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쟁산조
아쟁산조는 아쟁으로 연주하게끔 구성된 산조라는 음악 형식을 가리킨다.
아쟁이라는 악기는 우리나라 전통악기의 하나이다. 오동나무로 얇게 판을 만들어 위에 대는 복판을 만들고, 밤나무로 얇게 밑에 대는 등판을 만들어 납작하고 긴 상자모양의 공명통을 짠 뒤에 여기에다 명주실 7개를 걸고 기러기발 모양의 안족을 고여 음을 고른 다음 송진을 바른 개나리 막대기로 줄을 켜서 소리를 낸다.
연주를 할때는 악기를 앞에 놓고 앉아 오른손으로 개니리 활대를 들고 줄을키며 왼손가락으로는 안족의 왼편 줄 위를 눌러 음을 조절하는데 농현이라 하여 음을 떨거나 흘러내리게 한다. 이 악기는 대체로 음역이 낮은 찰현악기로 서양의 첼로와 비슷한 장중한 음색을 내는데 소리는 텁텁한 편이다.
원래 아쟁은 중국에서 들어와 고려 떄 부터 중국음악 계통인 당악의 연주에 쓰이다가 조선초기에는 우리나라 음악인 향악에도 쓰이기 시작하였다. 원래 아쟁은 궁중음악에 주로 쓰였으나 일제떄 유명한 박성옥이 아쟁으로 무용반주음악과 창극 반주음악을 연주하면서 비로소 민속음악에 쓰이기 시작했고 1946년 무렵에는 정철호가 아쟁으로 연주하는 산조를 지어서 비로소 아쟁산조가 생기었다.
정철호가 아쟁산조를 내자 이내 한일섭이 또 다른 아쟁산조를 지었고 이어서 장월중선도 다른 류의 아쟁산조를 지어 아쟁산조가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이들이 많은 제자를 길러 아쟁 산조가 널리 퍼지니 오늘날에는 한국 전통암악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음악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이 음반에 담은 아쟁산조는 한일섭이 지은 한일섭류의 아쟁산조로 한일섭의 제자 박종선이 연주한 것이다.
한일섭은 1929년에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판소리를 공부하였으나 중간에 기악으로 전공을 바꾸었다고 한다. 창작에 특이한 재주가 있어 여러 신민요를 작곡하기도 했고 아쟁산조와 호적산조를 지어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서울에서 지병으로 작고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쟁산조로는 박종선 윤윤석등 여러 명인이 나왔고, 대금산조 분야에서는 이생강등 여러 명인이 나왔으며 호적산조에도 여러 제자들이 있다.
박종선은 1945년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다. 15세 때 까지 광주에서 살다가 16세 때에 지방 어느 선생에게 가야금 산조를 배우고 또 장고를 익혔는데, 그 무렵 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활약했다 한다. 17세 때에는 당시 아쟁산조가 유행하였으므로 홀로 아쟁시나위를 독습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한일섭의 집에 눌러 살면서 3년간 호적시나위와 아쟁산조 그리고 장고장단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1981년 부터는 국립국악원에서 장고 아쟁 북 호적 꽹과리 등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가로 일하고 있다.
박종선이 연주하는 아쟁산조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진양은 매우 느린 6박자를 넷으로 하여 24박자를 한장단으로 하는데 유장한 느낌을 준다.
중모리는 보통 빠른 12박자이며 한박자가 2박으로 갈라지기 떄문에 2분박 12박자이며 4분의 12박자로 적을 수도 있다. 아주 꿋꿋한 느낌을 준다.
중중모리는 좀 느린 4박자이며 한박자가 3박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3분박 4박자이며 8분의 12박자로 적을 수 있다. 구성진 느낌을 준다.
자진모리는 좀 빠른 4박자이며 한박자가 3박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3분박 4박자이며 8분의 12박자로 적을 수 있다. 처음에는 흥겨운 느낌을 주지만 몰아가면 격렬하고 촉급한 감을 준다.
또 아쟁산조에서 진양 장단은 웅장한 느낌을 주는 우조와 슬픈 느낌을 주는 계면조로 바뀌고 끝에는 다시 계면조로 되돌아 온다. 중중모리는 계면조로 일관하며 자진모리 또한 계면조로 일관된다.
아쟁산조는 우리 민속음악이 흔히 그렇듯이 텁텁한 음색에도 농현이 굵고 설득력이 있어 감정표출이 짙다. 거기다가 선율의 이완이 뚜렷해 맺고 푸는 감정의 표현이 극도로 강조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