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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산조
일명 현금이라고 불리는 거문고는 4~5세기부터 전래해온 국악기이다.
국악기 중에서 가장 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고 저음악기에 속하며 남성적이면서도 장중하고 무거운 음색을 지니고 있다하여 여성적인 음색을 지니고 있는 가야금과 함께 국악기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꼽힌다.

술대(17cm 정도의 연필만한 대나무)로 줄을 튕기는 유일한 악기이고 풍류 거문고와 산조 거문고 두종이 전래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악을 예와 동일시하며 인격수양을 위한 필요 조건으로 거문고를 선택, 수양의 도구로 삼았다. 즉 거문고가 가지고 있는 고매한 깊은 맛이 사대부들의 인격수양과 연결이 되면서 많은 악기중 백악지장으로 군림해 온 것이다.

거문고 산조는 1896년 백낙준이 창제하여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그 후 박석기(1899~1952), 신쾌동(1910~1977) 양인에게 전승되어 현재는 신쾌동류와 박석기에게 전수받은 한갑득(1919~1987)류 만이 전해진다.
거문고산조의 카리스마, 김무길이야기
거문고가 왕산악(王山岳)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한 그에 의해 100여 곡을 창작했다고는 하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거문고는 연주법을 상실한 채 '천존고(天尊庫)'라는 보물창고에 대금과 함께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나 옥보고란 인물이 나타나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자리잡고 거문고를 독학한 끝에 30여 곡의 창작곡을 만들었다.

단순히 삼국사기에 전하는 이야기이지만 만약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거문고는 문헌 속에 나오는 '죽은 악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지리산은 거문고가 다시 태어나게 되는 역사적인 산이며 특히 산줄기에 위치한 '운봉'이란 지역은 옥보고가 입산했던 '운상원(雲上院)'으로 알려져 있다.


한갑득(韓甲得 1919-1987)류 거문고산조의 김무길(金茂吉 1943- )은 지극히 옥보고와 닮은 인물이다.
거문고와 평생을 같이 한 것이나 거문고를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노력들이 그것이다. 그래선지 김무길은 아예 2003년 지리산 운봉 자락에 터를 잡고 '운상원 소리터'란 간판을 내걸었다. 옥보고의 뜻을 이어 거문고의 맥을 이어가겠다는 것의 그의 의도다.

7세 무렵, 아버지 김봉현의 손에 이끌려 한갑득에게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로 그에게 거문고는 평생의 동반자였다. 김무길의 부친은 당시 여성극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한갑득김무길이 태어나기 전부터 8년 동안 그의 부친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 손을 잡고 신혼예식장(종로부근) 근처에 사시던 한갑득 선생을 자주 찾아갔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8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사셨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거문고를 배우게 되었지요."
대략 7, 8년 간을 한갑득에게 사사 받다가,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또 한사람의 명인 신쾌동(申快童 1910-1978)에게 거문고를 사사 받게 된다. 그러나 당대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던 두 사람에게 동시에 사사 받는 일이란 그리 수월치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스타일도 다르고, 학교에서는 신쾌동에게 사사를 받고 있었으니 한갑득의 집에는 도저히 갈 수도 없었다.

한갑득김무길이 어쩌다 찾아오면 야단을 치고, 인연을 끊겠다고 하다가도 오지 않으면 못내 섭섭해했다고 한다. 결국 두 명인들의 제자 욕심은 신쾌동의 타계로 끝이 나고 김무길은 다시 한갑득에게 거문고를 사사 받기 시작했다. 그것이 1966년의 일이다.
"신쾌동 선생 타계 후, 한달 쯤 지나 한갑득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거문고를 사사 받았습니다. 어릴 적 배운 데다가 다시 복습한다는 느낌으로 시작을 했지요."
이런 연유로 김무길한갑득류신쾌동류 거문고산조를 모두 연주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신쾌동류 거문고산조 전바탕 독주회''한갑득류 거문고산조 전바탕 독주회'를 1994년 한해에 동시에 해치우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무길이 기억하는 두 명인의 특징은 한갑득은 음악적으로는 현란한 기법을 구사하고, 신쾌동은 정대하고 호탕하다고 한다. 또한 성격도 달라 한갑득은 내성적이며 술을 좋아했던 반면, 신쾌동은 직선적이지만 술을 멀리 했다고 한다.

김무길은 이런 두 명인의 성격을 고루 닮았다. 술을 좋아하고 말수가 조용한 것은 한갑득을, 연주할 때의 호탕함과 정갈한 맛을 내는 것은 신쾌동을 닮았다. 그래서 흔히 김무길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거문고 명인'으로 부른다.

김무길의 거문고인생에 있어 두 명인과 함께 또 한사람의 내조자가 있다. 그의 아내인 박양덕은 판소리 명창으로 두 사람은 참으로 오랜 동안 함께 생활을 해왔다. 여성국극단과 창극단 시절을 연주자와 창자로서 호흡을 함께 했다. 서로간의 연주와 호흡과 감정이 일치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결혼에 도달했다. 지금도 창극, 거문고병창 등 다양한 작업들을 함께 해오고 있다.

그가 거문고를 좋아하는 것은 남성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한다.
'남자가 울면 속으로 운다'는 말이 있듯, 거문고는 무거운 가운데 날렵하고, 날렵한 가운데 중후하고 마음을 흔드는 또 다른 무게가 느껴진다고 한다.

거문고의 카리스마 김무길은 2003년을 시작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는다. 60세가 된 것이다.
이제 자신의 거문고인생을 '운상원 소리터'와 함께 할 생각이다. 옥보고의 뜻을 이어 거문고에 관련한 창극, 경연대회 등을 열어 '천존고'에 감춰져 있던 거문고를 세상에 알린 옥보고를, 이번에 김무길이 세상에 알릴 생각이다.

글 출처 : 우리음악의 원형 '산조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