 이병우(피리), 지영희(해금 피리), 김취란(거문고), 이정업(장단) 등과 함께 방송활동을 한 적도 있고, 박성옥, 김옥진과 함께 무용가(舞踊家) 김백초나 진수방의 무용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한일섭과도 사실은 사제의 관계이지만 함께 연주를 다니는 동료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이생강은 많은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음악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은 물론이요 전국을 누비며 음악활동을 하던 이생강은 70년대에 접어 들면서 김소희, 김윤덕, 신쾌동, 성금연, 지영희등과 함께 유럽과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게 된다.

한국음악을 처음으로 접하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음악을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 음악회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을 것인데 그 때에 그러한 청중을 휘어잡고 한국음악의 매력을 십분 느끼도록 하는 연주가 바로 이생강의 대금독주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생강이 나가기 전까지는 좀 소란스럽던 음악회장이 이생강을 만나고 나면 완전히 분위기가 일신되어서 다음 순서에 나가는 사람은 쉽게 청중과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가 한다. 그래서 이생강은 유럽이나 미국 연주에서도 인기를 글었는데 그것이야 말로 그의 연주역량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은 것이어서 이생강의 진가를 국악인들 사이에 새롭게 할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주 여행의 공이 인정되어 그는 73년에 국민훈장목련장을 받기도 하였다. 일약 스타가 된 것이다.하긴 70년도에 TBC 방송국이 선정한 7대 명인에 신쾌동, 박초월, 박녹주, 김여란과 함께 이생강도 명인으로 선정되어서 그는 스타의 대열에 들어가긴 했었다. 그러나 이생강은 어린 나이에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음으로서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확실한 스타가 된 셈이다.

80년대가 되면서 이생강의 행보는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음악가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산조음악을 지키고 연구하면서 국악인구의 저변확대와 후진양성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낟. 그는 전통산조 연구회를 조직하여 연구 활동과 발표회를 연차적으로 벌이는가하면 후진들에게 그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각종 기관과 연주회장을 통하여 산조음악을 끊임없이 일반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현재로 따진다면 그의 음악은 거의 매일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그는 산조음악의 달인으로서 어떠한 산조가락도 악기로 재현할 수 있는 연주역량을 가지고 있고 또 이를 남에게 가르칠 수 있는 사범으로서의 교수법도 가지고 있다. 그동안 그의 발표회를 통하여 발표한 박종기류의 대금산조와 한주환류의 대금산조는 그가 이룩한 이생강류의 대금산조와 함께 한국 대금산조의 구체적인 음악역사가 되었고 단소를 가지고 재현한 진추산제의 단소산조는 유일한 한국의 단소산조가 되었다.

박종기 명인이 불던 대금산조는 한국 대금산조 음악의 효시로 꼽는 것이다. 다행히 레코드가 남아 있어서 이생강이 그것을 듣고 재현할 수 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산조대금이 출현하지 않아서 정악대금과 같은 저음의 대금으로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이생강은 무슨 소리이던지 자기가 내고 싶은 소리는 다 낼 수 있는 기술을 일지기 터득한 음악가이기 때문에 이런 음악의 재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주환 선생이 불던 대금산조는 이생강이 직접 배운 바도 있고 또 녹음된 자료도 있어서 재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음악을 발표하는 날 무대 뒤에서 만난 김소희 명창은 “이생강의 연주가 너무나 한주환 선생의 음악과 똑같아서 눈물이 나더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이생강은 한주환 명인의 음악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추산류의 단소산조만 해도 그렇다. 진추산이 죽은 후로는 누구도 단소로 산조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없어서 무척 아쉬워하던 터인데 이생강이 단소산조를 연주한 거 ㅅ이다. 그것도 박종기류의 대금산조와 한주환류의 대금산조를 연주한 바로 그날 그 무대에서. 진추산의 단소산조도 녹음자료가 토막토막 약간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자료를 연구하여 그의 단소산조를 재현할 것이다.

실로 이생강은 산조음악의 도사이고 관악기의 달인이다. 음악 속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데다가 관악기만 들면 무슨 소리든지 다 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음악의 재현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생강의 음악표현 능력은 남의 산조를 재현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뛰어 넘는 수준이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이미지도 대금으로 그려내는 음악가이다.

즉흥무를 보면서 반주하는 실력이나 텔레비전 화면에 효과음악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능력은 이생강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기술인 것이다. 이생강이야말로 그토록 대단한 음악가이고 광장한 연주가이다. 이생강은 이제 무형문화재 45호 대금산조의 기능보유자 통칭 인간문화재라고 하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그의 실력과 업적에 걸맞는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난 그는 그런 것에 자만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모색하며 음악쟁이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전통음악을 전통음악답게 지키는 일은 항상 현재 음악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통음악은 골동품이 아니라 이 시대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시용(施用)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런 음악을 ㄹ만들기 위하여 이생강은 전통음악의 모든 조건을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의 상황에 유용한 다양한 음악을 창조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생강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간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바람직한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글 출처 : 최종민(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